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형락 열사 38주기 추모제
○ 일 시: 2023년 6월 24일(토) 오전 10시 30분
○ 장 소: 마석 모란공원
행사 정보
토요일
2023-06-24
마석 모란공원
지도에서 보기
인물 정보
이형락
1931년 7. 19 경북 예천 출생
1946년 서울 상경후 서울 성도중학교 입학
민주학생연맹 활동
1950년 3. 1 서울시경에 의해 체포
1950년 6. 25 한국전쟁 발발한 시기 탈옥.
남로당 종로구 당원, 체신부 인쇄공장 지도원 활동
1956년 서울 여학생연맹 위원장 출신의 한기명님과 결혼.
1959년 대한노총의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국노협)결성에 참여.
1960년 4월 혁명후 대구로 와서 경북노동조합협의회 통계부장으로 활동.
1968년 7. 30 통혁당 관련자들의 검거로 피검.
한달여에 걸친 고문으로 ‘남조선해방전략당’ 조작
남조선해방전략당 지역조직책으로 사형을 구형받았으나 2심에서 10년형을
선고 받고 대전교도소 수감.
1978년 9. 6 만기출소. 보안관찰 대상.
80년 5월, 83년 대구미문화원폭파사건시 예비검속.
1985년 6. 24 고문후유증과 트라우마 등으로 스스로 유명을 달리 하심.
2014년 5.16 남조선해방전략당사건 재심무죄판결
1946년 서울 상경후 서울 성도중학교 입학
민주학생연맹 활동
1950년 3. 1 서울시경에 의해 체포
1950년 6. 25 한국전쟁 발발한 시기 탈옥.
남로당 종로구 당원, 체신부 인쇄공장 지도원 활동
1956년 서울 여학생연맹 위원장 출신의 한기명님과 결혼.
1959년 대한노총의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국노협)결성에 참여.
1960년 4월 혁명후 대구로 와서 경북노동조합협의회 통계부장으로 활동.
1968년 7. 30 통혁당 관련자들의 검거로 피검.
한달여에 걸친 고문으로 ‘남조선해방전략당’ 조작
남조선해방전략당 지역조직책으로 사형을 구형받았으나 2심에서 10년형을
선고 받고 대전교도소 수감.
1978년 9. 6 만기출소. 보안관찰 대상.
80년 5월, 83년 대구미문화원폭파사건시 예비검속.
1985년 6. 24 고문후유증과 트라우마 등으로 스스로 유명을 달리 하심.
2014년 5.16 남조선해방전략당사건 재심무죄판결
동지의 삶과 죽음
1931년 7월 19일 경북 예천에서 한의원을 하시던 부친 이종황님과 모친 김노익님 사이의 4남3녀 중 3남(다섯째)으로 태어나셨습니다.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시던 대쪽 같은 성품의 부친과 자상한 모친의 보살핌 속에 유복한 환경에서 유년기를 보내셨습니다.
약을 잘못 처방해서 사람이 상했다는 항의에 전 가산을 털어 보상한 후 부친이 세상을 뜨자 당시 교사생활을 하던 맏형(이대락)의 보살핌 아래에서 성장기를 보내며 사회주의사상에 눈뜨게 됩니다.
해방 후 맏형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15세 나이에 홀홀단신 상경, 서울 성도중학교에 입학하여 신문배달 등을 하며 학비를 벌어 고학하시면서 민주학생연맹 활동을 하고, 1950년 3월 1일 서울시경에 체포되어 학업을 중단하게 됩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한 시기에 탈옥하여 남로당 종로구 당원, 체신부 인쇄공장 지도원 등의 활동을 하셨습니다.
서울에서 여학생연맹 위원장 출신의 한기명님을 만나 1956년 결혼하여 슬하에 다섯 딸을 두셨습니다.
1959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산하 경북노협결성에 참여함
1960년 4월혁명이 일어나자 대구로 와서 경북노동조합협의회 통계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이 땅의 가난과 모순을 털어내기 위해서는 노동계급이 각성하고, 그들이 중심이 되어 사회를 변혁시켜 내야한다고 생각하고, 노동자 중심의 전위정당을 만들기 위한 많은 고민과 노력들을 기울였습니다.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 시기에는 초등학생이던 큰 딸을 데리고 몇 달간 피신을 다녀서 검거를 피하기도 했습니다.
아이들과 가족들에겐 늘 ‘사람도리’에 대해 말씀했으며, 자상하고 인간애가 깊어, 동냥 온 거지나 넝마주이도 그냥 보내는 법이 없었으며,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존중되어야한다고 자식들에게 몸으로 가르쳤습니다.
1968년 7월 30일 통혁당 관련자들의 검거로 피할 겨를 없이 피검되셨습니다.
한 달여에 걸친 모진 고문과 매질, 협박으로 ‘남조선해방전략당’이 만들어지고, 그 당의 지역조직책으로 만들어져 사형을 구형받았으나 2심에서 10년형 선고받고 10년간 대전교도소에서 영어의 생활하셨습니다.
1978년 9월 6일 만기 출소하였으나, 보안관찰 대상자로 돌아가실 때까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였으며 80년 5월에 한 번, 83년 대구미문화원 폭파사건 때 또 한 번, 예비검속으로 안기부에 잡혀가서 며칠씩 조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모진 고문과 매질의 후유증과 트라우마, 제대로 교육도 못시키고, 불구가 되기도 한 자식들에 대한 죄책감 등으로 결국 1985년 6월24일 쉰다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스스로 유명을 달리하시게 되었습니다.
2014년 5.16 남조선해방전략당사건 재심무죄판결
1931년 7월 19일 경북 예천에서 한의원을 하시던 부친 이종황님과 모친 김노익님 사이의 4남3녀 중 3남(다섯째)으로 태어나셨습니다.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시던 대쪽 같은 성품의 부친과 자상한 모친의 보살핌 속에 유복한 환경에서 유년기를 보내셨습니다.
약을 잘못 처방해서 사람이 상했다는 항의에 전 가산을 털어 보상한 후 부친이 세상을 뜨자 당시 교사생활을 하던 맏형(이대락)의 보살핌 아래에서 성장기를 보내며 사회주의사상에 눈뜨게 됩니다.
해방 후 맏형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15세 나이에 홀홀단신 상경, 서울 성도중학교에 입학하여 신문배달 등을 하며 학비를 벌어 고학하시면서 민주학생연맹 활동을 하고, 1950년 3월 1일 서울시경에 체포되어 학업을 중단하게 됩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한 시기에 탈옥하여 남로당 종로구 당원, 체신부 인쇄공장 지도원 등의 활동을 하셨습니다.
서울에서 여학생연맹 위원장 출신의 한기명님을 만나 1956년 결혼하여 슬하에 다섯 딸을 두셨습니다.
1959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산하 경북노협결성에 참여함
1960년 4월혁명이 일어나자 대구로 와서 경북노동조합협의회 통계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이 땅의 가난과 모순을 털어내기 위해서는 노동계급이 각성하고, 그들이 중심이 되어 사회를 변혁시켜 내야한다고 생각하고, 노동자 중심의 전위정당을 만들기 위한 많은 고민과 노력들을 기울였습니다.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 시기에는 초등학생이던 큰 딸을 데리고 몇 달간 피신을 다녀서 검거를 피하기도 했습니다.
아이들과 가족들에겐 늘 ‘사람도리’에 대해 말씀했으며, 자상하고 인간애가 깊어, 동냥 온 거지나 넝마주이도 그냥 보내는 법이 없었으며,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존중되어야한다고 자식들에게 몸으로 가르쳤습니다.
1968년 7월 30일 통혁당 관련자들의 검거로 피할 겨를 없이 피검되셨습니다.
한 달여에 걸친 모진 고문과 매질, 협박으로 ‘남조선해방전략당’이 만들어지고, 그 당의 지역조직책으로 만들어져 사형을 구형받았으나 2심에서 10년형 선고받고 10년간 대전교도소에서 영어의 생활하셨습니다.
1978년 9월 6일 만기 출소하였으나, 보안관찰 대상자로 돌아가실 때까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였으며 80년 5월에 한 번, 83년 대구미문화원 폭파사건 때 또 한 번, 예비검속으로 안기부에 잡혀가서 며칠씩 조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모진 고문과 매질의 후유증과 트라우마, 제대로 교육도 못시키고, 불구가 되기도 한 자식들에 대한 죄책감 등으로 결국 1985년 6월24일 쉰다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스스로 유명을 달리하시게 되었습니다.
2014년 5.16 남조선해방전략당사건 재심무죄판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