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주기 노수석 열사 추모의 밤
○ 일 시: 2023년 3월 29일(수) 오후 7시
○ 장 소: 연세대학교 백양누리 국제회의실 IBK기업은행홀
○ 일 시: 2023년 3월 29일(수) 오후 7시
○ 장 소: 연세대학교 백양누리 국제회의실 IBK기업은행홀
고 노수석 열사 27주기 추모제
○ 일 시: 2023년 4월 1일(토) 12시(정오)
○ 장 소: 광주 망월동 민주열사묘역
행사 정보
수요일
2023-03-29
~
토요일
2023-04-01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
지도에서 보기
인물 정보
노수석
- 1976년 11월 23일 광주 출생
- 1995년 광주대동고 졸업. 연세대학교 법학과 입학
- 1995년 법대 풍물패 ‘천둥’ 활동
- 1996년 3월 29일 등록금 인상저지와 교육재정확보를 위한 연세인 수업거부 총궐기 후에 김영삼 ‘대선자금 공개와 교육재정확보를 위한 서총련 결의대회’ 도중 경찰의 토끼몰이식 과잉폭력 진압에 의해 운명
- 제 81차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인정자
동지는 연세대학교에 입학하여 법대 풍물패 천둥 활동에 참여했다. 동지는 ’96년 3월 29일 종로5가에서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서총련) 주최로 열린 대선자금 공개와 교육재정확보를 위한 시위에 참가한 후 경찰에 쫓겨 달아나던 중 을지로 5가 인쇄골목에 있는 대현문화사 안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기던 중 숨을 거두었다. 종로 5가에서 5시 35분경부터 시작된 이날 시위는 매우 평화적으로 진행됐다. 학생들이 내세운 “대선자금 공개”, “등록금 인상저지”등의 구호는 전 국민적인 호응과 공감을 받고 있었고 학생들은 돌이나 화염병을 전혀 들지 않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시위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찰은 초반부터 강경진압으로 일관했고 시위대열이 형성되지 못하고 학생들이 일방적으로 쫓겨 다니는 양상으로 전개됐다. 특히 대열 내부에까지 백골단이 들어와 학생들을 무차별적으로 두들겨 패고, 352명이 연행되는 과정에서 많은 학생이 부상당했다. 당시 동지도 그 장소에서 피신 차 들어간 인쇄소 안에서 의식을 거의 잃어버린 상태가 되어 결국 운명하게 되었다. 동지의 시신에서는 경찰의 폭력으로 인한 상처들이 남아 있었다.
- 1995년 광주대동고 졸업. 연세대학교 법학과 입학
- 1995년 법대 풍물패 ‘천둥’ 활동
- 1996년 3월 29일 등록금 인상저지와 교육재정확보를 위한 연세인 수업거부 총궐기 후에 김영삼 ‘대선자금 공개와 교육재정확보를 위한 서총련 결의대회’ 도중 경찰의 토끼몰이식 과잉폭력 진압에 의해 운명
- 제 81차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인정자
동지는 연세대학교에 입학하여 법대 풍물패 천둥 활동에 참여했다. 동지는 ’96년 3월 29일 종로5가에서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서총련) 주최로 열린 대선자금 공개와 교육재정확보를 위한 시위에 참가한 후 경찰에 쫓겨 달아나던 중 을지로 5가 인쇄골목에 있는 대현문화사 안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기던 중 숨을 거두었다. 종로 5가에서 5시 35분경부터 시작된 이날 시위는 매우 평화적으로 진행됐다. 학생들이 내세운 “대선자금 공개”, “등록금 인상저지”등의 구호는 전 국민적인 호응과 공감을 받고 있었고 학생들은 돌이나 화염병을 전혀 들지 않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시위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찰은 초반부터 강경진압으로 일관했고 시위대열이 형성되지 못하고 학생들이 일방적으로 쫓겨 다니는 양상으로 전개됐다. 특히 대열 내부에까지 백골단이 들어와 학생들을 무차별적으로 두들겨 패고, 352명이 연행되는 과정에서 많은 학생이 부상당했다. 당시 동지도 그 장소에서 피신 차 들어간 인쇄소 안에서 의식을 거의 잃어버린 상태가 되어 결국 운명하게 되었다. 동지의 시신에서는 경찰의 폭력으로 인한 상처들이 남아 있었다.
노수석 동지는 96년 3월 29일 종로5가에서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서총련) 주최로 열린 대선자금 공개와 교육재정확보를 위한 시위에 참가한 후 경찰에 쫓겨 달아나던 중 을지로 5가 인쇄골목에 있는 대현문화사 안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기던 중 숨을 거두었다.
종로 5가에서 5시 35분경부터 시작된 이날 시위는 초반부터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대열이 형성되지 못하고 학생들이 일방적으로 쫓겨 다니는 양상으로 전개됐다. 특히 대열 내부에까지 백골단이 들어와 학생들을 무차별적으로 두들겨 패고, 3백52여명이 연행되는 과정에서 많은 학생이 부상당했다. 이날 가장 많은 연행과 구타가 자행된 을지로 5가 천지호텔 주변 인쇄골목 앞은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으며, 주변에 있던 시민들이 경찰에게 강력하게 항의하고 연행당하는 학생들을 일부 구해내기도 했다. 당시 노수석 동지도 그 장소에서 피신차 들어간 인쇄소 안에서 의식을 거의 잃어버린 상태가 되어 결국 운명하게 되었다.
동지를 생각하며
봄 부르는 비에 가슴 열며 너와 나는
‘교육재정 확보, 대선자금 공개’
힘차게 거리를 흔들며 나섰다
그러나 기다렸다는 듯
죽음의 꽃샘추위 밀어닥쳐
우리를, 너를 마구 몰아부쳐
흡사 전쟁터처럼
나와 너는 골목골목을 내달렸지만
끝까지 쫓아오던 무리, 무리들
아! 그만 너의 손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동지가 남긴 글
낙서장에서
11. 11.
1학기때는 천둥에 적응이 안되었는데 지금은 천둥인이 되어가는 것 같다. 그러나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는 나를 볼 때 다른 천둥인들을 보기가 부끄러울 때도 많다. 고등학교때까지는 학교에 갔다가 집에 오고 공부해야할 때는 공부하고 할 일 없을 때는 놀고 고민이라고는 성적 떨어졌을 때 고작 해보았던 것같다. 물론 몸이 피곤할 때는 많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예전에 느끼지 못한 나의 문제점들이 너무 많이 보인다. 그래서 고민도 많이 해보았고 괴롭기도 하다.
항상 웃고 다니고 긍정적, 낙관적으로 살았던 나의 모습을 되찾고 싶다. 나 이외의 세상의 다른 문제들에 좀 더 진지해지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힘이 든다. 지금까지의 나의 생각, 굳어진 나의 성격, 생활을 바꾸기가.
그래 좀 더 적극적으로 살자. 세상의 많은 일들을 의의있는 것으로 보도록 노력하자. 다른 사람에게 내가 먼저 다가가자. 뒷날 변화된 나의 모습으로 지금의 나의 모습을 돌이켜볼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
<천둥방 낙서장에서 노수석 동지의 글>
추모시
너는 먼저 강이 되었으니
대선자금 공개와 등록금 인상 반대의 집회에서 수석이가 죽었다.
수석아
다음날에 알게된 너의 이름을 부른다.
수석이를 살려달라는 절규, 높기만 한 거리에서
네가 죽었다고 유인물 한 장 건네며
지나가는 이들의 옷깃을 하염없이 붙드는 것밖에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역사는 강이 되어 흐르고
엇갈린 물줄기 어느새 하나로 만나는 길목을 향해 소리없이 흐르고
봄꽃보다 애띤 스무살의 나이로
봄꽃이 다 피어오르기도 전에 쓰러져간 너를 부른다.
들것에 실려 동지들 손으로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겨지는
너의 시신은 신문지 조각마다에 인쇄되어 있는데
더운 피로 맥박치는 네 손목 꼭 잡아볼 수 없는 오늘 너를 부른다.
너도 나처럼 너도 우리들처럼
설레는 가슴으로 새내기를 맞는
스무해 살아온 세상을 향해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수없이 맹세를 다지고
너를 보내는 오늘처럼 깃발 나부끼는 거리에서 어깨걸고
노래부르며
앞으로 걸어나가고 있었을텐데
어느 것에서인들 두 눈 편안히 감을 수 있을까
언제쯤이면 이렇게 가슴찢는 말들을 끌어올리지 않아도 될까
다시 한 번 피를 부르는 조국의 하늘에 찬비가 내리고
모순의 세상에서 태어나 차디차게 식어가는 너를 부른다.
주저앉아 통곡하며 너의 이름을 잊지 않으려.
수석아
너 먼저 봄길을 내었으니 그 길을 따라 달려간다.
꺾여 쓰러지는 걸음걸음 일으켜
오욕의 강 건너기 위해 너는 먼저 강이 되었으니
우리들 가슴에 새겨진 맹세가 되었으니
<故 노수석동지의 죽음 앞에서>
주위의 글
우리는 최근들어 경찰의 시위진압 방식과 장비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매일 길에서 만나는 경찰들의 방망이는 언제부터인지 군사독재시절 보다 훨신 커져 있었고 경찰들이 시위대를 다루는 방식도 거칠기 짝이 없었다. 결국 경찰의 폭력적 시위진압과 장비는 또 다시 이런 비극적 사건을 불러온 것이다. 이는 현정권이 겉으로는 문민을 내세우면서도 국민을 섬기려는 자세를 올바로 갖지 못한 오만과 독선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경찰력을 통해 정치적 반대자들에게 힘을 과시하고 국민들에게 군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참으로 불쌍한 생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식으로 국민을 억압했던 모든 권력들이 어떤 말로였는지를 똑똑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날 시위가 매우 평화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었고 학생들의 주장이 전국민들의 호응과 공감을 갖고 있는 “대선자금 공개” “등록금 인상저지”임에도 불구하고 경찰폭력은 어느 때보다도 무자비한 폭력성을 드러내고 있었다는 목격자들의 증언에 주목한다. 학생들은 돌이나 화염병을 전혀 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시위의 전개과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조건 강경진압으로 노군은 사망한 것이다. 이것은 그날 연행된 학생 숫자가 352명에 달하고 학생 다수가 부상했다는 사실이 입증하고 있다. 그러므로 노군의 시신에서 보인 상처들은 명백한 경찰 폭력의 증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전국 목회자 정의 평화 실천 협의회 성명서 中>
종로 5가에서 5시 35분경부터 시작된 이날 시위는 초반부터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대열이 형성되지 못하고 학생들이 일방적으로 쫓겨 다니는 양상으로 전개됐다. 특히 대열 내부에까지 백골단이 들어와 학생들을 무차별적으로 두들겨 패고, 3백52여명이 연행되는 과정에서 많은 학생이 부상당했다. 이날 가장 많은 연행과 구타가 자행된 을지로 5가 천지호텔 주변 인쇄골목 앞은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으며, 주변에 있던 시민들이 경찰에게 강력하게 항의하고 연행당하는 학생들을 일부 구해내기도 했다. 당시 노수석 동지도 그 장소에서 피신차 들어간 인쇄소 안에서 의식을 거의 잃어버린 상태가 되어 결국 운명하게 되었다.
동지를 생각하며
봄 부르는 비에 가슴 열며 너와 나는
‘교육재정 확보, 대선자금 공개’
힘차게 거리를 흔들며 나섰다
그러나 기다렸다는 듯
죽음의 꽃샘추위 밀어닥쳐
우리를, 너를 마구 몰아부쳐
흡사 전쟁터처럼
나와 너는 골목골목을 내달렸지만
끝까지 쫓아오던 무리, 무리들
아! 그만 너의 손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동지가 남긴 글
낙서장에서
11. 11.
1학기때는 천둥에 적응이 안되었는데 지금은 천둥인이 되어가는 것 같다. 그러나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는 나를 볼 때 다른 천둥인들을 보기가 부끄러울 때도 많다. 고등학교때까지는 학교에 갔다가 집에 오고 공부해야할 때는 공부하고 할 일 없을 때는 놀고 고민이라고는 성적 떨어졌을 때 고작 해보았던 것같다. 물론 몸이 피곤할 때는 많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예전에 느끼지 못한 나의 문제점들이 너무 많이 보인다. 그래서 고민도 많이 해보았고 괴롭기도 하다.
항상 웃고 다니고 긍정적, 낙관적으로 살았던 나의 모습을 되찾고 싶다. 나 이외의 세상의 다른 문제들에 좀 더 진지해지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힘이 든다. 지금까지의 나의 생각, 굳어진 나의 성격, 생활을 바꾸기가.
그래 좀 더 적극적으로 살자. 세상의 많은 일들을 의의있는 것으로 보도록 노력하자. 다른 사람에게 내가 먼저 다가가자. 뒷날 변화된 나의 모습으로 지금의 나의 모습을 돌이켜볼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
<천둥방 낙서장에서 노수석 동지의 글>
추모시
너는 먼저 강이 되었으니
대선자금 공개와 등록금 인상 반대의 집회에서 수석이가 죽었다.
수석아
다음날에 알게된 너의 이름을 부른다.
수석이를 살려달라는 절규, 높기만 한 거리에서
네가 죽었다고 유인물 한 장 건네며
지나가는 이들의 옷깃을 하염없이 붙드는 것밖에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역사는 강이 되어 흐르고
엇갈린 물줄기 어느새 하나로 만나는 길목을 향해 소리없이 흐르고
봄꽃보다 애띤 스무살의 나이로
봄꽃이 다 피어오르기도 전에 쓰러져간 너를 부른다.
들것에 실려 동지들 손으로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겨지는
너의 시신은 신문지 조각마다에 인쇄되어 있는데
더운 피로 맥박치는 네 손목 꼭 잡아볼 수 없는 오늘 너를 부른다.
너도 나처럼 너도 우리들처럼
설레는 가슴으로 새내기를 맞는
스무해 살아온 세상을 향해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수없이 맹세를 다지고
너를 보내는 오늘처럼 깃발 나부끼는 거리에서 어깨걸고
노래부르며
앞으로 걸어나가고 있었을텐데
어느 것에서인들 두 눈 편안히 감을 수 있을까
언제쯤이면 이렇게 가슴찢는 말들을 끌어올리지 않아도 될까
다시 한 번 피를 부르는 조국의 하늘에 찬비가 내리고
모순의 세상에서 태어나 차디차게 식어가는 너를 부른다.
주저앉아 통곡하며 너의 이름을 잊지 않으려.
수석아
너 먼저 봄길을 내었으니 그 길을 따라 달려간다.
꺾여 쓰러지는 걸음걸음 일으켜
오욕의 강 건너기 위해 너는 먼저 강이 되었으니
우리들 가슴에 새겨진 맹세가 되었으니
<故 노수석동지의 죽음 앞에서>
주위의 글
우리는 최근들어 경찰의 시위진압 방식과 장비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매일 길에서 만나는 경찰들의 방망이는 언제부터인지 군사독재시절 보다 훨신 커져 있었고 경찰들이 시위대를 다루는 방식도 거칠기 짝이 없었다. 결국 경찰의 폭력적 시위진압과 장비는 또 다시 이런 비극적 사건을 불러온 것이다. 이는 현정권이 겉으로는 문민을 내세우면서도 국민을 섬기려는 자세를 올바로 갖지 못한 오만과 독선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경찰력을 통해 정치적 반대자들에게 힘을 과시하고 국민들에게 군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참으로 불쌍한 생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식으로 국민을 억압했던 모든 권력들이 어떤 말로였는지를 똑똑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날 시위가 매우 평화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었고 학생들의 주장이 전국민들의 호응과 공감을 갖고 있는 “대선자금 공개” “등록금 인상저지”임에도 불구하고 경찰폭력은 어느 때보다도 무자비한 폭력성을 드러내고 있었다는 목격자들의 증언에 주목한다. 학생들은 돌이나 화염병을 전혀 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시위의 전개과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조건 강경진압으로 노군은 사망한 것이다. 이것은 그날 연행된 학생 숫자가 352명에 달하고 학생 다수가 부상했다는 사실이 입증하고 있다. 그러므로 노군의 시신에서 보인 상처들은 명백한 경찰 폭력의 증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전국 목회자 정의 평화 실천 협의회 성명서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