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욱
1968년 9월 16일 경북 청도 출생
1981년 2월 15일 중앙국민학교 졸업
1984년 2월 14일 모계중학교 졸업
1986년 9월 이서고등학교 중퇴
1988년 대구 50사단 입대, 방위병 복무하면서 대구 동국 염공에서 1년 6개월 근무함으로써 노동자 생활 시작
1990년 2월 14일 경북 청도읍 무등동 소재 주신기업에 부인과 입사
1990년 5월 14일 1차 해고. 노동조합 결성, 노조위원장 선출
1990년 5월 20일 원직복직
1990년 5월 30일 2차 해고
1990년 7월 8일 청도 천주교 성당에서 분신, 청도 대남병원 입원
1990년 7월 14일 투병 중 운명
1981년 2월 15일 중앙국민학교 졸업
1984년 2월 14일 모계중학교 졸업
1986년 9월 이서고등학교 중퇴
1988년 대구 50사단 입대, 방위병 복무하면서 대구 동국 염공에서 1년 6개월 근무함으로써 노동자 생활 시작
1990년 2월 14일 경북 청도읍 무등동 소재 주신기업에 부인과 입사
1990년 5월 14일 1차 해고. 노동조합 결성, 노조위원장 선출
1990년 5월 20일 원직복직
1990년 5월 30일 2차 해고
1990년 7월 8일 청도 천주교 성당에서 분신, 청도 대남병원 입원
1990년 7월 14일 투병 중 운명
90년 2월, 주신기업에 인사하였고, 5월 14일 1차 해고된 뒤, 노조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90년 5월30일, 회사측은 노동자와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노동조합 위원장과 조합원 14명만으로 야간 근무조를 편성하여 근무를 지시하였으며, 위원장을 비롯한 조합원들이 이를 부당 노동행위로 간주, 퇴근해 버리자 징계위원회에 최태욱 동지를 회부하여 해고하였다.
그러자 회사측의 부당한 해고에 항의하던 최태욱 동지는 90세의 고령이신 부모님을 남긴 채로 분신하여 유명을 달리 하였다.
<동지를 생각하며>
<1990년 7월 21일 유가족, 청도 군민여러분에게 드리는 글 中에서>
지난 7월14일 새벽 2시5분, 사랑스럽고 우직했던 우리의 아들 태욱이가 분신 자살을 시도한지 일주일만에 세 살된 아들 광민이와 아내, 고령이신 부모님을 남긴 채로 유명을 달리 하였습니다.
노조니 뭐니 처음에 만든다고 할 때 이해를 하지 못하여서 극구 말렸으나 차츰 저희 식구들도 노조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해서 미약하나마 노조 설립을 도왔습니다.
고생하는 태욱이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면서도 힘이 되어 주지 못하는 가족의 능력에 쓰라린 아픔을 느껴야만 했습니다.
대구 순복음 교회에 수십, 수백만원의 헌금을 내어서 자기 혼자 천당엘 가겠다고 하는 사장 김정숙이가 사원들 월급 몇푼 때문에 벌벌 떤다는 사실을 알고 노동법에도 합법적으로 명시되어 있는 노동조합을 만들어서 다함께 잘살아 보자고 그렇게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태욱이의 그런 순수한 마음을 사장이나 군청은 결코 이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노동자의 편에 서서 노동자를 기만하는 어려운 현실 앞에서 자기의 권리를 찾아볼려고 발버둥친 노력이 얼마나 무모한 것이었는가를 알게 되었을 때 태욱이는 한계에 다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의 무력함을 부인하고 스스로 극복하기 위해서 선택된 최후의 방법이 분신 자살이었던 것입니다.
태욱이가 죽은 후 지금 청도군 내에서는 유가족들이 돈에 미쳐서 단돈 십원이라도 더 받아내려고 장례도 치르지 않고 이 불볕 더위에 시신을 그냥 방치해 두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부모, 어느 형제가 자기 아들이나 형제를 팔아서 돈을 벌겠다고 하겠습니까?
관제 기관인 군청과 노동청은 근로자의 편에 서서 최선의 협조로 근로자의 권익을 지켜야 하며 군민 여러분들께서는 이런 정당한 노조 활동을 올바르게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시는 이땅에 죽음을 방법으로 해서 사용자에 항거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90년 5월30일, 회사측은 노동자와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노동조합 위원장과 조합원 14명만으로 야간 근무조를 편성하여 근무를 지시하였으며, 위원장을 비롯한 조합원들이 이를 부당 노동행위로 간주, 퇴근해 버리자 징계위원회에 최태욱 동지를 회부하여 해고하였다.
그러자 회사측의 부당한 해고에 항의하던 최태욱 동지는 90세의 고령이신 부모님을 남긴 채로 분신하여 유명을 달리 하였다.
<동지를 생각하며>
<1990년 7월 21일 유가족, 청도 군민여러분에게 드리는 글 中에서>
지난 7월14일 새벽 2시5분, 사랑스럽고 우직했던 우리의 아들 태욱이가 분신 자살을 시도한지 일주일만에 세 살된 아들 광민이와 아내, 고령이신 부모님을 남긴 채로 유명을 달리 하였습니다.
노조니 뭐니 처음에 만든다고 할 때 이해를 하지 못하여서 극구 말렸으나 차츰 저희 식구들도 노조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해서 미약하나마 노조 설립을 도왔습니다.
고생하는 태욱이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면서도 힘이 되어 주지 못하는 가족의 능력에 쓰라린 아픔을 느껴야만 했습니다.
대구 순복음 교회에 수십, 수백만원의 헌금을 내어서 자기 혼자 천당엘 가겠다고 하는 사장 김정숙이가 사원들 월급 몇푼 때문에 벌벌 떤다는 사실을 알고 노동법에도 합법적으로 명시되어 있는 노동조합을 만들어서 다함께 잘살아 보자고 그렇게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태욱이의 그런 순수한 마음을 사장이나 군청은 결코 이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노동자의 편에 서서 노동자를 기만하는 어려운 현실 앞에서 자기의 권리를 찾아볼려고 발버둥친 노력이 얼마나 무모한 것이었는가를 알게 되었을 때 태욱이는 한계에 다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의 무력함을 부인하고 스스로 극복하기 위해서 선택된 최후의 방법이 분신 자살이었던 것입니다.
태욱이가 죽은 후 지금 청도군 내에서는 유가족들이 돈에 미쳐서 단돈 십원이라도 더 받아내려고 장례도 치르지 않고 이 불볕 더위에 시신을 그냥 방치해 두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부모, 어느 형제가 자기 아들이나 형제를 팔아서 돈을 벌겠다고 하겠습니까?
관제 기관인 군청과 노동청은 근로자의 편에 서서 최선의 협조로 근로자의 권익을 지켜야 하며 군민 여러분들께서는 이런 정당한 노조 활동을 올바르게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시는 이땅에 죽음을 방법으로 해서 사용자에 항거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