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원근(당시 22세)
1962년 5월 15일 전남 진도에서 출생.
1981년 부산 수산대 입학.
1983년 군 입대.
1984년 4월 2일 운명.
1981년 부산 수산대 입학.
1983년 군 입대.
1984년 4월 2일 운명.
호소문 -허원근 동지의 아버지 허영춘님께서 인권옹호위원회 의장에게 보낸 글
삼가 인권을 짓밣히고 살고있는 국민의 한 사람이 국민의 심판을 받고져 이 글을 올립니다.
냉철한 판단과 공정무사한 판결을 저에게 주시고 추호의 잘못이 있다면 지탄없는 가르침을 저에게 들려주시길 바라면서 이글을 드립니다.
어제밤 꿈에 아들의 유골을 받아안고 밤새껏 울다가 날이 새었습니다. 그런데 오후 청화대 비서실에서 편지가 한통 날아왔습니다.
7년간의 정치속에서 협조해주어서 감사하다는 내용이었으며 발전되는 나라에 협조해 주어서 고맙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나는 지금 그중 청원이라는 미명하에 걸려들어 더 이상의 어떠한 탄원도 진정도 못하고 있는 한 농어민입니다.
이 사건의 내용인 즉 이러 합니다.
1984. 4. 2 강원도 철원땅 최전방 철책선에서 아들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나라의 부름을 받고 군에 입대한지 7개월만에 “귀대중 사망”이라는 전보를 받고 밤세워 화천에 가서 시체안치소에 갔더니 시체를 보지 못하게 하고 헌병대에 안내되어 헌병대장 중령 양종홍 수사계장 이혜교를 만나 사건내용을 보고받았으며 상급부대에 보내는 서류를 읽어 보았습니다.
총 2발로 추정 자살했다는 것과 탄피는 현장에서 수거 되었다는 것과 9시 30분경 중대장이 철책순찰중 총성이 났다는 등 처음 보는 사건이라 최상급부대에 수사를 의뢰했다는 등의 말을 듣고, 그후 시체 안치소에 가서보니 젖가슴 양쪽에 구멍이 두 개 나있으며 우측 눈썹위에서 머리 뒷편으로 윗부분이 떨어져 나가버린 완전 파열되어 버린 상태. 두발의 총으로 자실했다면 머리는 무엇으로 인한 것이냐. 는 의문을 갖게 하였습니다.
왼손 모지와 인지 사이에는 깊이 3~4 센치의 칼로 쪼갠듯한 상처가 나 있었습니다.
이 세 군데의 총상은 밀착사격이니 자살이라는 것입니다. 양쪽 가슴에 두발을 쏘아도 죽지 않으니 머리를 쏘았다는 것입니다.
단 머리를 쏘았다면 제3의 행동을 취할수 없다고 했으니 죽음의 원인은 머리에 있다 하였습니다.
군의관 하는 말인즉 총을 7발 맞고도 살아있는 사람이 있다하여 보여주랴는 말에는 할말이 없었고 시체 해부 검사는 거절을 했습니다.
너같은 사람에게는 의뢰할수 없다고 했으며 사건 현장을 보여줄 것을 요구 하였습니다.
그때, 한 병사가 저의 곁에 와서 하는 말이 총성은 10시 52분에 났으며,
2발의 총성을 들었다는 보고를 받고 상황근무 일지에 기록을 했는데 왜 3발의 총을 맞았으냐 절대 자살은 아니다라고 했으며 중대장이 상황일지를 찢어버리고 다시 기록 하라고하면서 병기계를 시켜서 명령했으나 근무자는 다칠까봐 전원이 반대 했으며 욕을 퍼부어 다시 돌려 보냈다고 하였고 오후에 검찰부에서 가져오라고 하여 갖다주었다는 말을 했으며 자기도 고향이 광주이며 부모님께서 자살로 인정하고 그냥 가셔도 제대가 앞으로 8일 남았으니 꼭 찾아 뵙고 누명을 벗기도록 부탁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그 군인을 증인으로 내세울수 없다는 것도 판단 되었습니다.
그 뒷날 사건현장을 헌병중령 양종홍과 함께 최전방에 갔는데 거기 사건현장은 말끔하게 청소되어 있었으며 피 한방울 볼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내무반과 현장과의 중간지점에 약간의 피를 발견하고 헌병대장과 같이 보면서 이게 뭐냐고 물었더니 피자욱이라고 대답했으며 그 피는 하산시 흘렸을 꺼라고 했는데 그후 시체안치소에서 시체를 볼 때, 그리고 들것(단가)에는 피가 새어 흐르는 것이 아니었으며 그곳은 평지이기 떄문에 흐를 장소가 아니며 물이나 피가 흐를 정도의 단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육본에서 왔을 때, 사건현장에 저와 같이 동행하기로 해놓고 자기들끼리만 갔으며 그후 내가 갔을때는 깨끗하게 치워져 있는 이유가 뭐냐 했더니 헌병대장은 근무자들이 무서워 하기 때문에 청소했다고 했습니다.
헌병대 사무실에서 따지고 했더니 그제서야 현장사진을 볼수 있었으며 특별한 예외라면서 복사해줄 것을 약속받았으나 3일후에 줄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당해 분통이 터지도록 울분이 나와 국가 각 기관과 탄원서를 올렸습니다.
범죄수사단에서 통보를 받고 찾아갔더니 자살이 아니라는 반증을 대라고 하였으나 어느 그 누가 죽은이를 위해서 반증을 할 사람이 나서겠습니까.
---- 중략 ---
보고들은 모든 느낌을 다 쓰지 못함을 한탄하면서 현재 아들의 유골도 인수치 않았으며 사망신고도 자살로는 절대 안되겠기에 신고치 못했으며 세월이 한탄속에서 흐르고 있습니다.
현명하고 진실한 판단과 가르침에 하찰하여 주시기를 바라며 앞으로 저의 갈 길을 하교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망자의 부 허영춘
삼가 인권을 짓밣히고 살고있는 국민의 한 사람이 국민의 심판을 받고져 이 글을 올립니다.
냉철한 판단과 공정무사한 판결을 저에게 주시고 추호의 잘못이 있다면 지탄없는 가르침을 저에게 들려주시길 바라면서 이글을 드립니다.
어제밤 꿈에 아들의 유골을 받아안고 밤새껏 울다가 날이 새었습니다. 그런데 오후 청화대 비서실에서 편지가 한통 날아왔습니다.
7년간의 정치속에서 협조해주어서 감사하다는 내용이었으며 발전되는 나라에 협조해 주어서 고맙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나는 지금 그중 청원이라는 미명하에 걸려들어 더 이상의 어떠한 탄원도 진정도 못하고 있는 한 농어민입니다.
이 사건의 내용인 즉 이러 합니다.
1984. 4. 2 강원도 철원땅 최전방 철책선에서 아들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나라의 부름을 받고 군에 입대한지 7개월만에 “귀대중 사망”이라는 전보를 받고 밤세워 화천에 가서 시체안치소에 갔더니 시체를 보지 못하게 하고 헌병대에 안내되어 헌병대장 중령 양종홍 수사계장 이혜교를 만나 사건내용을 보고받았으며 상급부대에 보내는 서류를 읽어 보았습니다.
총 2발로 추정 자살했다는 것과 탄피는 현장에서 수거 되었다는 것과 9시 30분경 중대장이 철책순찰중 총성이 났다는 등 처음 보는 사건이라 최상급부대에 수사를 의뢰했다는 등의 말을 듣고, 그후 시체 안치소에 가서보니 젖가슴 양쪽에 구멍이 두 개 나있으며 우측 눈썹위에서 머리 뒷편으로 윗부분이 떨어져 나가버린 완전 파열되어 버린 상태. 두발의 총으로 자실했다면 머리는 무엇으로 인한 것이냐. 는 의문을 갖게 하였습니다.
왼손 모지와 인지 사이에는 깊이 3~4 센치의 칼로 쪼갠듯한 상처가 나 있었습니다.
이 세 군데의 총상은 밀착사격이니 자살이라는 것입니다. 양쪽 가슴에 두발을 쏘아도 죽지 않으니 머리를 쏘았다는 것입니다.
단 머리를 쏘았다면 제3의 행동을 취할수 없다고 했으니 죽음의 원인은 머리에 있다 하였습니다.
군의관 하는 말인즉 총을 7발 맞고도 살아있는 사람이 있다하여 보여주랴는 말에는 할말이 없었고 시체 해부 검사는 거절을 했습니다.
너같은 사람에게는 의뢰할수 없다고 했으며 사건 현장을 보여줄 것을 요구 하였습니다.
그때, 한 병사가 저의 곁에 와서 하는 말이 총성은 10시 52분에 났으며,
2발의 총성을 들었다는 보고를 받고 상황근무 일지에 기록을 했는데 왜 3발의 총을 맞았으냐 절대 자살은 아니다라고 했으며 중대장이 상황일지를 찢어버리고 다시 기록 하라고하면서 병기계를 시켜서 명령했으나 근무자는 다칠까봐 전원이 반대 했으며 욕을 퍼부어 다시 돌려 보냈다고 하였고 오후에 검찰부에서 가져오라고 하여 갖다주었다는 말을 했으며 자기도 고향이 광주이며 부모님께서 자살로 인정하고 그냥 가셔도 제대가 앞으로 8일 남았으니 꼭 찾아 뵙고 누명을 벗기도록 부탁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그 군인을 증인으로 내세울수 없다는 것도 판단 되었습니다.
그 뒷날 사건현장을 헌병중령 양종홍과 함께 최전방에 갔는데 거기 사건현장은 말끔하게 청소되어 있었으며 피 한방울 볼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내무반과 현장과의 중간지점에 약간의 피를 발견하고 헌병대장과 같이 보면서 이게 뭐냐고 물었더니 피자욱이라고 대답했으며 그 피는 하산시 흘렸을 꺼라고 했는데 그후 시체안치소에서 시체를 볼 때, 그리고 들것(단가)에는 피가 새어 흐르는 것이 아니었으며 그곳은 평지이기 떄문에 흐를 장소가 아니며 물이나 피가 흐를 정도의 단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육본에서 왔을 때, 사건현장에 저와 같이 동행하기로 해놓고 자기들끼리만 갔으며 그후 내가 갔을때는 깨끗하게 치워져 있는 이유가 뭐냐 했더니 헌병대장은 근무자들이 무서워 하기 때문에 청소했다고 했습니다.
헌병대 사무실에서 따지고 했더니 그제서야 현장사진을 볼수 있었으며 특별한 예외라면서 복사해줄 것을 약속받았으나 3일후에 줄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당해 분통이 터지도록 울분이 나와 국가 각 기관과 탄원서를 올렸습니다.
범죄수사단에서 통보를 받고 찾아갔더니 자살이 아니라는 반증을 대라고 하였으나 어느 그 누가 죽은이를 위해서 반증을 할 사람이 나서겠습니까.
---- 중략 ---
보고들은 모든 느낌을 다 쓰지 못함을 한탄하면서 현재 아들의 유골도 인수치 않았으며 사망신고도 자살로는 절대 안되겠기에 신고치 못했으며 세월이 한탄속에서 흐르고 있습니다.
현명하고 진실한 판단과 가르침에 하찰하여 주시기를 바라며 앞으로 저의 갈 길을 하교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망자의 부 허영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