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동 대공분실 고문 실체 드러나… 발간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 실체 드러나…<남영동 대공분실 고문실태 조사연구> 발간
- 수십 년 전 자료 더미에서 피해자 384명 찾아내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재)진실의 힘이 힘 모아
“이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시민사회의 오랜 노력으로 사회적 여론이 조성되었고 정부가 지원을 결정했습니다. (중략) 민주주의자 김근태 의장이 고문당하고, 박종철 열사가 희생된 이곳(남영동 대공분실)에 ‘민주인권기념관’을 조성할 것입니다.”
(6․10민주항쟁 31주년 대통령 기념사 중에서)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 피해실태에 관한 첫 번째 보고서가 나왔다.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실태 조사연구> 보고서는 지난 6∙10민주항쟁 31주년을 맞아 문재인 대통령이 옛 남영동 대공분실 터에 ‘민주인권기념관’ 건립을 공표한 데 따른 것으로, ‘민주인권기념관’ 건립을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작업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일어난 고문 사건의 구체적인 실체 파악을 목표로 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이하 사업회, 이사장 지선)는 오래 전부터 국회 및 유관 기관을 통해 남영동 고문피해 자료를 입수하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문서 보존연한 경과 등을 이유로 번번이 실패했다. 이에 전문연구기관인 ‘재단법인 진실의 힘’에 기초 실태조사를 의뢰했고, 그 결과 지금까지 정리된 바 없는 1976년부터 2005년까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발생한 고문실태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것이다.
보고서는 남영동 대공분실에 체포되어 수사를 받은 피해자 명단을 담고 있다. 이제까지 남영동 대공분실이 체포, 구속 수사한 정확한 인원은 공개된 바 없었다. 남영동 대공분실의 공식명칭은 물론 소속, 조직체계, 종사자 현황 등 운영 전반이나 법적 근거를 비밀리에 운영해왔기 때문이다. 경찰과 검찰 등 유관 기관의 자료가 전무한 상태에서 수십 년 전 신문기사와 잡지, 논문, 유인물 등 수많은 자료를 일일이 뒤져가며 파악한 인원은 384명이다. 또한 법정진술, 가족 수기, 성명서, 호소문, 항소이유서, 고소장 등을 통해 고문피해자 54명의 육성 증언을 요약했다. 특히 고문 피해자 8인에 대한 심층 인터뷰를 진행, 고문피해 사실을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밝혔다.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리영희를 구속했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최초로 체포한 이는 누구일까. 조사연구팀이 입수, 취합한 각종 자료를 정리한 결과, 명단의 첫 번째로 오른 이는 리영희다. 리영희는 중국사회의 실상을 소개한 책 <8억인과의 대화>(창작과 비평사) 등이 문제가 되어 1977년 11월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갔다. 리영희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중앙정보부는 리영희가 쓴 책만으로는 반공법으로 공소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입장이었데, “청와대까지 직접 올라가” 리영희를 구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박처원 때문에 구속됐다는 것이다. “이런 책이 나오면 해방 후 40년 동안 공들여 세운 반공국가의 토대가 송두리째 무너지게” 되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리영희는 이 책으로 2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남영동 대공분실’이 수사대상을 누구로 할 것인지를 명백히 보여주는 일종의 출사표였다. 그 뒤로 남영동은 정부에 비판적인 의견과 견해를 주장한 지식인, 언론인, 재야운동가들을 마구잡이로 체포해서 잔혹한 고문을 자행했다.
1980년 신군부 언론탄압 최일선에 선 남영동 대공분실, 26명의 현직기자 체포
1980년 신군부 집권과 더불어 남영동 대공분실이 맨 먼저 시작한 일은 언론인을 대거 체포, 수사한 것이다. 신군부는 비상계엄 상황에서 반독재 민주화운동 보도를 못하도록 언론사에 대한 검열을 강화했다. 이에 한국기자협회는 5월 16일 “계엄당국의 보도 검열의 즉각 철폐”를 요구하며 검열 지침을 거부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어 경향, 동아 등의 신문사가 제작 검열 거부에 나섰다. 계엄당국은 6월 9일 경향신문 편집국에 들이닥쳐 홍수원 박우정 기자들을 연행했고, 이어 노성대 표완수 서동구 이경일 기자도 체포했다. 김태홍 기자협회장을 숨겨줬다는 이유로 현직기자인 유숙열을 7월 17일 연행했다. 기자들을 대거 연행한 곳이 바로 남영동 대공분실이었다.
눈여겨볼 점은 1980년 3월 이근안이 남영동 대공분실로 근무지를 옮긴 점이다. 그 전까지 이근안은 경기도 경찰국 대공분실에 근무하면서 ‘출장수사’를 다녔다.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간 김태홍 노향기 등 기자협회 간부들, 경향신문 이경일, 합동통신 유숙열 기자는 이근안으로부터 ‘물고문’을 당했다. 당시 언론 검열 지침을 작성, 주도한 것은 보안사였지만, 지침을 하달받고서 언론 탄압의 최일선에서 언론인들을 마구잡이로 연행, 고문했던 곳은 ‘남영동 대공분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현직기자들의 제작검열 거부에 국가보안법을 들이대며 물고문을 자행했다.
1980년 기자협회 집단구속 사건을 시작으로 같은 해 경향신문 사건, 조선ㆍ동아 투위 사건, 1986년 보도지침 사건으로 남영동 대공분실에 연행된 기자의 숫자는 최소 26명으로 파악되었다. (김태홍, 노향기, 박정삼, 유숙열, 김동선, 안양로, 고영재, 정교용, 이홍기, 이수언, 정태기, 서동구, 이경일, 표완수, 노성대, 홍수원, 박우정, 박성득, 오효진, 심송무, 임재경, 송건호, 홍종민, 김주언, 김태홍, 신홍범)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의 언론탄압 최일선에 바로 남영동 대공분실이 있었던 것이다.
‘이근안’ 이름을 밝혀낸 또 다른 인물, 이경일
이번 조사에서는 고문수사관 ‘이근안’에 대한 새로운 기록을 찾아냈다. 1985년 12월 김근태의 고문경찰 고발장에서조차 ‘이름 모를 전기고문 기술자’로 기록되었던 이근안의 존재를 폭로한 그 이면에는 경향신문 외신부장 이경일의 노력이 존재했다. 1980년 6월 경향신문 사건으로 남영동 대공분실에 연행된 이경일은 이근안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조서에 기재된 ‘사법경찰관 이근안’이라는 이름 석 자를 확인했으며, 이근안의 부인이 용두동에서 미장원을 한다는 중요한 단서를 잡아냈다. 이는 1988년 12월 21일 한겨레 문학진 기자의 이근안 실명과 얼굴 최초 보도와 민가협 등 시민단체의 현상수배에도 중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김근태, 함주명 등 피해자들의 분투는 고문기술자를 법정에 세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물고문은 남영동 대공분실의 ‘통과의례’였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은 일상적으로 자행된 것이었음을 밝혀낼 증언들을 수집했다. 1980년 기자협회 집행부 집단구속사건으로 연행된 합동통신 기자 유숙열은 연행 첫날 칠성판에 묶여 이근안으로부터 고춧가루 물고문을 당했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피해자들의 나이, 성별, 직업, 사건의 경중과 관계없이 물고문을 자행했고, 일종의 ‘통과의례’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이미 예견된 ‘필연적 결과’였던 것이다. 그 외에도 ▲잠 안 재우기 ▲구타 ▲볼펜 고문 ▲관절 뽑기 ▲통닭구이 ▲물고문 ▲전기고문 ▲협박 ▲밥 굶기기 ▲심리 고문이 자행됐다.
고문 피해자 다수가 죽었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자행된 고문 수사로 여러 사람이 죽었다. 이근안을 비롯한 대공 수사관들은 40여 일 넘게 고문을 통해 허위사실들을 짜 맞춰 가족을 통째로 간첩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피해자들은 사형 집행을 비롯해 고문으로 인한 사망, 10년 이상 장기간 구금, 고문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김상회(1979년 삼척 간첩단 조작사건), 진항식(1979년 삼척 간첩단 조작사건), 최을호(1982년 김제 가족간첩단 사건) 3명은 최종심 선고가 내려지고 ‘사형’이 집행됐다. 1982년 김제 가족간첩단 사건의 최낙교와 최낙전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최낙교는 당시 서울지검 정형근 검사의 공소 제기 직후 서울구치소에서 주검으로 발견됐으며, 최낙전은 15년형을 선고받고, 9년의 감옥살이를 했으나 석방 4개월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처럼 남영동 대공분실은 재판이라는 ‘합법적’ 방식의 탈을 쓰고서, 수많은 죽음을 만들어냈다. 죽음은 피했으나, 간첩으로 낙인찍힌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들은 2010년 이후 열린 재심재판에서 남영동 대공분실이 불법감금, 고문수사를 통해 얻어낸 허위자백으로 인한 조작사건이라는 무죄판결을 얻어냈다. 이외에도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신향식이 사형 집행 당했고 이재문은 옥사했다.
‘특진’과 ‘격려금’이 만들어 낸 간첩
보고서는 대공 사건에 집중된 ‘특진’과 ‘격려금’이 수사관들에게 있어 불법 고문 수사를 이어가는 큰 이유로 작용했음을 확인했다. 특히 박처원은 1980년 3월 25일 당시 경기도경에서 근무하던 이근안을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로 발탁, 주요사건의 수사를 맡기는 등 대공수사관에게 사건을 나눠주고 그 성과를 바탕으로 특진의 계기를 만들어줬다. 심지어 대법관이나 판사로부터 ‘격려금’을 받아 부하직원들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이근안은 1984년 간첩으로 조작된 이장형 사건 이후, “이OO 부장판사로부터 직접 격려금을 받았다"고 인정하기도 했다.
43일간의 불법감금과 고문수사를 통해 간첩으로 조작한 함주명 사건 당시 이근안은 “실황조사를 잘했으니 작성 요령을 책으로 작성하여 보급하는 것이 좋겠다며 존함은 모르나 박처원 실장을 통해 어느 대법관님으로부터 격려금 100만 원을 받았다”고 밝혔다. (이근안 검찰 진술서, 보고서 18쪽)
이 과정을 거치면서 ‘대공’을 평생의 신념으로 여겨온 ‘박처원 사단’이 형성됐다. 그리고 그 사단을 조력한 정권, 예산과 인력을 채워준 법과 제도에 의해 남영동 대공분실은 고문과 불법 수사를 이어갔다. 치안본부는 1986년 10월 직제개정을 통해 대공 담당 부서를 3개 과에서 9개 과로 확대 개편한다. 조직 300%가 갑자기 ‘뻥튀기’되었다. 또한 대공요원 209명을 증원하기에 이른다. 전시도 아닌데 비정상적 조직 운용에 다름없다. 1987년 1월 발생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특별한 사고’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예견된 참사였던 것이다.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 자체가 거대한 ‘고문실’이었다
고문 피해자가 기억하는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도 낱낱이 분석했다. 육중한 철문, 층수를 알 수 없도록 5층 수사실과 연결된 철제계단, 5층이지만 지하처럼 어둡고 긴 복도, 엇갈려 설계된 취조실 구조, 환기창 크기의 좁은 창문, 고정된 의자와 책상, 안에서 열 수 없도록 설계된 문, 소리가 차단된 방음벽 등 건물 그 자체가 거대한 ‘고문실’이었다. 특히 욕조와 칠성판은 오로지 ‘고문’만을 위해 존재하는 도구였다. 피해자들은 수년이 지났어도 남영동 대공분실을 떠올리면 “몸에 고문당한 자국 하나하나가 반응”한다고 증언했다.
일상적이지만 가장 비일상적 용도로 사용된 구조물은 욕조다. 교도소, 법원, 검찰청 등 수용시설을 갖춘 다른 곳은 물론이고 보안사, 안기부 등 수사기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사례다. 그러나 처음 조사실에 들어갔을 때 욕조를 고문도구로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상당수가 욕조의 용도를 “목욕이라도 하라고 있는지 알았”거나, “호텔 방처럼 욕조를 편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욕조가 없는 일반 가정집도 많아 “욕조에서 목욕할 일이 있을까 싶었다”는 진술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예상’과 달리 욕조에서는 몸을 거꾸로 든 채 처박거나 수도꼭지를 코에 갖다 대고 트는 등 무자비한 물고문이 자행됐다. (보고서 142쪽)
이번 발간된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실태 조사연구> 보고서는 총 341쪽의 분량으로, 민주주의의 역사적 시간과 공간을 되살림과 동시에 폭압적인 공안 정권이 사라진 2018년 오늘날 다시금 ‘남영동 대공분실’과 마주해야 하는 이유를 묻고 답한다. 하지만 이번 조사는 한정된 문헌 자료와 피해자 증언에 기초한 것으로, ‘완성’이 아닌 1차 기초 조사의 결과물이다. 사업회는 고문피해자나 가족, 지인들의 제보를 기다리고 있으며, 더 많은 문헌과 기록, 증언을 수집해 나갈 계획이다. <끝>
※첨부 1. <남영동 대공분실 기초 조사 보고서> 표지 이미지
2. 구 남영동 대공분실이 현재 경찰청 인권센터로 활용되고 있는 모습을 담은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