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병곤 선생 33주기 추모제
○ 일 시: 2023년 12월 3일(일) 낮 12시 30분
○ 장 소: 김병곤 추모조형물 앞(김해 시민의 종 부근, 경남 김해시 가야의길 154)
○ 일 시: 2023년 12월 3일(일) 낮 12시 30분
○ 장 소: 김병곤 추모조형물 앞(김해 시민의 종 부근, 경남 김해시 가야의길 154)
행사 정보
일요일
2023-12-03
경남 김해시 가야의길 154
지도에서 보기
인물 정보
김병곤(당시 37세)
1953년 경상남도 김해 출생
1971년 2월 부산고등학교 졸업
1971년 3월 서울대학교 상대 입학
1973년 유신반대 시위로 첫 구속
19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사형선고
1984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가입
1985년 민민투사건으로 구속
1987년 구로구청 사건으로 구속(투쟁지도부 상황실장)
1990년 12월 6월 위궤양 및 위암3기로 오랜 투병 생활 끝에 운명
1971년 2월 부산고등학교 졸업
1971년 3월 서울대학교 상대 입학
1973년 유신반대 시위로 첫 구속
19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사형선고
1984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가입
1985년 민민투사건으로 구속
1987년 구로구청 사건으로 구속(투쟁지도부 상황실장)
1990년 12월 6월 위궤양 및 위암3기로 오랜 투병 생활 끝에 운명
1974년 4월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사건으로 군사법정에서 이철, 유인태, 김지하 등과 함께 21세의 가장 어린나이로 구속되어 사형이 구형되었으나 김병곤 동지는 최후진술 첫마디에서 사형이 구형된 것에 대해 ‘영광입니다’라고 외침으로써 많은 감동을 주었다. 1987년 12월 구로구청사건으로 구속되어 교도소 생활을 하던 중 건강에 이상을 느껴 교도소와의 싸움 끝에 외래진료를 받았으나 진행성 위암3기로 판명되어 88, 89년 두차례의 수술을 받았으나 1990년 12월6일 오랜 투병생활 끝에 그토록 바라던 민주세상을 보지 못한 채 운명하였다.
동지를 생각하며
김병곤 동지는 무엇보다도 조직운동의 중요성에 대해 실천을 통해 모범을 보이셨다. 김병곤 동지의 삶과 투쟁은 지배세력의 입장에서 보기엔 미운짓만 골라서 한 셈이고, 이로 인해 매 사건마다 단순한 사안인 경우에도 장기복역 등의 보복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특히 구로구청 사건때에는 85년 7월에 구속되어 출옥한지 5개월도 안되는 시점이었고, 본인이 내색은 안했지만 결국은 이것이 육체적, 정신적인 과부하가 되어 불치의 병의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병곤 동지가 우리에게 더욱 감동을 준 것은 의연한 투병과정에서였다. 현대의학으로서는 치유 불능이라는 사실상의 사형선고를 받고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투병을 이 사회의 구조악, 죽음의 세력과의 싸움으로, 그리고 이시대 민중들의 아픔과 함께 하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끝까지 의연함을 잃지 않으셔서 문병간 사람들이 오히려 위로받고 오는 일이 많았다. 세계의 역사나 우리의 역사에서 볼 때 부정, 불의한 사회를 변혁하려는 투쟁이 절대 실패할 수 없는 양호한 기회와 조건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고, 객관적인 조건의 한계를 지적하는 결정론적 사고 속에서도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불가능의 신화에 도전하는, 그리하여 일시적, 부분적 패배속에서도 운동을 전진시키고 역사를 바꾸는 힘과 밑거름이 되어 왔던 것이 인간의 능동적인 실천, 민중의 끊임없는 투쟁이었다 할 때, 김병곤 동지의 의연한 삶과 투병과정은 바로 민중의 투쟁의지와 정신적인 기상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처럼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의연히 최선을 다한 동지야말로 진정 ‘불가항력’을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할 것이며, 이것이 오늘 살아있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추모시
문익환
김병곤 동지여
나는 그대가 눈을 감고 영영 우리 곁을 떠났다는
비보를 듣고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인정많은 그대, 사랑하는 아내와
두 딸을 남기고 어찌 눈을 감을 수 있었습니까?
친형제 이상으로 아끼고 사랑하던 동지들 곁을 어찌
그리도 어이없이 떠나셨습니까?
그대의 초인적 투병
그것은 그냥 투병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분단과 독재와 빈곤과 사회악과 맞대결하는
그대의 그 치열한 싸움
우리 모두의 싸움은 이제 최후의 승리 일보직전입니다.
길고도 먼 우리의 투쟁
헛되지 않아 드디어 민족의 비원 통일이
소원도 가능성도 아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현실이 되었다는 말 들으며
그대의 눈은 승리의 기쁨으로 일렁였습니다.
그 눈빛,
서해에 지는 해의 아름다움이 이니었습니다.
그것은 동해 바다에서 치솟는 아침해의
승리였습니다.
동지여
우리의 승리여
평화의 찬가로 길이 온누리에
울려 퍼지거라.
동지를 생각하며
김병곤 동지는 무엇보다도 조직운동의 중요성에 대해 실천을 통해 모범을 보이셨다. 김병곤 동지의 삶과 투쟁은 지배세력의 입장에서 보기엔 미운짓만 골라서 한 셈이고, 이로 인해 매 사건마다 단순한 사안인 경우에도 장기복역 등의 보복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특히 구로구청 사건때에는 85년 7월에 구속되어 출옥한지 5개월도 안되는 시점이었고, 본인이 내색은 안했지만 결국은 이것이 육체적, 정신적인 과부하가 되어 불치의 병의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병곤 동지가 우리에게 더욱 감동을 준 것은 의연한 투병과정에서였다. 현대의학으로서는 치유 불능이라는 사실상의 사형선고를 받고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투병을 이 사회의 구조악, 죽음의 세력과의 싸움으로, 그리고 이시대 민중들의 아픔과 함께 하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끝까지 의연함을 잃지 않으셔서 문병간 사람들이 오히려 위로받고 오는 일이 많았다. 세계의 역사나 우리의 역사에서 볼 때 부정, 불의한 사회를 변혁하려는 투쟁이 절대 실패할 수 없는 양호한 기회와 조건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고, 객관적인 조건의 한계를 지적하는 결정론적 사고 속에서도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불가능의 신화에 도전하는, 그리하여 일시적, 부분적 패배속에서도 운동을 전진시키고 역사를 바꾸는 힘과 밑거름이 되어 왔던 것이 인간의 능동적인 실천, 민중의 끊임없는 투쟁이었다 할 때, 김병곤 동지의 의연한 삶과 투병과정은 바로 민중의 투쟁의지와 정신적인 기상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처럼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의연히 최선을 다한 동지야말로 진정 ‘불가항력’을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할 것이며, 이것이 오늘 살아있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추모시
문익환
김병곤 동지여
나는 그대가 눈을 감고 영영 우리 곁을 떠났다는
비보를 듣고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인정많은 그대, 사랑하는 아내와
두 딸을 남기고 어찌 눈을 감을 수 있었습니까?
친형제 이상으로 아끼고 사랑하던 동지들 곁을 어찌
그리도 어이없이 떠나셨습니까?
그대의 초인적 투병
그것은 그냥 투병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분단과 독재와 빈곤과 사회악과 맞대결하는
그대의 그 치열한 싸움
우리 모두의 싸움은 이제 최후의 승리 일보직전입니다.
길고도 먼 우리의 투쟁
헛되지 않아 드디어 민족의 비원 통일이
소원도 가능성도 아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현실이 되었다는 말 들으며
그대의 눈은 승리의 기쁨으로 일렁였습니다.
그 눈빛,
서해에 지는 해의 아름다움이 이니었습니다.
그것은 동해 바다에서 치솟는 아침해의
승리였습니다.
동지여
우리의 승리여
평화의 찬가로 길이 온누리에
울려 퍼지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