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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정보

심광보-당시 18세

심광보-당시 18세

심광보(당시 18세)

1972년 12월 5일 충북 중원군 출생
1986년 앙성중학교 입학
1989년 충주고등학교 입학
1990년 5월 휴학
1990년 9월 7일 충주에서 분신 후 투신
1990년 9월 8일 운명
어려운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학업에 열중했던 동지는, 참교육을 열망하는 전교조 선생님으로부터 많은 감동을 받고 학교에서의 비교육적인 현실과 참교육 운동에 나서야할 권리를 깨닫게 되었다. 고교 2년 때 가정 형편으로 휴학을 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학교측에서는 “우리 학교에 전학오려면 몇 천만원을 낸다. 휴학계를 내면 다른 학생이 올 수 있는 자리가 생기지 않으니 자퇴를 해라”, “가난해서 못다닌다는 것은 이유가 안된다”, “진단서를 첨부해야 한다. 지금 휴학하면 못다닌다. 나갈래!” 등으로 학교를 그만둘 것을 종용했고 동지는 그 후 자신의 학교를 ‘무서운 학교’라고 하며 그 충격을 표현했다 한다. 이러한 학교의 모습은 동지에게 교육에 대한 심각한 문제의식을 갖게 했다. 학생들의 모임에서도 학생활동은 학생현장을 파고 들어야 하며, 학교비리에 대해 유인물을 돌리고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어떠한 타협도 거부하는 삶의 자세를 견지했다.

결국 휴학을 하고 지하철 신문판매, 외판원 생활을 하면서 사회의 불평등과 모순을 인식하고 ‘버림받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평생을 바치겠다’ 는 결심을 하고, ’가난하고 소외받는 학생들을 위한, 민중을 위한 교육’ 이 참교육이라 생각하고 실천하였다. 그 후 조그만 용역회사를 다니다, 그간 뼈 아팠던 사회의 불평등과 모순의 개혁의 의지와 참교육에 대한 갈망을 지니고 90년 9월 7일 오후 2시20분, 충주시 성서동 김윤택 치과의원 건물 3층 옥상에서 “농민이여, 농민의 깃발을! 노동자여, 노동의 횃불을! 전교조여, 참교육의 함성을!”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분신 후 투신, 서울 강동병원에서 투병 중 9월 8일 새벽 5시경 운명하였다. 동지의 죽음은 한마디로 이 사회의 모순을 온몸으로 담아내야 했던 한 학생의 참교육에 대한 절규였다고 할 수 있다.



동지가 남긴 글


사람사랑 친구들에게

- 분신 하루 전에 남긴 편지글 1 -


사람사랑 친구여. / 나 이제 떠나네. / 무슨 말을 더 하나, 다만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하네
그래야 ‘큰 힘’ 앞에서 흔들리거나 꺽이지 않을 거라네.
‘참교육’. 난 말일세, 이처럼 소중한 선물을 받은 게 너무 기쁘다네,
생일 선물보다도 더 희열이 넘치네. / 함께 한 지난 날들을 죽어도 잊지를 못할 걸세.
나의 삶. 우리들의 삶을 바꿔준 서로의 만남을 어찌 잊을 수 있겠나. / 가을은 가을이로군. / 안녕히.

1990. 9. 6.



전교조 선생님께 드리는 글


- 분신 하루 전에 남긴 편지글 2 -


이렇게 깊은 인연이 또 있을까요. / 작년 구월께였을 겁니다.
작고 후미진 그런 사무실이 이젠 제법 자리를 잘 찾아 잡았네요.
벌써 일년이란 세월동안 선생님들과 정을 나누더니만 부랴부랴 떠나게 되었군요.
너무 상심해 마십시오. 오히려 세상에 흘릴 눈물이 부족하리라 봅니다.
참교육 그날을 보고 싶은 마음 저 도도히 흐르는 남한강보다 더 깊이 깊이 설레입니다.
나라꼴이 어찌 되려고 인간을 인간답게 가르치려는 뜻을 이다지도 모른 체 합니까?
허나 국민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용기를 내어 이겨 가십시오.
어느덧 무덥고 긴 여름이 갔네요. 그리고 서늘한 바람을 몰고 가을이 왔고요.
그래요. 어둠이 가고 빛이 올 때라 봅니다.
아, 눈부신 햇살이여. 우리들의 희망찬 날이여. / 선생님, 할만큼 후퇴했습니다. 할만치 침묵했습니다.
자, 끊어버리십시오. 억압의 사슬을. 무너뜨러요. 갈라짐의 장벽을. 거두어 들여요. 쭉정이를.
참교육 안고 돌아라, 바람아. 바람아. 한반도를 휘휘 불어가라.

오라. / 오라. / 참교육 안은 바람이여!



1990.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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