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혁
1966년 3월 4일 서울 출생
1984년 3월 서울대 서양학과 입학, 학생운동에 헌신중 수차례의 구류를 삶
1986년 5월 20일 학내시위 도중 최루탄을 맞아 전치 10주의 부상
1987년 4월 23일 군입대
1987년 9월 8일 의문의 죽음을 당함
1984년 3월 서울대 서양학과 입학, 학생운동에 헌신중 수차례의 구류를 삶
1986년 5월 20일 학내시위 도중 최루탄을 맞아 전치 10주의 부상
1987년 4월 23일 군입대
1987년 9월 8일 의문의 죽음을 당함
사건경위(군당국의 발표)
군당국은 1987년 9월8일 0시50분경 육군 20사단 예하 60여단 최우혁 이병(서울대 서양사 84학번, 87년 4월8일 입대, 상황실 근무)이 부대내의 쓰레기 소각장에서 분신하여 국군 덕정병원으로 이송중 사망하였다고 발표하였다(사망시각 : 0시50분 - 1시30분 추정). 헌병대는 사망동기를 개인적 고민에 의한 자살이며 전신 화상과 점화 당시의 질식이 직접적 사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유서와 그에 준하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군의 최우혁 동지의 사망을 전후한 행적에 대한 발표는 다음과 같다. 7일 21:00 일석 점호를 할때 최우혁 동지가 자리에 없어, 동료가 화장실에 간다면서 나갔다고 하였다. 그는 불침번에게 “나는 야간 근무 허가가 났으니 누가 물어 왜 없냐고 하면 그리 대답하라”고 말했다 한다. 0:15경 최우혁 동지가 자판기에서 율무차를 빼먹는 것을 운전병이 보았고 이 시각 이후부터 0:50까지는 목격자가 없다. 0:50경 소각장에서 펑하고 불길이 치솟는 것을 위병 초소 근무자가 발견하고 달려가면서 보니 사람같아서 고함을 지르고, 남은 1인이 일직 사령에게 보고하고 같이 뛰어갔다 한다. 달려간 사병은 서서 불타고 있던 최우혁 동지에게 “뭐하냐? 굴러라” 하였더니, 최우혁 동지는 두어차례 굴렀고 자기는 잠바를 벗어 감쌌다고 했다. 불길에 휩싸인 사람이 선 채로 빳빳이 서 있었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대목으로 증언을 신뢰할 수 없다. 2-3분 내에 진화가 끝났는데 그때 최우혁 동지가 “살려주세요”라는 말을 분명히 했다고 한다. 일직사관은 최우혁 동지를 담요로 감싸 병원으로 1:30경 옮겼으나, 의사는 이미 사망하였다고 하였다. 동지의 죽음의 원인이 ‘분신이 아님’은 다음 사실로 뒷받침되고 있다. 군은 처음에는 최우혁 동지가 개인적인 고민으로 자살했을 것이라고 유서도 기록도 없는 상황에서 수사결과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군의 일방적인 장례식 이후, 보안대 부관은 가족에게 새로운 사실을 알렸다. 사망 일주일전 최우혁 동지에게 2급 기밀문서 초안 30장중 15장을 정서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복사를 지시했다고 하다가 최우혁 동지의 형이 기밀문서를 마구 복사해도 되느냐고 묻자 황급히 정서하는 것이라고 바꾸었다). 그런데 최우혁 동지가 실수로 그중 9장을 절삭처리해 버리고 질책이 두려워서 고민했었다라는 것이다. 최우혁 동지의 형이 “왜 이제야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이유가 뭐냐?”고 묻자 보안대 부관은 장례식 당일인 그날에야 알았다고 답변했다. 기밀문서는 통상 1일 최소한 1회 이상 점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제껏 몰랐다는 것은 그러한 사실이 없었거나, 조작되었을 가능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자살”이라는 발표의 신빙성 문제가 추궁되자 궁지에 몰린 당국은 갑작스레 최우혁 동지를 무능함과 심약함에 비관한 졸장부로 만들려 했다. 또 한 가지 그들이 횡설수설하는 것은, 정보과 선임하사는 최우혁 동지가 근무시간에 대공 서적을(사회과학서적) 읽다가 보안대에 적발이 되어 선임하사 자신이 보안대로부터 질책을 받았다고 했다. 보안대에 유가족이 이 사실을 추궁하자 그들은 그런 사실이 없다고 하며 그들 사이에 말이 맞지 않았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최동지는 문책, 아니 더 심한 행위를 당했을 것이다. 그의 유품중 대변이 손바닥만한 넓이로 굳은 팬티가 발견되어서 가족들이 매우 놀랐다. 이것이 심한 구타나 고문에 의해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의 증거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지의 갑작스런 죽음에 접한 가족들은 미처 이 증거물을 챙기지 못하고 하루가 지난 후에야 군당국에서 그 속옷을 달라고 하였더니 이미 소각해 버렸다고 하였다. 육군 과학수사연구소 군의관 집도하에, 최우혁 동지 가족이나 변호사의 참가없이 일방적인 부검이 시행되었다. 부검결과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들이 발견되었다. 최우혁 동지의 왼쪽 손목에는 길이 1.5센티미터, 너비 1밀리미터, 깊이 3밀리미터 정도의 음푹패인 상처가 있었다. 이를 따지자 군 당국은 최우혁 동지가 사망 수시간 전 자해를 기도했다고 하였으나, 21:00 점호 때 손검사를 했을 때도 야간 근무 직전에 옆 동료에게 왼쪽 손목시계를 풀어 주었을 때도 그 상처는 발견되지 않았었다. 군은 나중에야 22:00-24:00 상황실 근무중에 상처를 발견하고 치료를 했다고 했다. 흔히 손목 자해를 기도할 때에는 칼날로 동맥의 직각 방향으로 긋게 마련인데 실제 상처는 뭉툭한 모양이며 무엇인가로 파낸듯하고 방향도 애매하다. 부검당시 최우혁 동지의 내장은 깨끗이 비어 있었다. 이는 최소한 하루 이상을 굶었다는 사실이며 여기에 대해서 군은 최우혁 동지가 먹었는지, 굶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군은 공동 식사를 하는 곳인데 이 부분의 답변을 회피하고 있다. 최우혁 동지는 분명히 무슨 이유 때문인지 여러 끼를 굶었다.
군의 발표가 허구적이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의문
8일 0시경 근무가 끝나자 최우혁 동지는 불침번에게 “누가 물으면 야간 근무 갔다고 그래라”며 화장실에 간다고 나갔고, 0:15쯤 운전병의 목격 이후 0:50 분신 시각까지 어떻게 행동했는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내무반에서 소각장까지는 거리가 꽤 멀고 여기까지 걸어가는 것이 목격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일개 이등병이 화장실에 간다면서 50분이나 들어오지 않았는데 내무반에서 아무런 보고나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군 당국은 최우혁 동지가 분신에 사용한 휘발유를 상황실에서 입수했다고 했다. 그러나 상황실은 항상 4명씩 24시간 근무하는 곳이기 때문에 최우혁 동지가 휘발유통을 그것도 1.3리터 용량과 큰 통을 아무도 모르게 들고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최우혁 동지는 0시이후 이 통을 들고 내무반, 상황실 사이에서 왼쪽 끝 소각장까지 먼 거리를 걸었을 텐데 목격자는 없다. 부검 집도의인 육군 군의관은 최우혁 동지가 점화 순간 많은 연기를 마셔 질식사하였다고 했다. 그런데 사망 현장에서 진화했던 일직 사령은 진화후 최우혁 동지가 “살려주세요”란 말을 하는 것을 똑똑히 들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질식사망은 허위이다. 그리고 뚜렷하게 말까지 한 사람이 이송도중 사망을 한 것도 의문인데, 이송 과정 최우혁 동지의 행동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최우혁 동지의 죽음은 군 당국의 발표대로 개인적인 문제로 고민하다가 분신 자살한 것이 아니다. 군 당국의 허둥지둥하는 모습가운데서 각 사람의 말이 서로 맞지 않았으며, 의혹의 사실이 점점 드러나자 날치기 장례식을 해버리고 가족들에게 협박을 하곤 했다. 대학시절 독재의 억압에 항거하는 스크럼의 대열에 있었고 공장활동을 경험하며 진정한 민중해방운동을 준비했던 최우혁 동지는 피맺힌 한을 품고 죽었지만 우리는 결코 조잡하고 형식적인 군의 발표에 승복할 수 없다. 이미 그들이 발표는 하나하나 그 허구성이 폭로되었고 이제 남은 것은 최우혁 동지를 죽음으로 몰아 넣은 군의 비민주적 작태를 파헤쳐 단죄하는 것이다.
동지를 생각하며
너무나 짧았던 만남 그러나 너와의 추억은 너무도 깊다. 너는 너무 젊다. 젊음이 이토록 슬플 줄이야! 하지만 남아있을 것이다. 교문앞 매캐한 공기속에 너의 외침이 남아있다. 신림동 녹두집 희뿌연 전등불아래엔 휘청거리는 너의 노래가 있다. 너의 몸짓은 무더운 5월의 廣場위에 어두운 밤길을 비틀거리며 더듬어 찾은 네 친한 동지의 자취방엔 너의 씁쓸한 담배연기가 K경찰서 지하실 한 구석벽엔 ‘民主主義’여 만세! - 너의 글씨로 동지들과 모여 늘 대화하고 토론하던 史學科 도서실엔 호소하고 질책하는 너의 목소리가 세평짜리 방안엔 너의 웃음소리와 너의 사랑이, 아끼던 책들과 함께 여전하다. 시대의 고뇌를 함께 나누어야만 했던 네 사랑하는 어머니의 눈물속엔... 너의 분노가 남아있어야 한다. 그래, 너는 영원히 젊은 것이다. 87년 9월 전주교도소에서 황 인 욱
군당국은 1987년 9월8일 0시50분경 육군 20사단 예하 60여단 최우혁 이병(서울대 서양사 84학번, 87년 4월8일 입대, 상황실 근무)이 부대내의 쓰레기 소각장에서 분신하여 국군 덕정병원으로 이송중 사망하였다고 발표하였다(사망시각 : 0시50분 - 1시30분 추정). 헌병대는 사망동기를 개인적 고민에 의한 자살이며 전신 화상과 점화 당시의 질식이 직접적 사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유서와 그에 준하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군의 최우혁 동지의 사망을 전후한 행적에 대한 발표는 다음과 같다. 7일 21:00 일석 점호를 할때 최우혁 동지가 자리에 없어, 동료가 화장실에 간다면서 나갔다고 하였다. 그는 불침번에게 “나는 야간 근무 허가가 났으니 누가 물어 왜 없냐고 하면 그리 대답하라”고 말했다 한다. 0:15경 최우혁 동지가 자판기에서 율무차를 빼먹는 것을 운전병이 보았고 이 시각 이후부터 0:50까지는 목격자가 없다. 0:50경 소각장에서 펑하고 불길이 치솟는 것을 위병 초소 근무자가 발견하고 달려가면서 보니 사람같아서 고함을 지르고, 남은 1인이 일직 사령에게 보고하고 같이 뛰어갔다 한다. 달려간 사병은 서서 불타고 있던 최우혁 동지에게 “뭐하냐? 굴러라” 하였더니, 최우혁 동지는 두어차례 굴렀고 자기는 잠바를 벗어 감쌌다고 했다. 불길에 휩싸인 사람이 선 채로 빳빳이 서 있었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대목으로 증언을 신뢰할 수 없다. 2-3분 내에 진화가 끝났는데 그때 최우혁 동지가 “살려주세요”라는 말을 분명히 했다고 한다. 일직사관은 최우혁 동지를 담요로 감싸 병원으로 1:30경 옮겼으나, 의사는 이미 사망하였다고 하였다. 동지의 죽음의 원인이 ‘분신이 아님’은 다음 사실로 뒷받침되고 있다. 군은 처음에는 최우혁 동지가 개인적인 고민으로 자살했을 것이라고 유서도 기록도 없는 상황에서 수사결과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군의 일방적인 장례식 이후, 보안대 부관은 가족에게 새로운 사실을 알렸다. 사망 일주일전 최우혁 동지에게 2급 기밀문서 초안 30장중 15장을 정서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복사를 지시했다고 하다가 최우혁 동지의 형이 기밀문서를 마구 복사해도 되느냐고 묻자 황급히 정서하는 것이라고 바꾸었다). 그런데 최우혁 동지가 실수로 그중 9장을 절삭처리해 버리고 질책이 두려워서 고민했었다라는 것이다. 최우혁 동지의 형이 “왜 이제야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이유가 뭐냐?”고 묻자 보안대 부관은 장례식 당일인 그날에야 알았다고 답변했다. 기밀문서는 통상 1일 최소한 1회 이상 점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제껏 몰랐다는 것은 그러한 사실이 없었거나, 조작되었을 가능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자살”이라는 발표의 신빙성 문제가 추궁되자 궁지에 몰린 당국은 갑작스레 최우혁 동지를 무능함과 심약함에 비관한 졸장부로 만들려 했다. 또 한 가지 그들이 횡설수설하는 것은, 정보과 선임하사는 최우혁 동지가 근무시간에 대공 서적을(사회과학서적) 읽다가 보안대에 적발이 되어 선임하사 자신이 보안대로부터 질책을 받았다고 했다. 보안대에 유가족이 이 사실을 추궁하자 그들은 그런 사실이 없다고 하며 그들 사이에 말이 맞지 않았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최동지는 문책, 아니 더 심한 행위를 당했을 것이다. 그의 유품중 대변이 손바닥만한 넓이로 굳은 팬티가 발견되어서 가족들이 매우 놀랐다. 이것이 심한 구타나 고문에 의해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의 증거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지의 갑작스런 죽음에 접한 가족들은 미처 이 증거물을 챙기지 못하고 하루가 지난 후에야 군당국에서 그 속옷을 달라고 하였더니 이미 소각해 버렸다고 하였다. 육군 과학수사연구소 군의관 집도하에, 최우혁 동지 가족이나 변호사의 참가없이 일방적인 부검이 시행되었다. 부검결과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들이 발견되었다. 최우혁 동지의 왼쪽 손목에는 길이 1.5센티미터, 너비 1밀리미터, 깊이 3밀리미터 정도의 음푹패인 상처가 있었다. 이를 따지자 군 당국은 최우혁 동지가 사망 수시간 전 자해를 기도했다고 하였으나, 21:00 점호 때 손검사를 했을 때도 야간 근무 직전에 옆 동료에게 왼쪽 손목시계를 풀어 주었을 때도 그 상처는 발견되지 않았었다. 군은 나중에야 22:00-24:00 상황실 근무중에 상처를 발견하고 치료를 했다고 했다. 흔히 손목 자해를 기도할 때에는 칼날로 동맥의 직각 방향으로 긋게 마련인데 실제 상처는 뭉툭한 모양이며 무엇인가로 파낸듯하고 방향도 애매하다. 부검당시 최우혁 동지의 내장은 깨끗이 비어 있었다. 이는 최소한 하루 이상을 굶었다는 사실이며 여기에 대해서 군은 최우혁 동지가 먹었는지, 굶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군은 공동 식사를 하는 곳인데 이 부분의 답변을 회피하고 있다. 최우혁 동지는 분명히 무슨 이유 때문인지 여러 끼를 굶었다.
군의 발표가 허구적이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의문
8일 0시경 근무가 끝나자 최우혁 동지는 불침번에게 “누가 물으면 야간 근무 갔다고 그래라”며 화장실에 간다고 나갔고, 0:15쯤 운전병의 목격 이후 0:50 분신 시각까지 어떻게 행동했는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내무반에서 소각장까지는 거리가 꽤 멀고 여기까지 걸어가는 것이 목격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일개 이등병이 화장실에 간다면서 50분이나 들어오지 않았는데 내무반에서 아무런 보고나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군 당국은 최우혁 동지가 분신에 사용한 휘발유를 상황실에서 입수했다고 했다. 그러나 상황실은 항상 4명씩 24시간 근무하는 곳이기 때문에 최우혁 동지가 휘발유통을 그것도 1.3리터 용량과 큰 통을 아무도 모르게 들고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최우혁 동지는 0시이후 이 통을 들고 내무반, 상황실 사이에서 왼쪽 끝 소각장까지 먼 거리를 걸었을 텐데 목격자는 없다. 부검 집도의인 육군 군의관은 최우혁 동지가 점화 순간 많은 연기를 마셔 질식사하였다고 했다. 그런데 사망 현장에서 진화했던 일직 사령은 진화후 최우혁 동지가 “살려주세요”란 말을 하는 것을 똑똑히 들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질식사망은 허위이다. 그리고 뚜렷하게 말까지 한 사람이 이송도중 사망을 한 것도 의문인데, 이송 과정 최우혁 동지의 행동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최우혁 동지의 죽음은 군 당국의 발표대로 개인적인 문제로 고민하다가 분신 자살한 것이 아니다. 군 당국의 허둥지둥하는 모습가운데서 각 사람의 말이 서로 맞지 않았으며, 의혹의 사실이 점점 드러나자 날치기 장례식을 해버리고 가족들에게 협박을 하곤 했다. 대학시절 독재의 억압에 항거하는 스크럼의 대열에 있었고 공장활동을 경험하며 진정한 민중해방운동을 준비했던 최우혁 동지는 피맺힌 한을 품고 죽었지만 우리는 결코 조잡하고 형식적인 군의 발표에 승복할 수 없다. 이미 그들이 발표는 하나하나 그 허구성이 폭로되었고 이제 남은 것은 최우혁 동지를 죽음으로 몰아 넣은 군의 비민주적 작태를 파헤쳐 단죄하는 것이다.
동지를 생각하며
너무나 짧았던 만남 그러나 너와의 추억은 너무도 깊다. 너는 너무 젊다. 젊음이 이토록 슬플 줄이야! 하지만 남아있을 것이다. 교문앞 매캐한 공기속에 너의 외침이 남아있다. 신림동 녹두집 희뿌연 전등불아래엔 휘청거리는 너의 노래가 있다. 너의 몸짓은 무더운 5월의 廣場위에 어두운 밤길을 비틀거리며 더듬어 찾은 네 친한 동지의 자취방엔 너의 씁쓸한 담배연기가 K경찰서 지하실 한 구석벽엔 ‘民主主義’여 만세! - 너의 글씨로 동지들과 모여 늘 대화하고 토론하던 史學科 도서실엔 호소하고 질책하는 너의 목소리가 세평짜리 방안엔 너의 웃음소리와 너의 사랑이, 아끼던 책들과 함께 여전하다. 시대의 고뇌를 함께 나누어야만 했던 네 사랑하는 어머니의 눈물속엔... 너의 분노가 남아있어야 한다. 그래, 너는 영원히 젊은 것이다. 87년 9월 전주교도소에서 황 인 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