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살기로 더불어 함께 사는 데 목숨 걸어야
죽기 살기로 더불어 함께 사는 데 목숨 걸어야
배움터 6강좌 후기
지난 2013년 12월 10일(화) 오후 7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민주누리’에서는 <2013 하반기 민주주의 배움터> “수상한 민주주의-일상에서 바라본 풍경” 마지막 강좌가 열렸습니다. 총 여섯 강좌로 진행된 이번 배움터의 마지막 강의는 도법 스님이 해 주셨습니다. 그 마지막 배움터 현장의 모습을 잠깐 들여다 볼까요?
도법 스님은 인류가 개인적, 사회적, 정신적, 육체적으로 끊임없이 더 좋은 걸 찾아왔으며 그 이유는 더 나은 삶을, 즉 더 자유롭게, 평화롭게, 아름답게, 행복하게 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고 바로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어떤 게 최고의 삶일까요?”라고. 제일 좋은 것을 만들어내고 소유하고 쓰고 그러면 행복해 질 거라는 기대와 믿음으로 살아왔는데, 과연 우리는 지금 행복한가요? 사실 지금까지 이렇게 달려온 오늘 그 세상이 좋은 세상도 아니고 행복하지도 않다고 도법 스님은 이야기합니다. 그 뿐인가요? 그 과정도 너무나 비인간적인 악순환의 연속이었고, 달려서 도달한 우리의 얼굴 또한 험악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태어나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익혔습니까? 그러한 과정을 통해 지식, 신념, 믿음을 갖고 이렇게 이뤄내고 소유하고 소비하며 살아왔는데, 정작 기대했던 행복이 없고 희망했던 세상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동안 우리가 가졌던 믿음과 신념이 틀린 것이 아닐까요?
도법스님은 우리가 평소에 이런 질문을 잘 하지 않고 습관처럼 살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렇게 늘 해왔던 대로, 나라가 시키는 대로, 자본이 시키는 대로, 제도가 시키는 대로, 내 욕망이 시키는 대로, 내 감각이 요구하는 대로 살아가고 있죠. 민주주의를 가지고 이야기해볼까요? 도법스님은 민주주의는 자기 삶의 주인 노릇하는 것이라고 간단하게 정의내립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그래야 한다면서 개인적이고, 이기적이고, 감각적인 것들에 관심을 갖고 그 욕망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고 있는 게 우리 모습입니다. 그걸 마치 자기 자신에 대한 대단한 관심과 애정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지요. 도법스님은 실상은 이러한 욕구를 쫓을수록 자기 삶은 파괴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이제 어떻게 해야 될까요?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 많은 성찰과 진단과 모색을 해왔는데 거기서 중요하게 도출된 것이 우리는 그 동안 한번도 진정한 의미에서 더불어 함께 사는 것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다는 점이라고 도법스님은 말합니다. 자유, 정의, 평화 등의 보편적 가치를 명분으로 내걸지만 역사적으로 늘 편가르고 죽이고 하는 싸움을 해 왔습니다. 종교를, 국가를, 이념을, 또 다른 이해타산을 명분으로 편가르고 싸워온 게 우리 역사입니다. 엄정하게 보면 그야말로 야만적이고 파괴적인 삶을 살아온 것이죠. 거기에 더해 21세기에 접어들면서는 바로 자연생태계 위기라는 범 지구적인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난리가 나고 있는 것도 진영싸움 때문이라고 도법 스님은 진단합니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편으로 규정하니깐 소용이 없는 상황이다 보니, 합리적으로 균형있게 문제를 바라보고 다룰 수 없는 광기현상과 극단적 편가르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도법 스님은 불교에서 말하는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는다'와 같은 보편 타당한 실재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진단합니다. 이런 보편타당한 실재는 진보/보수, 기독교/불교, 자본가/노동자 논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오늘날 가지고 있는 지식과 논리와 신념은 달나라에는 계수나무가 있다는 식의 지식과 신념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식과 신념은 실재로는 없고, 생각으로만, 말로만, 글로만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과 관념이 조작한 겁니다.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내고 거기에 갇혀 있는게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도법 스님은 한국사회의 대표 관념을 ‘일등만이 희망이다’, ‘부자되면 행복하다’라고 지적하면서, 과연 ‘일등은 희망일까?’, ‘부자되면 행복할까?’ 질문해 보라고 합니다. 이건 대단히 위험한 거짓말인데, 5천만이 거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고 합니다. 전 세계 70억 인구가 한국 사람들처럼 쓰고 소비한다면 인류문명은 끝납니다. 다 같이 죽자는 말이나 마찬가지죠. 그런데도 우리는 온통 이러한 지식과 신념으로 헛꿈을 꾸고 있습니다. 이런 걸 불교에서는 ‘망상’이라고 합니다. 모든 교육이 결국 이 망상을 생산해내는 교육이 되고 있습니다. 신문 방송이 계속 확대 재생산 하고 있습니다. 도법스님은 우리가 갖고 있는 현재의 지식과 신념에 근본적으로 물음표를 던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 질문을 던지지 않으면 악순환은 반복될 것이라고, 첫단추를 잘못 끼고 다음 단추를 꼈다 풀었다 하고 있는 꼴이라면서 말이지요.
도법 스님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보다 각자 자신의 생명이라고 강조합니다. 우리는 여기서부터 길을 잃은 것입니다. ‘내 삶의 주체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았기 때문이죠. 우리는 생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지 못하면서, 막상 생명 이야기를 꺼내면 너무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고, 이상적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들 합니다. 과연 지금 여기 내 생명이 특별한 주제일까요? 이 생각 자체가 관념적이라고 도법스님은 말합니다. 생명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구체적인 문제고 가장 직접적이며 절실한 문제라는 거지요. 생명이 살아있어야 우리 삶은 의미를 갖게 되는데 정작 우리는 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까요? 도법스님은 우리가 그만큼 삶을 관념적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실재적으로 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도법스님은 다시 강조합니다. 생명을 천착하지 않고는 민주주의는 헛일이라고.
삶의 주체가 자신이고 자신에게 중요한 가치가 생명이라고 한다면 이 하나밖에 없는 내 생명은 어떻게 이뤄져 있을까요?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고 있을까요? 당연한 일인데도 이런 질문을 한 번도 생각않고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요? 도법스님은 인드라망을 그림으로 설명하면서 생명평화를 바로 이해하는 것이 첫 단추를 잘 매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태양과 나의 관계에서처럼 여타의 모든 관계도 이 세상에 분리 독립되어 따로 따로 존재하는 생명이란 없습니다. 모든 관계는 불교에서 말하는 ‘자타불일불이’(自他不一不二), 즉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닙니다. 우리의 생명은 온통 관계로 이뤄져 있는 거죠. 이걸 현대과학에서는 생명 그물이라고 말합니다. 아인슈타인은 그걸 유기적 생명체라고 얘기했습니다. 불교에서는 인드라망이라고 얘기합니다. 온 우주는 하나의 살아있는 그물입니다. 낱낱 존재들은 그물의 그물코이며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의지해있고 영향을 받고 있는 거죠. 그동안 우리는 너는 너고 나는 나라고 믿고 살아왔습니다. 이게 생각이나 말이나 글로는 문제없을 것 같지만 실제 단절시키면 삶이 불가능해집니다. 도법스님은 이것이 생명의 실상, 진면목이라고 설명합니다.
우리가 서로 의지하고 살아갈 때와 너와 나는 독립된 존재라고 생각하고 살아갈 때는 확연히 다릅니다. 오늘날 우리는 ‘너 없어도 난 잘 살 수 있어’라든지 ‘너 없는 것이 나한테 더 유익하겠어’ 이렇게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자기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고 도법스님은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설명 끝에 도법 스님은 이제 하나의 길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이제 우리가 죽기 살기로 목숨 걸 일은 딱 하나라고 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으로 삶을 살아왔는데, 우리가 온통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 의지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면 죽기살기로 더불어 함께 살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죠. 함께 사는 데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부처, 예수, 간디 같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도법스님은 다시 강조합니다. 인간은 관계의 존재이기 때문에 누군가를 상대할 수밖에 없고 만일 여러분이 평화롭고 싶으면 여러분 스스로 마주하고 있는 상대를 평화롭게 대하면 된다고요. 평화롭게 말하고, 행동하면 나 스스로가 평화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고 이건 마음먹으면 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요즘 명상이다 힐링이다 말이 많은데, 평화로운 생명을 위해 가장 앞질러 가는 것이 바로 ‘평화롭게 대하고, 말하고, 행동하라’라는 것입니다.
도법스님은 또한 갈등과 대립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분노와 증오로 다룰 것인가? 이해와 보살핌으로 다룰 것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주로 분노와 증오로 다루어왔습니다. 우리는 좌우대립, 동족상잔, 남북 대립 등의 상황 속에서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룩해 왔습니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서로에 대한 불신, 분노, 증오, 공포가 끊임없이 생산되어 왔지요. 자본가/노동자, 좌파/우파 등등 이런 것들이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쌓여 있습니다. 예전에는 저항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민주화 운동을 했고, 이젠 대통령을 맘대로 비판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고 도법 스님은 이야기하면서 이제는 분노, 증오, 공포를 녹여내고 그런 것들이 재생산되지 않는 뭔가 다른 방식이 나와야 할 때며 이 시대 종교가 바로 그 일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강의를 마쳤습니다.
이렇게 <2013 하반기 민주주의 배움터>는 생명과 평화, 이해와 보살핌에 대해 마음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끝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앞으로 새로운 2014년 새해에도 여러분들과 민주주의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할 수 있는 배움터를 준비해서 모실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