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천(당시 48세)
1963년 고등학교 중퇴후 공장생활 시작
1981년 한양합판 입사
1988년 5월 한양합판 노동조합 설립에 중추적 역할 담당
1990년 노동조합 위원장선거에 출마
1991년 7월 1일 노동조합 회계감사로 일하던 중 해고
1992년 7월 인천지방법원에서 해고무효 판정으로 승소
1993년 4월 고법에서도 승소했으나 회사측 복직 묵살
1993년 5월 19일 심장마비로 운명
동지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느끼고, 1988년 한양합판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주역으로 나서 1991년 해고 될 때까지 회계감사로 한양합판 전체노동자의 권익향상을 위한 노조 활동에 전력을 기울여왔다. 이러한 활발한 조합활동에 대한 보복으로 회사측은 휴식시간을 이용하여 전체 조합원에게 회계보고를 한 것을 핑계로 해고시켰다. 1993년 4월 고등법원에서 승소했지만 회사측은 법원의 판결과, ‘해고된 자는 1심 결과가 끝나면 그 결과에 의해 복직시킨다’라는 단체협약도 무시한채 복직을 거부하였으며, 임금도 주지않고 오히려 사표를 강요하였다. 해고 전부터 가슴의 통증을 느끼고 해고 이후 더욱 건강을 해친 조경천 동지는 1992년 심근경색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수술하면 완치될 수 있었지만, 수술비용이 없어 미루다가 ‘비록 회사에서 일하다 몸이 상했지만 밀린 임금을 받아 수술하여 건강을 되찾겠다’는 소박한 소망을 갖고 열심히 투쟁하였다. 동지는 1993년 고법에서의 복직판결로 현장에 다시 돌아갈 것을 기대하였으나 회사측에 의해 거부되자 5월 19일 심장마비로 운명하였다.
동지를 생각하며 조경천 동지를 떠나보내는 이 자리에 우리는 가슴 속 깊이 우러나오는 비통함으로 섰습니다. 동지는 살아생전에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우리 해고노동자들에게 든든한 맏형님으로서 항시 어려움 속에서도 차분한 미소를 잃지 않는 소중한 우리의 형제였습니다. 동지는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분단의 비운이 이 땅을 휩쓸던 1950년경 어머님과 함께 월남했습니다. 태백산맥을 3개월여 걸어서 내려 온 우리 조경천 동지는 자신을 둘러싼 비극을 자신의 맑은 이성으로 파악하고, 그속에서 자신의 올 곧은 중심을 세우기까지가 곧 살아온 인생역정이었습니다.
추모의 글 조경천 형님이 돌아가신지 만 3년이 되었다. 얼마전에는 민주노총에서 일하던 유구영 동지가 간암으로 세상을 떴다. 살다가 떠나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분들의 죽음이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는 그리 단순하지는 않다.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을진데 문득 죽음이 우리 가까이 와 있는 것이다. 일상적으로 죽음과 맞닥뜨려 매일매일 죽음과 맞서서 싸우면서 병마의 고통을 넘어서서 자신과 주변을 차분하게 정리하던 분이 바로 조경천 형님이었다. 형님께서 심근경색이란 병을 알고 부천 세종병원에 입원해 있던 92년의 일이다. 세종병원이 심장병 계통의 전문 의술이 높다고 했지만 그곳도 돈이 없으면 그냥 치료해 주는 곳은 아니다. 병을 알고도 수술할 수 없는 현실속에서도 형님은 태연하게 자신을 지키고 있었다. 그곳에서 수술받다 죽은 사람들 얘기, 아직 치료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 보면서 자신의 위중한 병에 이길 방안을 강구하고 계셨다. 결국 그곳에서 퇴원하여 집에서 치료하면서도 형님은 일을 멈추지 않으셨다. 솔직히 말하건데 “치료할 비용을 줄테니 그 돈으로 병을 고치고 이제 노동운동 그만두고 편하게 살라” 고 옆에서 솔솔 바랍잡으면 그것에 유혹당하지 않을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우리는 자신의 알량한 경력을 팔아 고귀한 지조를 헌신짝 버리듯 하는 사람들을 많이도 보아왔다. 우리가 보아온 투사들-많은 동지들이 그것 때문에 자신의 쌓아온 정의를 스스로 무너뜨리고 목숨을 버리기 전에 먼저 정치적 생명을 빼앗겼다. 이제는 누가 어디로 가고 어떻게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도 지겹다. 하룻밤 자고 나면 변절과 기만이 판치는 세상에 조경천 형님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우리에겐 힘이고, 또 한편 슬픔이다. 우리 사무실에는 그 동안에 민족민주 운동에 헌신하다 자신의 삶을 아낌없이 불살랐던 많은 동지들의 기일이 기재되어 있는 카렌다가 벽면에 붙어있다. 5월들어 비어 있는 칸을 합해도 1주일이 채 안된다. 80년 광주에서 죽은 영혼들을 빼고 그 이후 우리 곁을 떠난 동지들만으로도(신문에 이름 석자 실린 사람들) 30명이 넘는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잊지 않기 위해 제사라는 것을 지낸다고 하지만 1년동안 까맣게 잊고 살다가 그날이 되면 옹기종기 모여 향불 피우는 꼴도 마땅치 않다. 우리는 우리가 함께 의리를 나누었던 동지들의 이름 석자를 영광스럽게 만들어야 한다. 제사를 모시는 것은 절박했던 죽음 앞에서 초연했던 그 정신을 다시 가슴속에 새기자는 의미일 것이다. 조경천이라는 이름이 혼탁한 시절에 보석같이 빛나는 우리 마음의 지행이 되어야 할 것이다. 잡스러움을 물리치고 곧은 우리의 한길을 비추도록 그 뜨거움을 새겨야 한다. 동지의 죽음을 잊어먹고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 정신이 썩고 있다면, 자본가들도 권력자들도 희희낙낙하고 손뼉칠 일이다. 이 책은 3년상을 입은 우리가 형님께 바치는 조그만 예의다. 기쁘게 웃으실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