황정하(당시 24세)
1960년 12월 5일 부산에서 태어남
1979년 2월 부산 경남고등학교 수석 졸업
1979년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 수석으로 합격했으나 색약으로 탈락
1980년 서울대 공과계열 입학
1981년 서울대 공과대학 도시공학과 진입
1983년 11월 8일 교내시위중 도서관 6층 난간에서 추락
1983년 11월 16일 오전 11시 22분 운명. 화장.
1979년 2월 부산 경남고등학교 수석 졸업
1979년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 수석으로 합격했으나 색약으로 탈락
1980년 서울대 공과계열 입학
1981년 서울대 공과대학 도시공학과 진입
1983년 11월 8일 교내시위중 도서관 6층 난간에서 추락
1983년 11월 16일 오전 11시 22분 운명. 화장.
태어날 때부터 유달리 큰 몸집과 목소리를 타고 났던 동지는 정이 많고 가끔은 덤벙대고 유머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동지의 삶에 대한 열정은 대학인으로서의 한계를 벗어나 민중과 함께 되고자 몸부림치게 했고 2학년때는 1년간 야학활동을 왕성히 전개하기도 했다.
동지가 시위주동을 결행하기 직전인 83년 가을, 소위 ‘야학연합회’ 사건에 연루되자 학교당국의 압박은 심한 심리적 고통을 주었고 졸업을 압둔 4학년으로서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83년은 전두환 정권의 학원탄압이 그 도를 더해가고 이에 굴하지 않는 10여회의 교내 및 가두시위가 계속되고 있었다. 당시 미국 극동전략의 변화로 일본의 재무장이 가속화되고 겉으로는 긴장완화를 요구하는 상황이 마련됨과 동시에 한-미-일 삼각군사동맹체제가 강화되고 있었다. 민족이 영원한 외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고 독재정권의 확고한 기반이 마련되려는 상황에서 11월 11일 레이건 방한이 예정되었다. 모든 민주세력의 결론은 같았다. 미국의 이익을 위해 한국이 대리전쟁터가 될 수 없었고 일본의 재침략을 용납할 수 없었다.
이러한 의견일치 속에 6명이 시위주동을 결정했다. 83년 11월 8일 낮 12시 35분경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민주화 투쟁’을 주도하고자 도서관 6층 창문을 통해 밧줄을 타고 5층 베란다로 내려오다가 15M 아래의 시멘트 바닥으로 동지는 추락했다. 도서관의 방충망을 찢어내고 매어둔 밧줄을 난간으로 늘어뜨린 후 5층 베란다로 내려가기 위해 창틀에 올라서려 했다. 이 때 “저 놈 잡아라”하는 고함소리와 함께 열람실에 진을 치고 있었던 사복경찰과 수위들이 달려들었다. 난간으로 내려오던 동지는 기관원 10여명의 제지로 추락, 뇌골절상을 입었다. 이 과정에서 경찰들은 동지의 생명은 아랑곳 없이 학생들의 접근을 제지하고, 시위주동 동료학생 체포에만 급급한 채 동지의 웃옷을 벗겨 피가 흐르는 머리를 가리고 그대로 방치해 두었다.
11월 9일자 한국일보는 이 사건을 “관계기관원의 제지를 뿌리치려다 추락”으로 보도했다가 이튿날 즉시 “본인의 실수로 추락, 중태”라고 정정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었던 많은 학생들은 경찰이 밧줄을 흔들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동지는 11월 16일 오전 11시 22분경 근 1주일간 죽음을 기다리며 병상에 있다가 운명하였다. 동지의 시신은 운명한지 불과 6시간만에 욕된 손들에 의해 벽제화장터에서 한 줌의 재로 변하여 가족들에게 돌아왔다.
동지가 외치고자 한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민주화 투쟁선언’은 이후 살아있은 학우들의 가슴속에 울려퍼졌고 전두환 정권 타도, 레이건 방한 저지 투쟁의 책임은 살아남은 이의 몫이 되었다.
동지를 생각하며
<정하형을 생각하며 - 열사 10주기 자료집 중에서>
도시공학과 후배 91학번 유웅준
정하형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내가 1학년때였다.
화학 리포트를 쓰기 위해 도서실에 갔다가 ‘산자여 따르라’는 책을 발견하고 좋아하던 노래
- 님을 위한 행진곡 - 의 마지막 가사와 같은 책 제목에 무심코 꺼내어 펼쳐 보았다.
거기에는 관악4열사에 대한 내용이 있었고 그중 정하형이 있었다.
도시공학과 선배로 열사의 삶을 살다간 정하형의 흔적들에 그날 결국 리포트를 쓰지 못했다.
매년 이맘때가 되어야 꽃 몇송이가 놓일까 평상시엔 언제나 황량하던 공대 연못옆 정하형 비는
2학년 초 내게, 진지한 사색의 기회를 제공하곤 했다.
듣기로는 당시 많은 이들이 정하형의 죽음에 영향을 받고 사회참여의 길에 동참하고 활동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는 형의 이름을 기억못하는 과성원들도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열사를 기억하자는 것은 단지 지난날의 사진 첩을 보듯 추억에 잠기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을 돌아보자는 말이다.
정하형의 삶을 통해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말이다.
올해는 정하형이 돌아가신 지 10년이 되는 해다.
분명 10년 전과 지금은 상황도 틀리고 변화도 있었다.
그러나 변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은 바로 우리가 취해야 할 삶의 태도이다.
거꾸로 도는 세상에 단호히 타협을 거부하며
당당한 양심의 길을 택한, 걸어간 형의 태도를 우리는 배워야 할 것이다.
정하형.....
바람에 항거한다. 스스로 뿌리 잘라 몸던져 흩날린 꽃처럼. / 형의 모습을 봅니다.
38동 강의실에서 공대식당에서 녹두거리에서
때로는 웃으며 / 때로는 꾸짖으며 / 때로는 등을 두드려주며
내게 다가와 조용히 삶을 이야기하는, 민중을 이야기하는 / 우리의 사회를 미래를 민주를 통일을
고민하며 살려고 합니다. / 치열하게 살려고 합니다.
형... 정하형...
동지가 시위주동을 결행하기 직전인 83년 가을, 소위 ‘야학연합회’ 사건에 연루되자 학교당국의 압박은 심한 심리적 고통을 주었고 졸업을 압둔 4학년으로서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83년은 전두환 정권의 학원탄압이 그 도를 더해가고 이에 굴하지 않는 10여회의 교내 및 가두시위가 계속되고 있었다. 당시 미국 극동전략의 변화로 일본의 재무장이 가속화되고 겉으로는 긴장완화를 요구하는 상황이 마련됨과 동시에 한-미-일 삼각군사동맹체제가 강화되고 있었다. 민족이 영원한 외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고 독재정권의 확고한 기반이 마련되려는 상황에서 11월 11일 레이건 방한이 예정되었다. 모든 민주세력의 결론은 같았다. 미국의 이익을 위해 한국이 대리전쟁터가 될 수 없었고 일본의 재침략을 용납할 수 없었다.
이러한 의견일치 속에 6명이 시위주동을 결정했다. 83년 11월 8일 낮 12시 35분경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민주화 투쟁’을 주도하고자 도서관 6층 창문을 통해 밧줄을 타고 5층 베란다로 내려오다가 15M 아래의 시멘트 바닥으로 동지는 추락했다. 도서관의 방충망을 찢어내고 매어둔 밧줄을 난간으로 늘어뜨린 후 5층 베란다로 내려가기 위해 창틀에 올라서려 했다. 이 때 “저 놈 잡아라”하는 고함소리와 함께 열람실에 진을 치고 있었던 사복경찰과 수위들이 달려들었다. 난간으로 내려오던 동지는 기관원 10여명의 제지로 추락, 뇌골절상을 입었다. 이 과정에서 경찰들은 동지의 생명은 아랑곳 없이 학생들의 접근을 제지하고, 시위주동 동료학생 체포에만 급급한 채 동지의 웃옷을 벗겨 피가 흐르는 머리를 가리고 그대로 방치해 두었다.
11월 9일자 한국일보는 이 사건을 “관계기관원의 제지를 뿌리치려다 추락”으로 보도했다가 이튿날 즉시 “본인의 실수로 추락, 중태”라고 정정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었던 많은 학생들은 경찰이 밧줄을 흔들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동지는 11월 16일 오전 11시 22분경 근 1주일간 죽음을 기다리며 병상에 있다가 운명하였다. 동지의 시신은 운명한지 불과 6시간만에 욕된 손들에 의해 벽제화장터에서 한 줌의 재로 변하여 가족들에게 돌아왔다.
동지가 외치고자 한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민주화 투쟁선언’은 이후 살아있은 학우들의 가슴속에 울려퍼졌고 전두환 정권 타도, 레이건 방한 저지 투쟁의 책임은 살아남은 이의 몫이 되었다.
동지를 생각하며
<정하형을 생각하며 - 열사 10주기 자료집 중에서>
도시공학과 후배 91학번 유웅준
정하형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내가 1학년때였다.
화학 리포트를 쓰기 위해 도서실에 갔다가 ‘산자여 따르라’는 책을 발견하고 좋아하던 노래
- 님을 위한 행진곡 - 의 마지막 가사와 같은 책 제목에 무심코 꺼내어 펼쳐 보았다.
거기에는 관악4열사에 대한 내용이 있었고 그중 정하형이 있었다.
도시공학과 선배로 열사의 삶을 살다간 정하형의 흔적들에 그날 결국 리포트를 쓰지 못했다.
매년 이맘때가 되어야 꽃 몇송이가 놓일까 평상시엔 언제나 황량하던 공대 연못옆 정하형 비는
2학년 초 내게, 진지한 사색의 기회를 제공하곤 했다.
듣기로는 당시 많은 이들이 정하형의 죽음에 영향을 받고 사회참여의 길에 동참하고 활동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는 형의 이름을 기억못하는 과성원들도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열사를 기억하자는 것은 단지 지난날의 사진 첩을 보듯 추억에 잠기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을 돌아보자는 말이다.
정하형의 삶을 통해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말이다.
올해는 정하형이 돌아가신 지 10년이 되는 해다.
분명 10년 전과 지금은 상황도 틀리고 변화도 있었다.
그러나 변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은 바로 우리가 취해야 할 삶의 태도이다.
거꾸로 도는 세상에 단호히 타협을 거부하며
당당한 양심의 길을 택한, 걸어간 형의 태도를 우리는 배워야 할 것이다.
정하형.....
바람에 항거한다. 스스로 뿌리 잘라 몸던져 흩날린 꽃처럼. / 형의 모습을 봅니다.
38동 강의실에서 공대식당에서 녹두거리에서
때로는 웃으며 / 때로는 꾸짖으며 / 때로는 등을 두드려주며
내게 다가와 조용히 삶을 이야기하는, 민중을 이야기하는 / 우리의 사회를 미래를 민주를 통일을
고민하며 살려고 합니다. / 치열하게 살려고 합니다.
형... 정하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