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여운형 선생 76주기 추모제
○ 일 시: 2023년 7월 19일(수) 오전 11시
○ 장 소: 우이동 묘소(서울시 강북구 우이동 106번지)
행사 정보
수요일
2023-07-19
인물 정보
여운형
- 1886 4월22일(음력)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꼴 출생.
- 1900 배재학당 입학.
- 1901 흥화학당으로 전학.
- 1903 흥화학당 중퇴, 통신원 부설 우무학당(郵務學堂)에 입학.
- 1907 사립 기독교 학교인 광동학교 설립. 양평에서 국채보상운동 지회를 설립.
- 1908 부친 탈상 후 집안의 노비 해방시킴. 기독교 입교. 장로교 C. H. 클라크 (곽안련) 목사의 조수(전도사)가 됨.
- 1910 강릉 초당의숙에 교사로 초빙되다.
- 1911 평양의 장로교회연합 신학교 입학.
- 1913 신흥무관학교를 비롯한 서간도 각지를 순방하며 조국 광복의 웅지를 품다.
- 1914 중국 남경 금릉대학 영문과 입학.
- 1917 금릉대학 졸업후 상해로 가서 협화서국에 취직, 동포 자제들의 구미유학과 도항절차 알선에 주력. <자림보>기자 진한명(陳漢明)의 소개로 손문을 처음 만남.
- 1918 상해 고려민친목회 총무.
- 1918 11월, 장덕수와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를 미국 대통령 특사 찰스 크레인과 상해 영자신문 사장 밀러드에게 전달.
- 1919 한국 최초의 현대정당인 신한청년당을 조직.
- 1919 1월, 김규식(金奎植)을 파리강화회의 파견대표로 결정. 이와 함께 김철, 장
덕수 등을 국내와 일본에 파견, 파리강화회의에 조선대표를 파견한다는 사실과 독립운동 전반에 관한 의견을 전달. 이 시기, 여운형 자신은 간도 시베리아 방면을 순회하며 각처 독립운동 지도자들에게 파리강화회의에 조선대표를 파견했다는 사실을 알림.
- 1919 2월, 이 소식에 고무된 동경유학생들이 <2.8 독립선언>을 발표.
- 1919 3월, 조선대표가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었다는 소식에 고무된 국내 지도자들이 거족적으로 3.1운동을 일으킴. (이 불씨는 결과적으로 몽양이 지핀 것임)
- 1919 4월, 지금까지의 독립운동 근거지는 만주였으나, 몽양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한 이후 각지의 지도자들은 몽양이 있는 상해로 집결함. 여기서 이곳 터줏대감이던 몽양이 사실상 이들 망명자들을 물심양면으로 뒷바 라지하며, 뒤이어 이들에 의해 상해임정이 탄생하게 됨. 그러나 당시 몽양은 아직 30대 초반의 청년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명망가들이 큰 감투를 차지하고, 몽양은 외무부 차장에 취임하게 됨. 같은 해, 상해 교민단장으로 활동하면서 교포자제들에게 독립사상과 애국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인성학교(仁成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함.
- 1919 11월, 일본 수상 하라 다카시(原敬)의 초청으로 장덕수, 최근우, 신상완 등과 함께 적의 심장부인 동경을 방문, 일본 고위관리들과 수차례 회담하여 조선자치제 안을 공박하고 즉시독립을 주창. 특히 <제국호텔>의 사자후 연설은 유명함.
- 1919 12월, 상해로 귀환, <독립신문>등에 일본 활동상이 대서특필되면서 광범한 여론을 불러일으킴.
- 1922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 대회운영 의장단에 선출, 개회식에서 연설함. 레닌을 두 차례 만나 조선 독립에 대한 방안을 논의함.
- 1922 3월, 상해로 돌아와 국민대표회의를 추진.
- 1922 10월, 김구, 손정도 등과 함께 한인노병회(韓人勞兵會) 조직.
- 1923 상해 동방대학(東方大學) 영문교수.
- 1925 북경주재 소련대사 카라한을 만나 중국혁명운동 동참을 요청받고 국공합작에 일조. 이 무렵 모택동과도 만남. 한편 손문의 권유로 중국 국민당에 입당.
- 1926 국민당군의 무한·삼진 점령시 20만 군중 앞에서 내빈으로 축사.
- 1928 상해 복단대학(復旦大學)에 취직. 체육담당으로 축구부와 함께 필리핀 등지로 원정여행. 마닐라에서 아시아민족의 단결을 주장하다 현지 경찰에 체포.
- 1929 7월, 상해 야구장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 국내로 압송.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 1932 출감. 7월, 총독부로부터 농촌진흥운동 지원을 요청받았으나 거절.
- 1933 <조선중앙일보> 사장.
- 1934 조선체육회 회장.
- 1935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묘소재건 추진. 조동하, 양하석을 해외로 탈출시키다 신의주사건에 연루되어 경찰 취조를 받음. 김구의 모친인 곽낙원 여사와 아들 김인, 김신 형제의 상해 탈출을 도와줌.
- 1936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말소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 자진폐간.
- 1939 이상백을 통해 임시정부와의 연계 시도.
- 1940 동경왕래(1942까지 5차례). 일본 수뇌부는 중국 모택동과 장개석 양쪽과 가까운 여운형의 특이한 존재를 이용하여 중일화평공작을 시도해보려고 했으나 몽양은 이를 거절. 그러나 이들과 회담하면서 몽양은 일제가 패망 할 것을 확신함.
- 1942 이정구에게 식량조사와 그 대책을, 그리고 장권에게는 치안대 조직에 대한 상세한 계획을 지시함.
- 1942 2월, 주변에 ‘일본이 패망한다’는 발언을 했다가 경성헌병대에 연행, 구속됨. 서대문형무소에서 건국에 대비한 결사체를 구상함.
- 1943 가출옥후 경성요양원에 입원. 여기서 조동호, 이상도, 이상백, 최흥국, 구소현, 전사옥 등과 <조선민족해방연맹> 조직을 결의하고, 중앙과 지방조직의 건설 준비작업 돌입.
- 1944 봉안에서 만군(滿軍)에 소속된 박승환 대위를 만나 군사조직 문제를 논의. 해방시 일본군에게 대항하려는 것이었음. 이와 함께 염윤구, 이혁기 등 학병·징병 거부자들을 집결시켜 군사훈련과 무장투쟁을 준비시킴.
- 1944 8월, 경성 경운정의 삼광한의원에서 <건국동맹>을 결성.
- 1944 10월, 용문산에서 농민동맹 결성. 보광당, 조선민족해방협동단, 산악대 등 여러 조직과 직간접 접촉을 통해 건국동맹의 기반을 다짐.
- 1945 3월, 건국동맹 산하에 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일본군의 후방교란과 노농군 편성을 계획. 경기도 주안 조병창의 채병덕 중좌와 두 차례 접촉, 유사시에 무기 공급에 대한 약속을 받음.
- 1945 4월, 샌프란시스코 회담과 관련해 연안 독립동맹과 구체적인 연계를 위해 이영선을 파견.
- 1945 5월, 임시정부와 접촉하기 위해 최근우를 북경에 파견.
- 1945 8월초, 건국동맹 간부 이걸소, 황운, 이석구, 조동호 등이 검거됨에 따라 최근우, 김세용, 이여성, 이상백, 김기용, 이만규 등을 중앙위원으로 선출.
- 1945 8. 15 엔도오 류우사쿠 정무총감을 만나 다섯 가지 요구조건을 내걸고 치안권을 위임 받음. 건국준비위원회 결성, 동 위원장에 취임.
- 1945 8. 16 건국치안대를 조직.
- 1945 8. 17 건준 1차 조직 완료.
- 1945 8. 22 건준 2차 조직 확대개편.
- 1945 9. 4 건준 3차 조직 개편.
- 1945 9. 6 전국인민대표자회의'에서 임시의장으로 선출됨.
- 1945 10. 5 군정장관 아놀드와 하지 중장 만남.
- 1945 10. 17 귀국한 이승만을 방문.
- 1945 10. 23 이승만 주도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참가.
- 1945 10월, 청년들이 주도한 좌우합작 수뇌회담에 참석.
- 1945 11. 12 조선인민당 결성. 이후 이승만, 김구와의 합작모색.
- 1945 12월,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서 탈퇴.
- 1946 2월, 이승만의 참모인 굿펠로우로부터 미군정 지문위원에 참여해줄 것을 권유받았으나, 이 자문위원회가 결국 친일파 일색의 민주의원으로 전환되자 즉시 탈퇴.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 민주주의민족전선 공동의장.
- 1946 5월, 미 국무성 지령으로 미군정이 주도한 좌우합작 운동에 김규식 박사와 함께 참여.
- 1946 7월, 좌우합작위원회 회담 참석.
- 1946 8월, 하지 사령관, 합작격려친서를 보냄. 인민당 당수직 사임.
- 1946 10월, 김규식과 만나 좌우합작 입법기구 문제 의견교환.
- 1946 11월, 또 다른 <민주의원>이 된 입법기구에 협조할 수 없다는 내용의 기 자회견.
- 1946 12월, 3당합당의 과정에서 극좌파에 시달린 몽양은 정계은퇴 의사를 신문 에 발표.
- 1947 4월, 제2차 미소공위의 성공 가능성이 높아지자, 몽양은 신당을 새로 결성 하기로 함.
- 1947 5월, 근로인민당 위원장.
- 1947 6월, 미소공위 협의규정에 따라 개최된 서울 합동회의에 참가, 통일 임시정부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통일전선 운동을 전개.
- 1947 7월, 서재필 박사 귀국 환영준비위원회 위원으로 인천항에 출영나감.
- 1947 7. 19. 혜화동 로터리에서 피살됨.(향년 62세)
- 1900 배재학당 입학.
- 1901 흥화학당으로 전학.
- 1903 흥화학당 중퇴, 통신원 부설 우무학당(郵務學堂)에 입학.
- 1907 사립 기독교 학교인 광동학교 설립. 양평에서 국채보상운동 지회를 설립.
- 1908 부친 탈상 후 집안의 노비 해방시킴. 기독교 입교. 장로교 C. H. 클라크 (곽안련) 목사의 조수(전도사)가 됨.
- 1910 강릉 초당의숙에 교사로 초빙되다.
- 1911 평양의 장로교회연합 신학교 입학.
- 1913 신흥무관학교를 비롯한 서간도 각지를 순방하며 조국 광복의 웅지를 품다.
- 1914 중국 남경 금릉대학 영문과 입학.
- 1917 금릉대학 졸업후 상해로 가서 협화서국에 취직, 동포 자제들의 구미유학과 도항절차 알선에 주력. <자림보>기자 진한명(陳漢明)의 소개로 손문을 처음 만남.
- 1918 상해 고려민친목회 총무.
- 1918 11월, 장덕수와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를 미국 대통령 특사 찰스 크레인과 상해 영자신문 사장 밀러드에게 전달.
- 1919 한국 최초의 현대정당인 신한청년당을 조직.
- 1919 1월, 김규식(金奎植)을 파리강화회의 파견대표로 결정. 이와 함께 김철, 장
덕수 등을 국내와 일본에 파견, 파리강화회의에 조선대표를 파견한다는 사실과 독립운동 전반에 관한 의견을 전달. 이 시기, 여운형 자신은 간도 시베리아 방면을 순회하며 각처 독립운동 지도자들에게 파리강화회의에 조선대표를 파견했다는 사실을 알림.
- 1919 2월, 이 소식에 고무된 동경유학생들이 <2.8 독립선언>을 발표.
- 1919 3월, 조선대표가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었다는 소식에 고무된 국내 지도자들이 거족적으로 3.1운동을 일으킴. (이 불씨는 결과적으로 몽양이 지핀 것임)
- 1919 4월, 지금까지의 독립운동 근거지는 만주였으나, 몽양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한 이후 각지의 지도자들은 몽양이 있는 상해로 집결함. 여기서 이곳 터줏대감이던 몽양이 사실상 이들 망명자들을 물심양면으로 뒷바 라지하며, 뒤이어 이들에 의해 상해임정이 탄생하게 됨. 그러나 당시 몽양은 아직 30대 초반의 청년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명망가들이 큰 감투를 차지하고, 몽양은 외무부 차장에 취임하게 됨. 같은 해, 상해 교민단장으로 활동하면서 교포자제들에게 독립사상과 애국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인성학교(仁成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함.
- 1919 11월, 일본 수상 하라 다카시(原敬)의 초청으로 장덕수, 최근우, 신상완 등과 함께 적의 심장부인 동경을 방문, 일본 고위관리들과 수차례 회담하여 조선자치제 안을 공박하고 즉시독립을 주창. 특히 <제국호텔>의 사자후 연설은 유명함.
- 1919 12월, 상해로 귀환, <독립신문>등에 일본 활동상이 대서특필되면서 광범한 여론을 불러일으킴.
- 1922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 대회운영 의장단에 선출, 개회식에서 연설함. 레닌을 두 차례 만나 조선 독립에 대한 방안을 논의함.
- 1922 3월, 상해로 돌아와 국민대표회의를 추진.
- 1922 10월, 김구, 손정도 등과 함께 한인노병회(韓人勞兵會) 조직.
- 1923 상해 동방대학(東方大學) 영문교수.
- 1925 북경주재 소련대사 카라한을 만나 중국혁명운동 동참을 요청받고 국공합작에 일조. 이 무렵 모택동과도 만남. 한편 손문의 권유로 중국 국민당에 입당.
- 1926 국민당군의 무한·삼진 점령시 20만 군중 앞에서 내빈으로 축사.
- 1928 상해 복단대학(復旦大學)에 취직. 체육담당으로 축구부와 함께 필리핀 등지로 원정여행. 마닐라에서 아시아민족의 단결을 주장하다 현지 경찰에 체포.
- 1929 7월, 상해 야구장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 국내로 압송.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 1932 출감. 7월, 총독부로부터 농촌진흥운동 지원을 요청받았으나 거절.
- 1933 <조선중앙일보> 사장.
- 1934 조선체육회 회장.
- 1935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묘소재건 추진. 조동하, 양하석을 해외로 탈출시키다 신의주사건에 연루되어 경찰 취조를 받음. 김구의 모친인 곽낙원 여사와 아들 김인, 김신 형제의 상해 탈출을 도와줌.
- 1936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말소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 자진폐간.
- 1939 이상백을 통해 임시정부와의 연계 시도.
- 1940 동경왕래(1942까지 5차례). 일본 수뇌부는 중국 모택동과 장개석 양쪽과 가까운 여운형의 특이한 존재를 이용하여 중일화평공작을 시도해보려고 했으나 몽양은 이를 거절. 그러나 이들과 회담하면서 몽양은 일제가 패망 할 것을 확신함.
- 1942 이정구에게 식량조사와 그 대책을, 그리고 장권에게는 치안대 조직에 대한 상세한 계획을 지시함.
- 1942 2월, 주변에 ‘일본이 패망한다’는 발언을 했다가 경성헌병대에 연행, 구속됨. 서대문형무소에서 건국에 대비한 결사체를 구상함.
- 1943 가출옥후 경성요양원에 입원. 여기서 조동호, 이상도, 이상백, 최흥국, 구소현, 전사옥 등과 <조선민족해방연맹> 조직을 결의하고, 중앙과 지방조직의 건설 준비작업 돌입.
- 1944 봉안에서 만군(滿軍)에 소속된 박승환 대위를 만나 군사조직 문제를 논의. 해방시 일본군에게 대항하려는 것이었음. 이와 함께 염윤구, 이혁기 등 학병·징병 거부자들을 집결시켜 군사훈련과 무장투쟁을 준비시킴.
- 1944 8월, 경성 경운정의 삼광한의원에서 <건국동맹>을 결성.
- 1944 10월, 용문산에서 농민동맹 결성. 보광당, 조선민족해방협동단, 산악대 등 여러 조직과 직간접 접촉을 통해 건국동맹의 기반을 다짐.
- 1945 3월, 건국동맹 산하에 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일본군의 후방교란과 노농군 편성을 계획. 경기도 주안 조병창의 채병덕 중좌와 두 차례 접촉, 유사시에 무기 공급에 대한 약속을 받음.
- 1945 4월, 샌프란시스코 회담과 관련해 연안 독립동맹과 구체적인 연계를 위해 이영선을 파견.
- 1945 5월, 임시정부와 접촉하기 위해 최근우를 북경에 파견.
- 1945 8월초, 건국동맹 간부 이걸소, 황운, 이석구, 조동호 등이 검거됨에 따라 최근우, 김세용, 이여성, 이상백, 김기용, 이만규 등을 중앙위원으로 선출.
- 1945 8. 15 엔도오 류우사쿠 정무총감을 만나 다섯 가지 요구조건을 내걸고 치안권을 위임 받음. 건국준비위원회 결성, 동 위원장에 취임.
- 1945 8. 16 건국치안대를 조직.
- 1945 8. 17 건준 1차 조직 완료.
- 1945 8. 22 건준 2차 조직 확대개편.
- 1945 9. 4 건준 3차 조직 개편.
- 1945 9. 6 전국인민대표자회의'에서 임시의장으로 선출됨.
- 1945 10. 5 군정장관 아놀드와 하지 중장 만남.
- 1945 10. 17 귀국한 이승만을 방문.
- 1945 10. 23 이승만 주도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참가.
- 1945 10월, 청년들이 주도한 좌우합작 수뇌회담에 참석.
- 1945 11. 12 조선인민당 결성. 이후 이승만, 김구와의 합작모색.
- 1945 12월,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서 탈퇴.
- 1946 2월, 이승만의 참모인 굿펠로우로부터 미군정 지문위원에 참여해줄 것을 권유받았으나, 이 자문위원회가 결국 친일파 일색의 민주의원으로 전환되자 즉시 탈퇴.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 민주주의민족전선 공동의장.
- 1946 5월, 미 국무성 지령으로 미군정이 주도한 좌우합작 운동에 김규식 박사와 함께 참여.
- 1946 7월, 좌우합작위원회 회담 참석.
- 1946 8월, 하지 사령관, 합작격려친서를 보냄. 인민당 당수직 사임.
- 1946 10월, 김규식과 만나 좌우합작 입법기구 문제 의견교환.
- 1946 11월, 또 다른 <민주의원>이 된 입법기구에 협조할 수 없다는 내용의 기 자회견.
- 1946 12월, 3당합당의 과정에서 극좌파에 시달린 몽양은 정계은퇴 의사를 신문 에 발표.
- 1947 4월, 제2차 미소공위의 성공 가능성이 높아지자, 몽양은 신당을 새로 결성 하기로 함.
- 1947 5월, 근로인민당 위원장.
- 1947 6월, 미소공위 협의규정에 따라 개최된 서울 합동회의에 참가, 통일 임시정부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통일전선 운동을 전개.
- 1947 7월, 서재필 박사 귀국 환영준비위원회 위원으로 인천항에 출영나감.
- 1947 7. 19. 혜화동 로터리에서 피살됨.(향년 6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