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박찬우 동지 6주기 추모제
○ 일 시: 2024년 7월 6일(토) 12시(정오)
○ 장 소: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
○ 장 소: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
행사 정보
토요일
2024-07-06
망월동5.18민족민주열사묘역
지도에서 보기
인물 정보
박찬우
1956년 7월 8일 광주출생
광주일고 졸업, 서울대 74학번
1974년 서울 제일교회에서 박형규 목사님을 모시고 나병식, 김경남 목사, 권형택 등과 함께 대학부 활동을 함
1977년 3월 28일 유신헌법 철폐 서울대 학생시위 주동 구속
- 취조과정에서 박석운(한국진보연대 대표)을 배후로 지목하라며 매우 혹독한 고문을 당했음
- 전기 고문과 혁수정을 채우고 단식 투쟁하는 과정에서 머리에 방성구를 씌움
- 당시는 감옥에서 사상범에게 전향을 강요하며 잡범들이 양심수들을 가혹하게 구타 하게하는 시절로 건강이 극도로 악화 됨
1979년 7월 17일 석방
1980년 당시 녹두서점과 YWCA를 중심으로 활동하다 5·18직후 안산으로 피신했음.
이후 안평수를 중심으로 한 `전두환 30만 살륙작전`이란 유인물을 박석운(한국진보연대 대표), 나선초, 박흥국 등과 함께 배포하다 다시 수배됨
수배가 풀리고 다시 광주에 내려와 최상철, 임종수, 정의행 등 후배들의 학습을 오랬동안 체계적으로 지도하였음.
1982년 박관현열사 사망 당시 전남대생들의 학습을 지도하며 시위를 기획하였고`박관현을 살려내라``학살원흉 처단하라``민주인사 석방하라``민주정부 수립하라`등 1주일간의 시위가 끝난 후, 김상집, 이춘문, 조익문, 박학덕, 박현우, 김상전 등과 함께 서울로 피신함
이후 광주로 다시 내려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음. 특히, 1987년 6월항쟁이 있기 전인 1985년부터 광주무등산 화암부락에서 사상서적과 문학서적들을 번역하며 후배들(김승원, 염정호 등)에게 학습을 체계적으로 지도하였음.
그 후 1987년 6월항쟁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특히 YMCA를 중심으로 중등교사협의회를 결성하고 후일 전교조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고 김현준(당시 김광한)과 함께 열렬히 활동하였음.
광주일고 졸업, 서울대 74학번
1974년 서울 제일교회에서 박형규 목사님을 모시고 나병식, 김경남 목사, 권형택 등과 함께 대학부 활동을 함
1977년 3월 28일 유신헌법 철폐 서울대 학생시위 주동 구속
- 취조과정에서 박석운(한국진보연대 대표)을 배후로 지목하라며 매우 혹독한 고문을 당했음
- 전기 고문과 혁수정을 채우고 단식 투쟁하는 과정에서 머리에 방성구를 씌움
- 당시는 감옥에서 사상범에게 전향을 강요하며 잡범들이 양심수들을 가혹하게 구타 하게하는 시절로 건강이 극도로 악화 됨
1979년 7월 17일 석방
1980년 당시 녹두서점과 YWCA를 중심으로 활동하다 5·18직후 안산으로 피신했음.
이후 안평수를 중심으로 한 `전두환 30만 살륙작전`이란 유인물을 박석운(한국진보연대 대표), 나선초, 박흥국 등과 함께 배포하다 다시 수배됨
수배가 풀리고 다시 광주에 내려와 최상철, 임종수, 정의행 등 후배들의 학습을 오랬동안 체계적으로 지도하였음.
1982년 박관현열사 사망 당시 전남대생들의 학습을 지도하며 시위를 기획하였고`박관현을 살려내라``학살원흉 처단하라``민주인사 석방하라``민주정부 수립하라`등 1주일간의 시위가 끝난 후, 김상집, 이춘문, 조익문, 박학덕, 박현우, 김상전 등과 함께 서울로 피신함
이후 광주로 다시 내려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음. 특히, 1987년 6월항쟁이 있기 전인 1985년부터 광주무등산 화암부락에서 사상서적과 문학서적들을 번역하며 후배들(김승원, 염정호 등)에게 학습을 체계적으로 지도하였음.
그 후 1987년 6월항쟁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특히 YMCA를 중심으로 중등교사협의회를 결성하고 후일 전교조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고 김현준(당시 김광한)과 함께 열렬히 활동하였음.
6월항쟁 이후 88년부터 1992년까지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대학선후배들의 논문용 번역서들을 번역하며 학원에서는 수학강사와 논술강사를 하였음, 이 비용으로 신병치료와 노모의 생활비에 보탰고, 가끔 후배들의 활동을 위해 후원하기도 하였음.
이후 1993년경 친구와 사업하다가 사기를 당하면서 신용 불량자가 되었고, 이로 인하여 잠시 안정기를 가졌던 심신이 다시 고문후유증으로 인한 생겼던 피해망상증세가 재발하면서 건강이 다시 악화됨.
이로 인하여 1996년경 다시 순천 성가를로 병원에 약 1년간 입원하였고, 다시 퇴원하여 활동하였으나 평소에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한 염증이 있었던 고관절이 다시 염증이 재발하여 그 후 2002년경부터 2013년까지 약 3차례를 다시 입원하였음.
그 후 계속 입원과 치료를 반복하며 병마와 싸웠으나 고문 피해로 인한 망상증을 극복하는 데는 역부족이었음.
그러던 2014년 주변에서 공기 좋은 순천 주암의 조봉훈 동지의 가옥으로 옮겨 요양을 해보자는 권유로 그 쪽으로 이사하여 치료하던 중 3차례의 입원을 통해서 치료하였음.
그러다가 사망 1년 전부터 본인의 요구로 입원을 거부하여 지내던 중 어제 7월 14일 아침에 시신을 발견하였으나 경찰추정으로는 7월 10일경으로 사망시각을 짐작하고 있으며 전형적인 고독사로 보고 있음.
이후 1993년경 친구와 사업하다가 사기를 당하면서 신용 불량자가 되었고, 이로 인하여 잠시 안정기를 가졌던 심신이 다시 고문후유증으로 인한 생겼던 피해망상증세가 재발하면서 건강이 다시 악화됨.
이로 인하여 1996년경 다시 순천 성가를로 병원에 약 1년간 입원하였고, 다시 퇴원하여 활동하였으나 평소에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한 염증이 있었던 고관절이 다시 염증이 재발하여 그 후 2002년경부터 2013년까지 약 3차례를 다시 입원하였음.
그 후 계속 입원과 치료를 반복하며 병마와 싸웠으나 고문 피해로 인한 망상증을 극복하는 데는 역부족이었음.
그러던 2014년 주변에서 공기 좋은 순천 주암의 조봉훈 동지의 가옥으로 옮겨 요양을 해보자는 권유로 그 쪽으로 이사하여 치료하던 중 3차례의 입원을 통해서 치료하였음.
그러다가 사망 1년 전부터 본인의 요구로 입원을 거부하여 지내던 중 어제 7월 14일 아침에 시신을 발견하였으나 경찰추정으로는 7월 10일경으로 사망시각을 짐작하고 있으며 전형적인 고독사로 보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