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 조봉암 선생 서거 65주년 및 탄생 125주년 기념 심포지엄
○ 심포지엄 일시: 2024년 7월 15일(월) 오후 2시~5시
○ 심포지엄 장소: 국회도서관 소회의실
○ 심포지엄 일시: 2024년 7월 15일(월) 오후 2시~5시
○ 심포지엄 장소: 국회도서관 소회의실
행사 정보
월요일
2024-07-15
국회도서관 소회의실
지도에서 보기
인물 정보
조봉암
- 1898년 9월 25일 강화 출생
-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에 가담. 1년간 복역. 출옥 후 동경중앙대학에서 1년간 정치학 공부. 비밀결사 ‘흑도회’에 가담하여 항일운동
- 1925년 조선공산당에 참여
- 1928년 ML당 활동으로 검거. 7년간 복역. 출옥 후 인천에서 저항운동을 하다가 다시 검거
- 1945년 광복되어 석방
- 1946년 공산당 탈당
-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 초대 농림부장관 지냄
-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재선. 국회부의장에 선출
- 1952년 제2대 대통령후보에 출마하여 차점으로 낙선
- 1956년 제3대 대통령후보에 출마했으나 216만여표를 획득. 낙선
- 1956년 11월 진보당 창당
- 1958년 1월 13일 위반으로 체포. 진보당 7명과 함께 간첩 혐의로 구속
- 1959년 7월 30일 진보당 사건으로 이승만정권에 의해 사형
-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에 가담. 1년간 복역. 출옥 후 동경중앙대학에서 1년간 정치학 공부. 비밀결사 ‘흑도회’에 가담하여 항일운동
- 1925년 조선공산당에 참여
- 1928년 ML당 활동으로 검거. 7년간 복역. 출옥 후 인천에서 저항운동을 하다가 다시 검거
- 1945년 광복되어 석방
- 1946년 공산당 탈당
-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 초대 농림부장관 지냄
-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재선. 국회부의장에 선출
- 1952년 제2대 대통령후보에 출마하여 차점으로 낙선
- 1956년 제3대 대통령후보에 출마했으나 216만여표를 획득. 낙선
- 1956년 11월 진보당 창당
- 1958년 1월 13일 위반으로 체포. 진보당 7명과 함께 간첩 혐의로 구속
- 1959년 7월 30일 진보당 사건으로 이승만정권에 의해 사형
조봉암 선생은 모든 사람이 평화롭고 공평하게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었던 진보정치가이자 이승만의 정치적 입지를 위협했던 현실 정치가였다.
1959년 7월 31일 오전 11시 3분, 모든 사람이 평화롭고 공평하게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었던 진보정치가가 세상을 떠났다.
조봉암 선생은 초대 농림부장관과 국회부의장을 지냈고,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216만여 표를 획득,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적 입지를 위협했던 현실정치가이자 진보당 당수인 죽산 조봉암 동지에 대한 사형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집행됐다.
1심 재판부는 그에게 `양명산`이란 인물을 통해 북과 접촉하며 정치자금을 받고 기밀서류들을 넘겨준 혐의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5년 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검찰의 항고로 열린 2심 재판에서 1심에서 무죄로 결론 난 간첩죄를 적용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1950년대 중반 진보를 표방하며 ‘책임지는 혁신정치’, ‘수탈없는 계획경제’, ‘민주적인 평화통일’을 당 강령으로 내걸고, ‘피해대중’을 위한 정치를 펼치고자 했던 동지였다. 그에 대한 사형 집행은 진보적인 혁신정당, 나아가 이 땅의 진보주의에 대한 사형집행과 다름없었다. 동지의 죽음 후 이 땅의 진보주의는 한동안 맥이 끊겼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하면서부터 민족 해방을 위해 투쟁했고,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분파주의를 비판하면서 전향했던 동지는 1948년 5.10 남한 단독 선거에서 무소속 국회의원이 되면서 정치인으로서의 첫 발을 내딛는다. 동지는 좌·우익을 거부하고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걷고자 했다. 그러나 동지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1959년 7월 31일 오전 11시 3분, 모든 사람이 평화롭고 공평하게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었던 진보정치가가 세상을 떠났다.
조봉암 선생은 초대 농림부장관과 국회부의장을 지냈고,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216만여 표를 획득,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적 입지를 위협했던 현실정치가이자 진보당 당수인 죽산 조봉암 동지에 대한 사형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집행됐다.
1심 재판부는 그에게 `양명산`이란 인물을 통해 북과 접촉하며 정치자금을 받고 기밀서류들을 넘겨준 혐의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5년 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검찰의 항고로 열린 2심 재판에서 1심에서 무죄로 결론 난 간첩죄를 적용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1950년대 중반 진보를 표방하며 ‘책임지는 혁신정치’, ‘수탈없는 계획경제’, ‘민주적인 평화통일’을 당 강령으로 내걸고, ‘피해대중’을 위한 정치를 펼치고자 했던 동지였다. 그에 대한 사형 집행은 진보적인 혁신정당, 나아가 이 땅의 진보주의에 대한 사형집행과 다름없었다. 동지의 죽음 후 이 땅의 진보주의는 한동안 맥이 끊겼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하면서부터 민족 해방을 위해 투쟁했고,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분파주의를 비판하면서 전향했던 동지는 1948년 5.10 남한 단독 선거에서 무소속 국회의원이 되면서 정치인으로서의 첫 발을 내딛는다. 동지는 좌·우익을 거부하고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걷고자 했다. 그러나 동지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