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일(당시 26세)
1960년 전남 화순 출생.
광주 양동국민학교 졸업.
1984년 2월 ‘사우디’에 미장공으로 취업.
1985년 2월 귀국하여 건설 사업장을 전전하며 어렵게 생활.
1985년 8월 15일 오후 1시 전남 도청앞 금암로 1가에서 ‘8.15를 맞이하는 뜨거움의 무등산이여!’라는 전단을 뿌리면
서 군부독재정권에 항거하여 분신.
광주 양동국민학교 졸업.
1984년 2월 ‘사우디’에 미장공으로 취업.
1985년 2월 귀국하여 건설 사업장을 전전하며 어렵게 생활.
1985년 8월 15일 오후 1시 전남 도청앞 금암로 1가에서 ‘8.15를 맞이하는 뜨거움의 무등산이여!’라는 전단을 뿌리면
서 군부독재정권에 항거하여 분신.
광복 40주년을 맞이했던 지난 8월 15일 오후 1시 광주민중항쟁의 역사적 장소인 전남도청앞 차도에서 홍기일씨(26. 건축노동자)가 온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성냥을 그어 불을 붙인 다음 불깅에 휩싸인 채 동구청까지 구호를 외치며 돌진하다 ‘8.15를 맞이하는 뜨거운 무등산이여!’라는 유인물과 부모님과 형에게 보내는 유서를 뿌리면서 “광주시민이여! 침묵에서 깨어나라!!”, “학원안정법 반대투쟁에 결사적으로 나서자” “민주주의 만세, 민족통일 만세” “뭉칩시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분신자살을 기도, 일주일만인 22일 새벽 12:30분 임종을 지켜보는 아버지에게 ”절대 비굴해 지지 말라. 저 사람들(경찰)과 타협해서는 안된다“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산화하였다.
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시 시민군으로 참여 도중 총상을 입기도 하였던 열사는 그후 건축노동자로 일해오면서 5.18의 의미를 되새기며 당시 살아남은 부끄러움을 승화시켜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자기의 할 일을 모색하며 열심히 살아왔다. 또한 부모님께 남긴 유서에서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성품이 착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분신을 기도하기 얼마전인 8월 1일에는 건축일을 해 벌어온 62먼원을 부모님께 전해드리면서 “나의 마지막 효도가 될 것 같다”고 하였다 한다. 그리고 분신 전날인 14일 저녘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잘 있거라. 마지막이 될 것 같다”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나이 많은 분들이 찾아오면 일어나 보려고 애쓰던 열사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조금도 초조한 기색이 없었으며 오히려 국민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의연한 모습으로 주위 사람들을 숙연하게 했다.
열사는 그 위독한 상태에서도 7일간이나 모진 목숨을 강인하게 버텨왔으나 열사의 어머니에 의하면 의사들은 21일 오후 4시경 운명하시리라 예상했다 한다. 그러나 이날 오후 의사들은 열사에게 알 수 없는 주사를 놓고, 산소호흡을 중단한 채 죽음만을 기다려온 열사에게 다시 강제로 산소호흡을 시켰는데 이는 열사께서 낮에 운명하실 경우 시신을 빼돌리기가 어렵고 사태가 심각해질 것을 우려한 경찰이 열사의 생명을 몇시간 연장시켜 운명시간마저 새벽으로 지연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는 22일 새벽 0시 반경 아직도 생명이 붙어있는 열사의 산소호흡기를 의사가 제거해 버렸으며 이때 열사의 전신이 경련을 일으켰으며, 팔다리가 움직였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열사가 마침내 운명하자 정.사복 형사와 전경 1000여명을 동원, 민주인사들과 학생들을 강제 연행하고 “형을 따라 죽겠다” “열사를 두번 죽일 수 없다”는 동생과 가족들의 절규속에 시신을 탈취, 미리 준비한 관에 입관하여 영구차 승차를 거부하는 유족들을 구타, 위협하면서 열사의 아버지를 화순군 도안면 백지리 야산의 매장지로 강제 동행시켜 아버지의 입회 하에 가족장으로 관을 매장시켜 버리는 폭거를 자행하였다.
유서
8·15을 맞이하는 뜨거움 무등산이여!
그토록 울부짖으며 부르짖던 민주가 자유가 뜨거움의 아픔으로 5년이 흐른 이 시점에서 아픔이 아픔으로 느끼지 못하는 이 현실에 무등을 보기가 부끄러울 뿐입니다.
4강의 각축장에서 미국은 미국의 안보를 위한(한국의 핵기지화와)일본의 경제적 침략의 한계를
우리 민족은 생사의 갈림길에 서있습니다. 더욱 가증스러운 것은 현 전두환 군사정권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일본의 대한 침략의 길을 더욱 개방함으로서 우리들의 사상과 주체성이 서서히 허물어짐으로서 이 현실의 8·15의 의미가 부끄러울 뿐입니다.
현정권의 무책임한 정책으로 인하여 날로 가속화 되어가는 제국주의의 경제적 종속은 농촌과 도시 산업의 파괴로서 서서히 다급하게 말라죽고 있습니다. 우리는 깨어나야 합니다. 대오각성을 해야 합니다. 온갖 억압의 배고픔보다 우리 스스로 참여하는(민주의 속의 배고픔)에 나아가야 합니다.
더욱 무서운 것은 우리들의 주체성이 아주 결여되어 있습니다. 민주의 아픔이 민족의 아픔이 민족 통일의 아픔이 온갖 허위와 쾌락과 무지와 몽둥이의 두려움 속에 잠들고 있습니다.(저 사랑하는 동생과 어린 자식의 노동자를 보십시오)
침묵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마취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대담해야 합니다. 뭉쳐야 합니다.
민주주의 만세! 민족주의 만세! 민족통일 만세!
무등을 사랑하는 홍기일
× ×
존경하고 사랑스런 아버님, 어머님.
이 불효자식은 무어라고 용서를 빌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처절하게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이 무서운 가정의 현실에 자식의 도리를 못하고 가버린 이 죄를 무엇으로 해야 하나요.
아버님, 어머님께서는 알고 계실 겁니다.
현재 처에 있는 우리들의 무서운 현실 말입니다.
아버님
누군가 누군가가, 우리 모두가 일어서지 않으면 안됩니다. 빈부의 격차를 떠나 산다는 의미의 지혜가 이처럼 허무하게 느껴지는 현실에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고 봐야 한다는 여러 사람들의 생각에 폭탄을 터뜨리기 위해선 성냥이 필요합니다. 경우에 따라서 무의미할 것도 같습니다. 아버지
저는 세상을 우리 대한민국의 보수주의 형님처럼 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아버님은 알고 계실겁니다.
부디 아버님의 용서를 빌뿐입니다.
불쌍한 어머니 꼭꼭 달래시며.
여생을 살아 가십시요.
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시 시민군으로 참여 도중 총상을 입기도 하였던 열사는 그후 건축노동자로 일해오면서 5.18의 의미를 되새기며 당시 살아남은 부끄러움을 승화시켜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자기의 할 일을 모색하며 열심히 살아왔다. 또한 부모님께 남긴 유서에서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성품이 착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분신을 기도하기 얼마전인 8월 1일에는 건축일을 해 벌어온 62먼원을 부모님께 전해드리면서 “나의 마지막 효도가 될 것 같다”고 하였다 한다. 그리고 분신 전날인 14일 저녘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잘 있거라. 마지막이 될 것 같다”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나이 많은 분들이 찾아오면 일어나 보려고 애쓰던 열사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조금도 초조한 기색이 없었으며 오히려 국민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의연한 모습으로 주위 사람들을 숙연하게 했다.
열사는 그 위독한 상태에서도 7일간이나 모진 목숨을 강인하게 버텨왔으나 열사의 어머니에 의하면 의사들은 21일 오후 4시경 운명하시리라 예상했다 한다. 그러나 이날 오후 의사들은 열사에게 알 수 없는 주사를 놓고, 산소호흡을 중단한 채 죽음만을 기다려온 열사에게 다시 강제로 산소호흡을 시켰는데 이는 열사께서 낮에 운명하실 경우 시신을 빼돌리기가 어렵고 사태가 심각해질 것을 우려한 경찰이 열사의 생명을 몇시간 연장시켜 운명시간마저 새벽으로 지연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는 22일 새벽 0시 반경 아직도 생명이 붙어있는 열사의 산소호흡기를 의사가 제거해 버렸으며 이때 열사의 전신이 경련을 일으켰으며, 팔다리가 움직였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열사가 마침내 운명하자 정.사복 형사와 전경 1000여명을 동원, 민주인사들과 학생들을 강제 연행하고 “형을 따라 죽겠다” “열사를 두번 죽일 수 없다”는 동생과 가족들의 절규속에 시신을 탈취, 미리 준비한 관에 입관하여 영구차 승차를 거부하는 유족들을 구타, 위협하면서 열사의 아버지를 화순군 도안면 백지리 야산의 매장지로 강제 동행시켜 아버지의 입회 하에 가족장으로 관을 매장시켜 버리는 폭거를 자행하였다.
유서
8·15을 맞이하는 뜨거움 무등산이여!
그토록 울부짖으며 부르짖던 민주가 자유가 뜨거움의 아픔으로 5년이 흐른 이 시점에서 아픔이 아픔으로 느끼지 못하는 이 현실에 무등을 보기가 부끄러울 뿐입니다.
4강의 각축장에서 미국은 미국의 안보를 위한(한국의 핵기지화와)일본의 경제적 침략의 한계를
우리 민족은 생사의 갈림길에 서있습니다. 더욱 가증스러운 것은 현 전두환 군사정권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일본의 대한 침략의 길을 더욱 개방함으로서 우리들의 사상과 주체성이 서서히 허물어짐으로서 이 현실의 8·15의 의미가 부끄러울 뿐입니다.
현정권의 무책임한 정책으로 인하여 날로 가속화 되어가는 제국주의의 경제적 종속은 농촌과 도시 산업의 파괴로서 서서히 다급하게 말라죽고 있습니다. 우리는 깨어나야 합니다. 대오각성을 해야 합니다. 온갖 억압의 배고픔보다 우리 스스로 참여하는(민주의 속의 배고픔)에 나아가야 합니다.
더욱 무서운 것은 우리들의 주체성이 아주 결여되어 있습니다. 민주의 아픔이 민족의 아픔이 민족 통일의 아픔이 온갖 허위와 쾌락과 무지와 몽둥이의 두려움 속에 잠들고 있습니다.(저 사랑하는 동생과 어린 자식의 노동자를 보십시오)
침묵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마취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대담해야 합니다. 뭉쳐야 합니다.
민주주의 만세! 민족주의 만세! 민족통일 만세!
무등을 사랑하는 홍기일
× ×
존경하고 사랑스런 아버님, 어머님.
이 불효자식은 무어라고 용서를 빌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처절하게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이 무서운 가정의 현실에 자식의 도리를 못하고 가버린 이 죄를 무엇으로 해야 하나요.
아버님, 어머님께서는 알고 계실 겁니다.
현재 처에 있는 우리들의 무서운 현실 말입니다.
아버님
누군가 누군가가, 우리 모두가 일어서지 않으면 안됩니다. 빈부의 격차를 떠나 산다는 의미의 지혜가 이처럼 허무하게 느껴지는 현실에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고 봐야 한다는 여러 사람들의 생각에 폭탄을 터뜨리기 위해선 성냥이 필요합니다. 경우에 따라서 무의미할 것도 같습니다. 아버지
저는 세상을 우리 대한민국의 보수주의 형님처럼 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아버님은 알고 계실겁니다.
부디 아버님의 용서를 빌뿐입니다.
불쌍한 어머니 꼭꼭 달래시며.
여생을 살아 가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