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이한열 열사 37주기 추모식
○ 일 시: 2024년 7월 5일(금) 오후 1시
○ 장 소: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
○ 장 소: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
행사 정보
금요일
2024-07-05
망월동5.18민족민주열사묘역
지도에서 보기
인물 정보
이한열(당시 21세)
1966년 8월 29일 출생
1973년 광주동산 국민학교 입학
1979년 광주동성중학교 입학
1982년 광주진흥고 입학
1986년 연세대학교상경대학 경영학과입학, 동아리 ‘만화사랑’에서 활동
1987년 6월 9일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결의대회’에 참석, 시위도중 연세대정문 앞에서 경찰이 쏜 직격 SY 44 최루탄에 피격당해 쓰러짐
1987년 7월 5일 새벽 2시5분 세브란스 중환자실에서 뇌손상으로 27일 동안 처절하게 투병하다가 운명
1987년 7월 9일 ‘애국학생 故 이한열열사 민주국민장’ 거행
1973년 광주동산 국민학교 입학
1979년 광주동성중학교 입학
1982년 광주진흥고 입학
1986년 연세대학교상경대학 경영학과입학, 동아리 ‘만화사랑’에서 활동
1987년 6월 9일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결의대회’에 참석, 시위도중 연세대정문 앞에서 경찰이 쏜 직격 SY 44 최루탄에 피격당해 쓰러짐
1987년 7월 5일 새벽 2시5분 세브란스 중환자실에서 뇌손상으로 27일 동안 처절하게 투병하다가 운명
1987년 7월 9일 ‘애국학생 故 이한열열사 민주국민장’ 거행
1987년 7월10일자 조간, 석간 신문을 받아든 시민들은 백만의 인파가 시청앞 광장을 가득 메운 사진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이 백만이 넘는 사람들을 이처럼 시청앞에 모이게 한 것일까?
이 한 열 ! 이한열 동지가 자라난 광주 지산동 조그마한 집 거실벽에는 신영복 선생이 힘차게 쓴 「6월 하늘 함성」이라는 글씨가 걸려있다.
신영복 선생의 표현대로 동지의 이름은 부정과 억압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며 단결투쟁으로 쟁취한 6월의 승리를 가리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한열 동지는 어린시절부터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하기로 소문난 소년이었다.
부모님 말씀 잘 듣고 공부를 잘해서 마을에서는 큰 재목이 될 거라고 입을 모았으며, 친구들과의 관계도 아주 좋았다.
175cm의 큰 키에 준수한 용모의 젊은이로 자라난 소년 이한열 동지는 12년간 개근상을 받을만큼 건강하고 성실하였으며, 고등학교 총학생회장을 지낼 정도로 지도력이 있는 대장감이었다.
이렇듯 성실하고 모범적인 이한열 동지의 고민은 대학에 입학하면서 시작되었다.
“나의 어린날의 추억, 광주사태가 끝난 후 6월 초순, 아무런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나는 자연을 만끽했고 고풍의 문화재에 심취했다. 친구들과 찍은 몇장의 사진이 있을 뿐, 사회의 외곽지대에서, 무풍지대에서 스스로 망각한 채 살아왔던 지난 날이 부끄럽다”.
(유고 「1987년 분단 42년 피맺힌 2월」 중에서)
광주시민 학살에 대한 사진 전시회, 비디오를 보면서 그리고 학교집회에 참석하면서 이한열 동지는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사회의 외곽지대, 무풍지대에서 살아왔던 자신을 부끄러워 하게 되었다. 이한열 동지는 86년 2학기부터 실천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현실의 중심부에 뛰어들었다.
동지는 친구들에게 자신의 이름 중 ‘烈’자가 매울 열이라면서 자신과 최루탄은 불가분의 관계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또 이름의 끝 글자가 같은 김주열군과 자신을 비교하곤 했다.
어쩌면 동지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것인지도 모른다.
동지의 기록중에는 죽음과 관련한 내용이 많으며 최루탄에 대한 기록도 많다.
“최루탄 연기로 얼룩진 저 하늘위로 날아오르고 싶다.”
1987년 6월 9일, 오후 5시쯤 되었을까,
대기 중이던 전경들이 갑자기 대열을 정비하면서 조금씩 전진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30-40여 발의 최루탄이 난사되면서 교문 앞은 자욱한 연기로 앞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학생들이 흩어지기 시작하자 곧이어 2번째의 직격 최루탄이 날아들었다.
희미한 최루탄 연기 속에서 한 사내가 쓰러져 있었다.
연기 속에서 빠져나오던 학생 1명이 이한열 동지를 발견하고 뛰어가서 부축하며 일으켜 세웠다. 동지의 머리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흘러내렸다.
이한열 동지의 죽음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한열 동지의 피격사건은 전국으로 알려졌으며 학생, 시민들은 분노를 참지 못해 궐기하기 시작하였다. 6월항쟁은 전국을 뒤흔들었다. 학생들은 낮이면 거리에 나가 돌을 던졌고 밤에는 병원으로 돌아와 이한열 동지의 주위에서 밤을 지새웠다.
여기 한 떨기 생명이 있어 분노의 목줄기 드리웠나니
생명의 가파른 내리막길이여 숨 몰아쉬며 소생의 전투 그 벼랑끝에 서 있는
나의 전우여, 나의 가슴이여. 나의 애통이여! 한아 깨어나렴 한아 깨어나렴 한아,
이제는 깨어나 마침내 일어서렴.
이한열 동지의 소생을 비는 모든 사람들의 염원을 저버리고 동지는 최루탄없는 세상으로 떠나갔다.
하지만 동지의 죽음은 살아남은 우리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남겨주었다.
물러섬 없는 투쟁은 때론 우리에게 죽음을 가져다 준다는 것, 그리고 그 죽음으로 인해 수백 수천만이 마침내 깨어나 거대한 폭풍처럼 불의와 억압, 착취를 쓸어버린다는 것. 이한열 동지의 부활은 제2의 6월항쟁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열불나는 세상이 물 속에 잠겼다.
우리 아이가 익사했다. 뜨거운 정열과 불타는 의지가 물 속에 잠겼다.
금강산 댐의 물들이 억수로 한반도를 뒤덮는다.
그 물 속에 우리 아이가 들어 있었다. 63빌딩 꼭대기에서 휩쓸려가는 우리 아이를 보다가,
그만 그 속에 뛰어들 뻔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야 한다. 더러운 오물 찌꺼기를 걸러내야 한다.
죽더라도 깨끗한 물에 빠져 죽자. 지금은 죽을 때가 아니다.
<87. 1. 20. 이한열 동지가 쓴 글 中에서>
<동지가 남긴 글>
<편 지>
아버님께
봄날같지 않게 찬바람이 가끔 불어옵니다.
감기 걸리기 쉬운 계절인데 아버님 건강은 어떠신지요.
한달 동안 학교생활을 하면서 전에 느끼지 못한 즐거움을 느끼곤 합니다.
지난주에는 전방에 다녀왔습니다. 전화도 못ㅜ드리고 그냥 떠나서 무척 죄송스럽습니다.
제 나이 또래의 군인들을 보고 제 자신의 안일했던 지금까지의 생활이 후회되더군요.
날씨는 조금 추웠지만, 그 정도 추위 쯤은 견딜 수 있다는 각오로 임했습니다.
그 곳에서 지금까지의 생활을 정리해볼 수 있는 기회도 가졌습니다.
지금쯤 누나 결혼준비로 무척 바쁘시겠군요. 어머님도 무척 고생하시리라 생각합니다.
훈열이는 입시준비로 바쁘겠고 아무튼 집안에 많은 일이 겹쳤는데 장남으로서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해 송구스럽습니다.
하지만 제가 할 일을 열심히 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하고 생활에 충실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제 아버님도 정년이 1년밖에 남지 않으셔서 무척 서운하시겠지만, 고혈압 조심하시고, 건강하십시오. 아버님께 좀 더 힘이 될 수 있도록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무럭무럭 자라나겠습니다.
셋째 누나도 직장에 열심히 다니고, 생활비도 넉넉하오니 염려마십시오.
그럼 조만간 뵐 날을 기대하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1987. 3. 31. 서울에서 불초소자 올림.
<추모시>
그대 왜 가는가 그대 왜 가는가 어딜 가는가?
그대 등 뒤에 내려깔린 쇠사슬을 마저 손에 들고 어딜 가는가
이끌려 먼저 간 그대 뒤를 따라 사천만 형제가 함께 가야 하는가 아니다.
억압의 사슬은 두 손으로 뿌리치고 짐승의 철퇴는
두 발로 차 버리자 그대 끌려간 그 자리 위에 민중의 웃음을 드리우자
그대 왜 갔는가 어딜 갔는가
그대 손목 위에 드리워진 은빛 사슬을 마저 팔찌 끼고 어딜 갔는가.
무엇이 백만이 넘는 사람들을 이처럼 시청앞에 모이게 한 것일까?
이 한 열 ! 이한열 동지가 자라난 광주 지산동 조그마한 집 거실벽에는 신영복 선생이 힘차게 쓴 「6월 하늘 함성」이라는 글씨가 걸려있다.
신영복 선생의 표현대로 동지의 이름은 부정과 억압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며 단결투쟁으로 쟁취한 6월의 승리를 가리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한열 동지는 어린시절부터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하기로 소문난 소년이었다.
부모님 말씀 잘 듣고 공부를 잘해서 마을에서는 큰 재목이 될 거라고 입을 모았으며, 친구들과의 관계도 아주 좋았다.
175cm의 큰 키에 준수한 용모의 젊은이로 자라난 소년 이한열 동지는 12년간 개근상을 받을만큼 건강하고 성실하였으며, 고등학교 총학생회장을 지낼 정도로 지도력이 있는 대장감이었다.
이렇듯 성실하고 모범적인 이한열 동지의 고민은 대학에 입학하면서 시작되었다.
“나의 어린날의 추억, 광주사태가 끝난 후 6월 초순, 아무런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나는 자연을 만끽했고 고풍의 문화재에 심취했다. 친구들과 찍은 몇장의 사진이 있을 뿐, 사회의 외곽지대에서, 무풍지대에서 스스로 망각한 채 살아왔던 지난 날이 부끄럽다”.
(유고 「1987년 분단 42년 피맺힌 2월」 중에서)
광주시민 학살에 대한 사진 전시회, 비디오를 보면서 그리고 학교집회에 참석하면서 이한열 동지는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사회의 외곽지대, 무풍지대에서 살아왔던 자신을 부끄러워 하게 되었다. 이한열 동지는 86년 2학기부터 실천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현실의 중심부에 뛰어들었다.
동지는 친구들에게 자신의 이름 중 ‘烈’자가 매울 열이라면서 자신과 최루탄은 불가분의 관계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또 이름의 끝 글자가 같은 김주열군과 자신을 비교하곤 했다.
어쩌면 동지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것인지도 모른다.
동지의 기록중에는 죽음과 관련한 내용이 많으며 최루탄에 대한 기록도 많다.
“최루탄 연기로 얼룩진 저 하늘위로 날아오르고 싶다.”
1987년 6월 9일, 오후 5시쯤 되었을까,
대기 중이던 전경들이 갑자기 대열을 정비하면서 조금씩 전진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30-40여 발의 최루탄이 난사되면서 교문 앞은 자욱한 연기로 앞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학생들이 흩어지기 시작하자 곧이어 2번째의 직격 최루탄이 날아들었다.
희미한 최루탄 연기 속에서 한 사내가 쓰러져 있었다.
연기 속에서 빠져나오던 학생 1명이 이한열 동지를 발견하고 뛰어가서 부축하며 일으켜 세웠다. 동지의 머리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흘러내렸다.
이한열 동지의 죽음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한열 동지의 피격사건은 전국으로 알려졌으며 학생, 시민들은 분노를 참지 못해 궐기하기 시작하였다. 6월항쟁은 전국을 뒤흔들었다. 학생들은 낮이면 거리에 나가 돌을 던졌고 밤에는 병원으로 돌아와 이한열 동지의 주위에서 밤을 지새웠다.
여기 한 떨기 생명이 있어 분노의 목줄기 드리웠나니
생명의 가파른 내리막길이여 숨 몰아쉬며 소생의 전투 그 벼랑끝에 서 있는
나의 전우여, 나의 가슴이여. 나의 애통이여! 한아 깨어나렴 한아 깨어나렴 한아,
이제는 깨어나 마침내 일어서렴.
이한열 동지의 소생을 비는 모든 사람들의 염원을 저버리고 동지는 최루탄없는 세상으로 떠나갔다.
하지만 동지의 죽음은 살아남은 우리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남겨주었다.
물러섬 없는 투쟁은 때론 우리에게 죽음을 가져다 준다는 것, 그리고 그 죽음으로 인해 수백 수천만이 마침내 깨어나 거대한 폭풍처럼 불의와 억압, 착취를 쓸어버린다는 것. 이한열 동지의 부활은 제2의 6월항쟁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열불나는 세상이 물 속에 잠겼다.
우리 아이가 익사했다. 뜨거운 정열과 불타는 의지가 물 속에 잠겼다.
금강산 댐의 물들이 억수로 한반도를 뒤덮는다.
그 물 속에 우리 아이가 들어 있었다. 63빌딩 꼭대기에서 휩쓸려가는 우리 아이를 보다가,
그만 그 속에 뛰어들 뻔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야 한다. 더러운 오물 찌꺼기를 걸러내야 한다.
죽더라도 깨끗한 물에 빠져 죽자. 지금은 죽을 때가 아니다.
<87. 1. 20. 이한열 동지가 쓴 글 中에서>
<동지가 남긴 글>
<편 지>
아버님께
봄날같지 않게 찬바람이 가끔 불어옵니다.
감기 걸리기 쉬운 계절인데 아버님 건강은 어떠신지요.
한달 동안 학교생활을 하면서 전에 느끼지 못한 즐거움을 느끼곤 합니다.
지난주에는 전방에 다녀왔습니다. 전화도 못ㅜ드리고 그냥 떠나서 무척 죄송스럽습니다.
제 나이 또래의 군인들을 보고 제 자신의 안일했던 지금까지의 생활이 후회되더군요.
날씨는 조금 추웠지만, 그 정도 추위 쯤은 견딜 수 있다는 각오로 임했습니다.
그 곳에서 지금까지의 생활을 정리해볼 수 있는 기회도 가졌습니다.
지금쯤 누나 결혼준비로 무척 바쁘시겠군요. 어머님도 무척 고생하시리라 생각합니다.
훈열이는 입시준비로 바쁘겠고 아무튼 집안에 많은 일이 겹쳤는데 장남으로서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해 송구스럽습니다.
하지만 제가 할 일을 열심히 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하고 생활에 충실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제 아버님도 정년이 1년밖에 남지 않으셔서 무척 서운하시겠지만, 고혈압 조심하시고, 건강하십시오. 아버님께 좀 더 힘이 될 수 있도록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무럭무럭 자라나겠습니다.
셋째 누나도 직장에 열심히 다니고, 생활비도 넉넉하오니 염려마십시오.
그럼 조만간 뵐 날을 기대하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1987. 3. 31. 서울에서 불초소자 올림.
<추모시>
그대 왜 가는가 그대 왜 가는가 어딜 가는가?
그대 등 뒤에 내려깔린 쇠사슬을 마저 손에 들고 어딜 가는가
이끌려 먼저 간 그대 뒤를 따라 사천만 형제가 함께 가야 하는가 아니다.
억압의 사슬은 두 손으로 뿌리치고 짐승의 철퇴는
두 발로 차 버리자 그대 끌려간 그 자리 위에 민중의 웃음을 드리우자
그대 왜 갔는가 어딜 갔는가
그대 손목 위에 드리워진 은빛 사슬을 마저 팔찌 끼고 어딜 갔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