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온순(당시 22세)
1981년 3월 동국대 사범대학 수학교육학과 입학.
1983년 3월 29일 시위예비음모로 경찰에 연행되어 일주일 조사 후 강제징집.
1983년 8월 14일 의문의 죽음을 당함.
학생운동에 헌신해 오던 최온순 동지는 83년 3월 29일 시위예비음모 혐의로 5명의 학우와 함께 경찰에 연행되어 1주일간의 조사를 받은 후 강제징집 당했다. 83년 8월 14일 군에서 집으로 급위독이라는 전보를 보내와 가족들이 급히 부대로 가보니 새벽 4시께 숨을 거둔 뒤였으며 시체는 영안실에 안치되어 있었다. 헌병대에서 나온 자가 자살이라고 통보하여 이에 가족은 자살할 리가 없다는 확신을 갖고 강력히 항의, 영안실의 사체를 1주일간이나 지키며 재수사 및 진상규명을 요구하였다. 이에 군수사대는 재수사를 하여 그 결과 고참병과의 말다툼 끝에 피살되었다는 수정통보를 얻어내어 최온순 동지는 자살이라는 오명을 벗고 대전 국군묘지에 안장이 되었다. 그러나 동지의 가족은 그런 결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인이 밝혀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다른 강집되어 의문의 죽음을 당한 희생자들과 마찬가지로 최온순 동지 역시 보안대의 녹화사업 과정에서 죽음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더군다나 최온순 동지와 같이 운동에 헌신하고 군대를 혐오하던 사람이 장기하사관을 지원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면서 더욱 동지의 죽음은 결코 자살일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고 한다.
의문점
1. 최초에는 자살로 발표하였다가 가족들의 강력한 항의에 부딪히자 재수사하여 타살이라고 번복한 점 (가족들이 가만히 있었다면 다른 의문의 죽음들의 경우와 같이 자살로 끝났을 것이다. 최온순 동지의 사인에 대한 번복 사실은 자살로 발표된 나머지 사망자들의 사인에 대해서도 의문을 더해 주는 요소가 되고 있다.)
2. 가해자의 타살동기가 사소한 언쟁 끝에 오발에 의한 사고였다는데 일반적으로 고참과 졸병 사이의 갈등으로 야기된 사고사는 고참이 졸병을 괴롭히는 과정에서 발생함으로써 졸병이 고참을 살해하는 경우는 있어도 그 반대의 경우는 없다는 것, 따라서 동지의 죽음에 녹화사업을 담당하는 보안대가 개입되었는지의 여부가 계속 의문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