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김상진 열사 49주기 추모제
○ 일 시: 2024년 4월 7일(일) 오전 11시
○ 장 소: 민주화운동기념공원
○ 일 시: 2024년 4월 7일(일) 오전 11시
○ 장 소: 민주화운동기념공원
행사 정보
일요일
2024-04-07
민주화운동기념공원
지도에서 보기
인물 정보
김상진
- 1949년 11월 25일 서울 출생
- 1968년 보성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축산과 입학
- 1968년 6월 이념 서클 ‘한얼’에 가입
- 1971년 가을 군입대
- 1974년 가을학기에 4학년 1학기 복학
- 1975년 2월 박정희 정권은 자신이 약속했던 구속학생과 교수들의 복학, 복직을 불허하고 극심한 언론탄압을 일삼음. 이에 4월 11일 서울대 농대 교정에서 있었던 연행학생에 대한 석방을 요구하는 자유성토대회에서 3번째 연사로 등장하여 양심선언문 낭독후 할복자결. 그러나 서울대생 1,000여명은 긴급조치 9호 선포 등의 탄압에도 `김상진 동지 장례식`을 거행하고 대규모 시위를 벌임
- 4월 12일 서울 의대 이송 도중 운명
- 제 8차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인정자
’68년 서울대 농대에 합격하여 대학생활 중 이념써클 ‘한얼’에 가입하여 문학과, 사회사상을 체계적으로 공부하며 많은 책을 읽고 토론하는 등 사회에 대한 남다른 시각을 갖고 실천하게 된다. ’75년 4월 서울대는 학원자율화 문제와 동아일보의 언론자유 문제로 인해 학생총회와 시위가 벌어지고, 자유성토대회 3번째 연사로 등장한 김상진 동지가 양심선언문을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몇 차례의 박수가 터져 나왔고 끝부분의 ‘이 보잘것없는 생명, 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 다음, 원문과는 달리 ‘나의 앞으로의 행동에 대해서 여러분은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완전한 이성을 되찾아서 우리가 해야 할 바를 갖다가 명실상부하게…’에 이르러 20cm가량의 과도를 품안에서 끄집어내어 할복을 하였다.
- 1968년 보성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축산과 입학
- 1968년 6월 이념 서클 ‘한얼’에 가입
- 1971년 가을 군입대
- 1974년 가을학기에 4학년 1학기 복학
- 1975년 2월 박정희 정권은 자신이 약속했던 구속학생과 교수들의 복학, 복직을 불허하고 극심한 언론탄압을 일삼음. 이에 4월 11일 서울대 농대 교정에서 있었던 연행학생에 대한 석방을 요구하는 자유성토대회에서 3번째 연사로 등장하여 양심선언문 낭독후 할복자결. 그러나 서울대생 1,000여명은 긴급조치 9호 선포 등의 탄압에도 `김상진 동지 장례식`을 거행하고 대규모 시위를 벌임
- 4월 12일 서울 의대 이송 도중 운명
- 제 8차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인정자
’68년 서울대 농대에 합격하여 대학생활 중 이념써클 ‘한얼’에 가입하여 문학과, 사회사상을 체계적으로 공부하며 많은 책을 읽고 토론하는 등 사회에 대한 남다른 시각을 갖고 실천하게 된다. ’75년 4월 서울대는 학원자율화 문제와 동아일보의 언론자유 문제로 인해 학생총회와 시위가 벌어지고, 자유성토대회 3번째 연사로 등장한 김상진 동지가 양심선언문을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몇 차례의 박수가 터져 나왔고 끝부분의 ‘이 보잘것없는 생명, 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 다음, 원문과는 달리 ‘나의 앞으로의 행동에 대해서 여러분은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완전한 이성을 되찾아서 우리가 해야 할 바를 갖다가 명실상부하게…’에 이르러 20cm가량의 과도를 품안에서 끄집어내어 할복을 하였다.
75년 4월 학원자율화 문제와 동아일보의 언론자유 문제로 인해 학생총회와 시위가 벌어지고, 4월2일에 이르러서는 박정희정권의 온갖 죄악이 농과대학 학생회 명의의 선언문에 낱낱이 고발되어 학내 분위기는 고양되었다. 그러다가 4월3일 3백여명의 시위대열이 가두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학생회장 황연수군과 축산과 4년 김명섭군이 연행되었다. 이에 분노한 축산과 학생들은 연행학생 석방을 위해 학장, 총장에게 공개장을 발송하고 이것이 거부되면 4월10일자로 단식에 들어가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학교당국은 4월10일이 되어 단식을 연기하고 자제할 것을 종용하여 이에 학생들은 하루를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막상 11일이 닥쳤어도 분명한 대답을 하지 않는 학교당국의 모습 속에 일단 과대표회의를 열어 월요일까지로 연기하기로 했으나 3백여 명의 학생들은 해산하지 않고 자유성토대회를 시작했다. 자유성토대회 3번째 연사로 등장한 김상진 동지는 ‘양심선언문’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양심선언문을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몇 차례의 박수가 터져 나왔고 끝부분의 ‘이 보잘것없는 생명, 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다음 원문과는 달리 ‘나의 앞으로의 행동에 대해서 여러분은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완전한 이성을 되찾아서 우리가 해야 할 바를 갖다가 명실상부하게.....’에 이르러 20cm가량의 과도를 품안에서 끄집어내어 할복을 하였다. 평소 동지가 가깝게 지냈던 학우 너댓명이 김동지를 택시에 태우기까지 “애국가를 불러달라”는 그의 요청에 따라 애국가를 불러주었고, 택시에 올랐을 때는 이미 의식불명의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수원도립병원에서 약 1시간동안 하복부 하강정맥을 잇는 수술을 받았으나 이미 소생이 어려웠고 이튿날 아침 8시경 서울대 의대부속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구급차 속에서 운명했다.
동지가 남긴 글
<양 심 선 언 문>
더 이상 우리는 어떻게 참을 수 있으며 더 이상 우리는 그들에게서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어두움이 짙게 덮힌 저 사회의 음울한 공기를 헤치고 죽음의 전령사가 서서히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을 우리는 직시하고 있다.
무엇을 망설이고 무엇을 생각할 여유가 있단 말인가?
대학은 휴강의 노예가 되고, 교수들은 정부의 대변자가 되어가고, 어미닭을 잃은 병아리마냥 우리들의 반응없는 울부짖음만 토하고 있다. 우리의 주장이 결코 그릇됨이 아닐진대, 우리의 주장이 결코 비양심이 아닐진대, 우리는 어떻게 더 이상 자존을 짓밟혀 불명예스런 삶을 계속할 것인가? 우리를 대변한 동지들은 차가운 시멘트 바닥위에 신음하고 있고, 무고한 백성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가고 있다.
민주주의란 나무는 피를 먹고 살아간다고 한다. 들으라! 동지여! 우리의 숭고한 피를 흩뿌려 이 땅에 영원한 민주주의의 푸른 잎사귀가 번성하도록 할 용기를 그대들은 주저하고 있는가! 들으라! 우리는 유신헌법의 잔인한 폭력성을, 합법을 가장한 유신 헌법의 모든 부조리와 악을 고발한다. 우리는 유신헌법의 비민주적 허위성을 고발한다. 우리는 유신헌법의 자기중심적 이기성을 고발한다.
학우여!
아는가! 민주주의는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라는 것을. 금일 우리는 어제를 통탄하기 전에, 내일을 체념하기 전에, 치밀한 이성과 굳은 신념으로 이 처참한 일당독재의 아성을 향해 불퇴진의 결의로 진격하자. 민족사의 새날은 밝아오고 있다. 그 누가 이 날의 공포와 혼란에 노략질 당하길 바라겠는가. 우리 대한학도는 민족과 역사 앞에 분연히 선언한다. 이 정권이, 끝날 때까지 회개치 못하고 이 민족을 끝까지 못살게 군다면 자유와 평등과 정의를 뜨겁게 외치는 이 땅의 모든 시민의 준열한 피의 심판을 면치 못하리라. 역사는 이러한 사태를 원치 않으나 우리는 하나가 무너지고 또 무너지더라도 무릎 꿇고 사느니 차라리 서서 죽을 것임을 재천명한다.
탄압과 기만의 검은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라. 우리는 이제 자유와 평등의 민주 사회를 향한 결단의 깃발을 내걸어 일체의 정치적 자유를 질식시키는 공포의 병영국가가 도래했음을 민족과 역사 앞에 고발코자 한다. 이것이 민족과 역사를 위하는 길이고, 이것이 우리의 사랑스런 조국의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길이며, 이것이 영원한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길이라면 이 보잘것없는 생명 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 저 지하에선 내 영혼에 눈이 뜨여 만족스런 웃음 속에 여러분의 진격을 지켜보리라. 그 위대한 승리가 도래하는 날! 나! 소리 없는 뜨거운 갈채를 만천하에 울리게 보낼 것이다.]
1975. 4. 11
서울농대 축산과 4년 김상진
추모시
아아, 김상진
기인 겨울
얼음 뚫고 흐르는 맑은 한줄기
시냇물 소리여
그대 죽음이여
여윈 나무가지마다
눈보라에도 움트는 저 애잔한
푸르름이여
검은 총구에 꽂혀진
한떨기 붉은 철쭉꽃의 눈부심이여
그대 죽음이여
두려움에 얼어붙은 가슴들을 찢어
선혈로 들끓게 함이여
돌이 된 혀를 칼로 쳐
빈하늘 말씀의 폭풍으로 가득히 채움이여
탄식마저 성난 파도되어
잿빛 거리로 거리로 휩쓸어오게 함이여
그대 죽음이여
꽃일 적에 아리따이
흰 이슬 더불어 단 한 번 죽어
세세에 끝없이 피어나 저 푸른 대지의 꽃바다로 영생할 그대 죽음의
오묘한 뜻이여
죽어 비로소 삶이여
버림으로써 얻음이여
결단함으로써 자유의 이름이여
땅에 더불어 하늘을 모심이여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인간과 더불어 삶이여
우리 모두 삶의 외줄기 저 새 하얀 외로운 길이여
불꽃이여
그대의 죽음이여
아아 김상진!
아아 김상진!
비겁이 지배하는 우리 가슴에
용기를 주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우리 마음에
슬기를 주었다
분열이 잦은 우리 전열에
단결을 주었다
좌절에 빠진 동지에게
희망을 주었다
압제가 판치는 이 나라에
자유의 종소리가 되었다
총칼이 번뜩이는 저 거리에
평화의 꽃다발이 되었다
아아, 김상진!
아아, 김상진!
굶주림에 허덕이는 이웃들에게
충족된 생존으로!
절망에 질식당한 형제들에게
축복된 나날로!
모든 어둠 위에 빛으로!
온갖 부정 위에 심판대로!
일체의 마귀 위에 회초리로!
방황엔 나침반으로!
실의엔 광명으로!
폭정, 부패, 독선, 압박과 착취와 기만의
악마 현정권에게 폭풍으로!
이 어둡고 가난한 나라 곳곳에 이 힘없고
의지할 곳 없는 우리들 가슴 가슴에, 손과 손에
파도로! 함성으로! 해방의 불기둥으로
부디부디
아아! 님아 돌아오소서.
1975년 4월 24일 민주회복국민회의
양심선언문을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몇 차례의 박수가 터져 나왔고 끝부분의 ‘이 보잘것없는 생명, 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다음 원문과는 달리 ‘나의 앞으로의 행동에 대해서 여러분은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완전한 이성을 되찾아서 우리가 해야 할 바를 갖다가 명실상부하게.....’에 이르러 20cm가량의 과도를 품안에서 끄집어내어 할복을 하였다. 평소 동지가 가깝게 지냈던 학우 너댓명이 김동지를 택시에 태우기까지 “애국가를 불러달라”는 그의 요청에 따라 애국가를 불러주었고, 택시에 올랐을 때는 이미 의식불명의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수원도립병원에서 약 1시간동안 하복부 하강정맥을 잇는 수술을 받았으나 이미 소생이 어려웠고 이튿날 아침 8시경 서울대 의대부속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구급차 속에서 운명했다.
동지가 남긴 글
<양 심 선 언 문>
더 이상 우리는 어떻게 참을 수 있으며 더 이상 우리는 그들에게서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어두움이 짙게 덮힌 저 사회의 음울한 공기를 헤치고 죽음의 전령사가 서서히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을 우리는 직시하고 있다.
무엇을 망설이고 무엇을 생각할 여유가 있단 말인가?
대학은 휴강의 노예가 되고, 교수들은 정부의 대변자가 되어가고, 어미닭을 잃은 병아리마냥 우리들의 반응없는 울부짖음만 토하고 있다. 우리의 주장이 결코 그릇됨이 아닐진대, 우리의 주장이 결코 비양심이 아닐진대, 우리는 어떻게 더 이상 자존을 짓밟혀 불명예스런 삶을 계속할 것인가? 우리를 대변한 동지들은 차가운 시멘트 바닥위에 신음하고 있고, 무고한 백성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가고 있다.
민주주의란 나무는 피를 먹고 살아간다고 한다. 들으라! 동지여! 우리의 숭고한 피를 흩뿌려 이 땅에 영원한 민주주의의 푸른 잎사귀가 번성하도록 할 용기를 그대들은 주저하고 있는가! 들으라! 우리는 유신헌법의 잔인한 폭력성을, 합법을 가장한 유신 헌법의 모든 부조리와 악을 고발한다. 우리는 유신헌법의 비민주적 허위성을 고발한다. 우리는 유신헌법의 자기중심적 이기성을 고발한다.
학우여!
아는가! 민주주의는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라는 것을. 금일 우리는 어제를 통탄하기 전에, 내일을 체념하기 전에, 치밀한 이성과 굳은 신념으로 이 처참한 일당독재의 아성을 향해 불퇴진의 결의로 진격하자. 민족사의 새날은 밝아오고 있다. 그 누가 이 날의 공포와 혼란에 노략질 당하길 바라겠는가. 우리 대한학도는 민족과 역사 앞에 분연히 선언한다. 이 정권이, 끝날 때까지 회개치 못하고 이 민족을 끝까지 못살게 군다면 자유와 평등과 정의를 뜨겁게 외치는 이 땅의 모든 시민의 준열한 피의 심판을 면치 못하리라. 역사는 이러한 사태를 원치 않으나 우리는 하나가 무너지고 또 무너지더라도 무릎 꿇고 사느니 차라리 서서 죽을 것임을 재천명한다.
탄압과 기만의 검은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라. 우리는 이제 자유와 평등의 민주 사회를 향한 결단의 깃발을 내걸어 일체의 정치적 자유를 질식시키는 공포의 병영국가가 도래했음을 민족과 역사 앞에 고발코자 한다. 이것이 민족과 역사를 위하는 길이고, 이것이 우리의 사랑스런 조국의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길이며, 이것이 영원한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길이라면 이 보잘것없는 생명 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 저 지하에선 내 영혼에 눈이 뜨여 만족스런 웃음 속에 여러분의 진격을 지켜보리라. 그 위대한 승리가 도래하는 날! 나! 소리 없는 뜨거운 갈채를 만천하에 울리게 보낼 것이다.]
1975. 4. 11
서울농대 축산과 4년 김상진
추모시
아아, 김상진
기인 겨울
얼음 뚫고 흐르는 맑은 한줄기
시냇물 소리여
그대 죽음이여
여윈 나무가지마다
눈보라에도 움트는 저 애잔한
푸르름이여
검은 총구에 꽂혀진
한떨기 붉은 철쭉꽃의 눈부심이여
그대 죽음이여
두려움에 얼어붙은 가슴들을 찢어
선혈로 들끓게 함이여
돌이 된 혀를 칼로 쳐
빈하늘 말씀의 폭풍으로 가득히 채움이여
탄식마저 성난 파도되어
잿빛 거리로 거리로 휩쓸어오게 함이여
그대 죽음이여
꽃일 적에 아리따이
흰 이슬 더불어 단 한 번 죽어
세세에 끝없이 피어나 저 푸른 대지의 꽃바다로 영생할 그대 죽음의
오묘한 뜻이여
죽어 비로소 삶이여
버림으로써 얻음이여
결단함으로써 자유의 이름이여
땅에 더불어 하늘을 모심이여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인간과 더불어 삶이여
우리 모두 삶의 외줄기 저 새 하얀 외로운 길이여
불꽃이여
그대의 죽음이여
아아 김상진!
아아 김상진!
비겁이 지배하는 우리 가슴에
용기를 주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우리 마음에
슬기를 주었다
분열이 잦은 우리 전열에
단결을 주었다
좌절에 빠진 동지에게
희망을 주었다
압제가 판치는 이 나라에
자유의 종소리가 되었다
총칼이 번뜩이는 저 거리에
평화의 꽃다발이 되었다
아아, 김상진!
아아, 김상진!
굶주림에 허덕이는 이웃들에게
충족된 생존으로!
절망에 질식당한 형제들에게
축복된 나날로!
모든 어둠 위에 빛으로!
온갖 부정 위에 심판대로!
일체의 마귀 위에 회초리로!
방황엔 나침반으로!
실의엔 광명으로!
폭정, 부패, 독선, 압박과 착취와 기만의
악마 현정권에게 폭풍으로!
이 어둡고 가난한 나라 곳곳에 이 힘없고
의지할 곳 없는 우리들 가슴 가슴에, 손과 손에
파도로! 함성으로! 해방의 불기둥으로
부디부디
아아! 님아 돌아오소서.
1975년 4월 24일 민주회복국민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