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저자 간담회 후기
지난 11월 16일 월요일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저녁, 충청북도 청주 사직동에 위치한 ‘카페 이따’에서는 서른 명이 훌쩍 넘는 분들이 카페를 가득 메우고 <민주주의, 책을 만나다> 저자 간담회 2탄을 약 두 시간 동안 함께 만들어갔습니다.
지난 서울에서의 1차 저자 간담회에 이은 이번 2차 간담회는 최근 <아렌트의 정치>(한티재, 2015)를 쓴 권정우, 하승우 박사를 모시고 “한국사회에서 정치는 가능할까”라는 제목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하승우 박사는 우리 사회에서 평소에 한국정치에 대한 관심이나 이야기가 많이 오고 가는데, 그럴 때마다 정치라는 걸 너무 정해진 틀에 맞춰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은가라는 의문이 들었다고 합니다. 한나 아렌트라는 인물이 우리가 가진 정치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 깨기에 좋은 인물이라고 생각했고, 대학에 다닐 때부터 아렌트 관련 책들을 같이 읽고 공부했던 권정우와 함께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책을 쓴 배경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특히 아렌트가 강조하는 ‘공론장’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요. 대학원 시절 세미나를 같이 할 때만 해도 이론적으로만 관심이 있었는데, 2001년부터 풀뿌리 자치 연구소 이음에서 지역주민들을 조직화하는 사업을 주되게 하는 주민운동 활동가들을 많이 만나면서, 이들이 지역에서 사람들이 만날 수 있는 판을 고민하는 모습속에 추상적으로 상정해왔던 공론장이 바로 이러한 판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공론장을 서구 역사 사상속에서 추적하는 것과 더불어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하게 되었죠. 그러한 지역주민운동의 사례들을 접하면서 공론장이 생명체처럼 확장하고, 축소하고, 소멸하고 다시 생성되는 과정을 보게 된 거죠. 이 책에는 이러한 공론장의 논의와 더불어 아렌트의 주요 개념 중 하나인 ‘전체주의’가 왜 등장했고,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고 합니다. 또한 권정우와 하승우 박사는 ‘지금 우리 한국 사회의 성격을 전체주의라고 규정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질문과 함께 이 전체주의를 처음으로 이론적으로 규명했던 아렌트를 설명해주고 싶어 이 책을 썼다고 책을 쓴 배경을 보다 상세하게 이야기해줬습니다.
많은 참가자들이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아렌트의 용어가 누구나 사실 다를 게 없다는 식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소비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이에 대해 저자 권정우는 평범성이란 말 대신의 적절한 번역어를 찾기가 어렵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이 책 <아렌트의 정치>에서 밝혔듯이 ‘banality’라는 단어 자체가 평범하다는 의미보다는 ‘어리석다, 멍청하다’ 라는 의미가 강하게 담겨 있습니다. 아렌트가 ‘banality of evil’이라고 말한 것을 악의 평범성으로 번역하면 평범한 사람 누구도 악한 것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사람들의 악한 행위에 면죄부를 줄 수 있다는 의미로도 사용되는데, 사실은 수많은 유태인들을 수용소로 보낸 아이히만이란 자가 굉장히 어리석고 멍청했기 때문에 이런 학살에 가담했으며, 아렌트는 이런 측면에서는 ‘악의 어리석음’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승우 박사는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책을 언급하면서 유대인 학살사건은 아이히만 혼자 저지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는 점을 상기시킵니다. 아렌트는 같은 유대인들이면서 자기들이 살기 위해서 끊임없이 다른 유대인들을 죽음으로 먼저 밀어넣었던 사실들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아렌트는 ’유대인=선한 피해자, 아이히만=악의 가담자’ 이런 구분으로 당시 역사를 보지 않고 있죠. 자신들이 살기 위해 계속 악의 고리 속에서 악에 가담하는 경향을 아렌트는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런 입장 때문에 결국 아렌트는 유대인 공동체에서조차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되죠.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은, 권력을 가지고 직책을 갖게 되면 상당한 생각과 판단이 뒤따라야 함에도 불구하고 근대 정치에 와서는 오히려 더 기계적으로, 관료적으로, 생각 없이 판단하는 이 모순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어떤 개인의 특성보다는 개인들을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게 방치하고 조장하는 사회문제를 지적하고 있다고 할 수 있죠.
‘한국사회에서 정치는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하승우 박사는 지금 이 간담회 자리도 정치의 장이 될 수 있다고 운을 뗍니다. 여기서 자신이 생각하는 정치에 대해 얘기하는 순간 아렌트가 말한 공론장이 형성되는 것이죠. 내가 생각하는 정치적 지향을 얘기하고 다른 사람들 얘기를 들으면서 더 생각이 서로서로 깊어지지 않을까요? 혼자서 자신의 개인 이해관계에 대해서만 생각하다가 이런 모임을 통해서 개인적인 것을 넘어선 공통의 문제를 생각하는 것 자체가 바로 아렌트가 말한 ‘공론장’입니다. 하승우 박사는 결국 누가 어떻게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역동적으로 변해갈 수 있는 장이 아렌트가 생각하는 정치의 장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에 대해 한 참가자는 그러한 공론장의 기본조건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듣고 나도 생각해보겠다는 기본 자세가 깔려 있어야 가능한데 우리 사회에서는 그런 기본 전제가 깔려 있지 않다고 본다며, 이 말이 안통하는, 상당히 이분법적으로 양분되어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 질문했습니다. 이에 대해 하승우 박사는 아렌트의 공론장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말과 행위, 대화가 매우 중요한데 우리가 대화하는 방법에 대해서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동등한 시선에서 서로 응시하고 대화를 나누는 경험이 한국사회에서 거의 없었습니다. 항상 위계 관계 속에서 만남이 이뤄지다보니 대화한다는 것이 위계에서 위를 차지한 사람이 훈계, 훈시하는 걸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상당히 많죠. 그런 점에서 가장 큰 원인은 우리가 말하는 법을 잘 모르고, 반대로 듣는 법도 더욱 모른다는 점이라고 하승우 박사는 이야기합니다. 또한 ‘빨갱이’, ‘종북’이란 용어처럼 대화 자체가 애초에 불가능하게 만드는 게 한국사회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하승우 박사는 이 책을 쓰면서 한국사를 복기하면서 놀랐던 것은 정치를 규정하는 주요 제도들이 아렌트가 강조하는 공론장을 활성화시키지 못하도록 만들어져 있다는 점이었다고 지적합니다. 각종 선거제도, 선거법 이런 것들을 보면 오히려 정치를 활성화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보다는 그런 활성화요인들을 막는 내용들이 많이 들어있는 상황입니다. 물론, 우리는 과거에 비해 자유롭게 얘기를 나눌 수 있는 환경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런 얘기들이 정치적 힘으로 전환될 수 있는 계기를 다 잘라놓은 형국이라는 거죠. 세상을 유지하는 틀은 그대로인데 우리가 조금 더 사람을 편하게 만날 수 있게 된 것 뿐입니다. ‘과연 우리가 정말 솔직한 이야기를 한국사회에서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에는 아직도 한국사회는 굉장히 불편한 상황이죠.
이 답변이 끝나자마자 또 다른 참가자분은 이 체제적인 문제가 견고하게 있다고 한다면, 그 제도들 중 뭐가 제일 큰 문제라고 보는지 질문을 했습니다. 하승우 박사는 무엇보다 한국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 즉 일극 중심으로 서열화되어 있다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답합니다. 그러다보니 얼만 전 있었던 서울의 도심 시위의 과잉진압에 대해서도 다들 ‘나는 명령만 받아서 움직였을 뿐이다’라고 얘기들을 하게 된다는 거죠. 물대포를 직사로 쏘면 안됨에도 불구하고, 직사하라는 명령을 그대로 따르는 겁니다. 권력이 매우 서열화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저자 권정우는 이 질문에 대해 사람들에게 더 이상 ‘세계’가 없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제도의 문제는 아니라고 보고 있는 거죠. 예를 들어 사람들이 단체를 만들고 활동하다가 깨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를 들여다보면 사실 의견 대립 뒤에 ‘난 쟤가 싫어’ ‘쟤는 나를 감정적으로 괴롭혔어’ 이런 식의 감정 반응이 굉장히 많습니다. 아렌트는 감정중심주의를 설명하면서 사람들이 자기 슬픔과 외로움 이런 것들에 대해서만 지나치게 집착하고 그 부분만 어루만지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다른 것들은 아예 통제할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죠. 아렌트는 이러한 감정과잉주의와 반대의 경우로 그리스 정치장을 이야기합니다. 그 당시 그리스 사람들은 그 공론장에 와서 어떤 사안에 대해 서로 인격적으로도 비난하고 비판하지만 아무도 감정적으로 대처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서로서로 얘기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자기 감정들을 싸고 돌기 때문에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렌트가 현대인의 고독, 공허함을 이야기하면서 이런 것들이 자신의 감정에만 지나치게 집중하는 경향이 강해졌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전체주의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거기서 중요한 부분이 현대인들이 스스로가 보듬어야 하고 지켜줘야 할 누군가가 가족 정도 외에는 없다는 지점입니다. 내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보듬어줄 수 있는 세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사안일함이 등장하고 그로 인해 악의 평범성이 문제가 되고 있다는 거죠. 권정우는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감정주의가 심하게 드러나 있다고 봅니다. 정치에서도 이러한 감정중심주의가 정치를 굉장히 어렵게 하는 요소들이라고 아렌트가 진단하는 부분을 우리가 깊게 생각해 봐야 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한국 사회에 대해서 독재, 신자유주의, 사적 자본이 자기이익을 극대화하는 경향 등 여러 가지 설명할 수 있는 표현이 많이 있는데, 굳이 한국 사회를 전체주의 사회라고 명명하며 이 책을 썼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권정우는 전체주의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먼저 하고, 그렇다면 그 특성들이 한국 사회에서 얼마큼 보여지고 있는가라는 뒤이은 질문에 답하는 것이 이 책에서 다루고자 했던 질문이라고 답합니다. 전체주의의 가장 큰 특성이 사람들을 완전하게 지배하기 위한 장치로 봤을 때 이것이 전체주의만의 특성은 아닙니다. 현재 우리에게 벌어지는 많은 일들이 인간을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을까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현대 사회의 이 시스템들이 전체사회와 대단히 닮아 있다는 거죠. 그러다보니 인간 삶의 방식, 사고 방식 등이 아렌트가 얘기했던 수용소안의 수인처럼 명령이 주어진 채로 살아가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현재 우리의 사회가 전체주의와 많이 닮아있다고 본 것이구요.
이 책에서 현실 정당정치 부정하는 경향이 많이 느껴지는데, 실제 현실 정치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 정당정치 이외의 방법으로 나올 수 있다고 보고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하승우 박사는 아렌트가 정당정치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는 것은 맞다고 인정합니다. 오히려 아렌트는 정당정치가 정치의 모든 것을 다 잡아먹고 있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아렌트는 우리가 정말 정치적 인간으로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들을 끊임없이 던지고 그 질문들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데, 정당정치는 이것을 단순히 이해관계의 집산이란 형태로 만들어버 버린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하승우 박사는 아렌트가 본 것처럼 정당정치를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지난 1차 저자 간담회 때 박상훈 박사가 이야기한 것처럼 한국 사회에서 정당의 역할은 매우 중요할 수 있습니다. 정당정치로 풀어가야 할 구조적 문제가 분명 존재하며, 아렌트처럼 우리가 정치적으로 각성해야 할 문제 역시도 매우 중요하다는 거죠. 이 두 가지 문제가 만나지는 접점이 많아져야 하는데, 과연 우리의 정당정치가 이 접점을 많이 만들고 있는가 질문해 봐야 한다고 하승우 박사는 주장합니다. 정치적 존재로서 각성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의욕과 정치적 이해관계를 다루는 제도가 서로 만나는 접점이 많이 막혀 있는데, 정당에서 일정정도 그 접점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들이 있다는 거죠.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는 정당이라는 이름을 내걸고는 정치적 발언을 비교적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공론장이 형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 스스로가 ‘정당’에 대한 자기 경계가 강한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는 정치하는 사람들 아니다’ 이런 말들이 일상화되어 있는데, 하승우 박사는 이 틈을 좁혀 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또 다른 참가자는 아렌트가 인간이 정치적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며, 그걸 풀어가는 방식이 노동, 일, 행위를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그 설명 맥락에 대해 좀 더 보충 설명을 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권정우는 아렌트가 노동, 작업, 행위 구분한 부분은 결국 행위라는 것을 최종적으로 강조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서 나눈 것이라고 본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와 수용소를 이야기하면서 수용소에 있는 인간들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은 말과 행위라고 지적합니다. 아렌트에 따르면 노동과 작업과 행위에 적합한 영역들이 다 정해져 있는데, 현대에 들어서는 이것들이 자꾸 다른 영역으로 침범하게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권정우는 작업과 행위의 구분을 예로 들면서, 누군가 뛰어난 예술가처럼 정치를 예술 작품 만드는 것처럼 뚝딱 제작한다고 한다면 이런 것들이 바로 전체주의의 전조라고 말합니다. 정치라는 영역은 무수한 인간들이 모여 서로 대화하고 토론하는 과정인데 이것이 마치 제작인 것처럼, 노동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들이 전체주의 사회의 수용소의 특성이라고 한나 아렌트는 보고 있습니다.
마무리는 다시 ‘한국 사회에서 정치는 가능한가?’라는 처음 질문으로 되돌아옵니다. 이에 대해 권정우는 한국사회에서 정치에 대해 굉장히 좁게 다루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무엇보다 사람들이 우선 서로서로 만나야 한다는 점을 재차 강조합니다. 아렌트가 가정의 굴레 안에서만 살아가는 사람들을 인간이 아닌 자들이라고 언급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은 결국 정치를 통해서 가능하며 아렌트에게 정치가 화두였던 것처럼 한국사회에서도 중요한 화두는 정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권정우는 빅브라더, 빅데이터 사례를 언급하면서 한국에서 정치는 가능하겠지만 그 폭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고 말하며, 우리가 수용소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이 책에서는 한마디로 ‘용기를 가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승우박사는 정치의 화폐가치화, 사법화 등의 경향을 지적하면서 시대정신과 여론으로 판단되어야 할 문제들이 경제적인 비용과 법관과 같이 전문가들이 판결하게 되면 우리 스스로가 아무것도 못하게 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아렌트는 명확하게 정치는 자유의 공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노동, 작업을 할 때는 자유를 경험할 수 없는데 정치적 인간으로 살 때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거죠. 이 자유는 누가 나한테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속에 들어가야 얻을 수 있습니다. 하승우 박사는 개인의 미래를 그릴 때 내가 나중에 얼마를 벌고, 어느 지위에 올라야 하는지 등에는 관심이 많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가 어떤 사회에 살고 싶은가라는 질문들을 더 이상 던지지 않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결국 내 자유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결코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시대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정치라는 것은 타인을 만나는 것이고, 그 타인이 옆에 서 있을 때에만 자유가 주어집니다. 용기를 낼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생겼을 때 우리가 과연 옆에 있는 타자에게 용기를 내게 할 수 있는 사람인가? 옆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는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계속 던져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도록 정치적 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래야 정치가 가능합니다. 내가 시작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시작할 수 없다고 하승우 박사는 참가자들에게 주문합니다.
‘카페 이따’에서 이렇게 약 두 시간동안 아렌트의 공론장, 악의 평범성, 정치, 자유, 변화 등의 이야기를 가지고 뜨겁게 달아올랐습니다. 그 사이 굵게 내리던 빗줄기는 어느덧 그 힘을 잃고 부슬부슬 흩뿌리고 있었습니다. <민주주의, 책을 만나다> 2탄 청주편도 이렇게 끝이 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