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류재을 열사 26주기 추모제
○ 일 시: 2023년 3월 18일(토) 오전 11시
○ 장 소: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
○ 장 소: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
행사 정보
토요일
2023-03-18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
지도에서 보기
인물 정보
류재을
- 1977년 11월 광주 출생
- 1990년 광주 장산 초등학교 졸업
- 1993년 광주 북성중학교 졸업
- 1996년 광주 광일 고등학교 졸업
- 1996년 조선대 행정학과 입학 과소모임 지방자치제 연구반 활동
- 1997년 지방자치제 연구회 분과장
- 1997년 3월 20일 시위 조선대학교에서 열린 '노동법 안기부법 날치기 통과, 한보비리 등 부정, 부패, 부도덕, 반민중, 폭력적인 김영삼 정권 규탄 남총련 집회' 참가, 사수대 활동 시위도중 시커먼 물체에 맞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바로 운명. 이후 한총련 차원으로 두달여의 장례투쟁 벌임. 당시 백골단은 쇠도리깨까지 동원해 시위를 진압함.
- 제 92차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인정자
동지는 ’96년 조선대에 입학해 과소모임인 지방자치제 연구반 활동을 했고, 이듬해 연구회 분과장으로 활동했다. 동지는 김영삼 정부의 총체적인 부정, 부패, 부도덕, 폭력성에 입각한 반민족 반민중 정권을 응징하기 위해 남총련 주최로 ’97년 3월 20일 오후 2시에 조선대에서 열린 개강선포식에 참가했다. 전경과 학생의 대치 중 녹두대에서 깃발을 들고 있던 동지가 후배에게 깃발을 넘긴 후 맨 앞에서 전경과 대치해 투석전을 전개하던 중, 시커먼 물체에 맞고 주춤거리며 뒤로 몇 발자국을 물러서다가 미끄러지듯 쓰러졌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운명했다. 그러나 사망원인에 대해 병원과 경찰 측은 심장쇼크로 인한 사망으로 발표했고 동지의 시신은 2개월 여간 장례식도 치르지 못한 채 영안실에 보관되었다. 이후 한총련은 ‘시위도중 사망 시인할 것. 몸에 칼을 대지 않는다는 전제로 모든 사인진상 규명을 위해 나설 것. 도청 노제를 비롯한 모든 장례행렬을 보장할 것. 검문, 원천봉쇄를 하지 말 것’을 요구하며 투쟁을 계속 전개했고 경찰 측은 시신에 대한 부검 없이는 장례식을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장례식을 방해했다. 결국 동지는 사망한 지 64일 만에 부모, 친지, 조선대 학우 7백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광주 망월동 묘지에 안장됐다.
- 1990년 광주 장산 초등학교 졸업
- 1993년 광주 북성중학교 졸업
- 1996년 광주 광일 고등학교 졸업
- 1996년 조선대 행정학과 입학 과소모임 지방자치제 연구반 활동
- 1997년 지방자치제 연구회 분과장
- 1997년 3월 20일 시위 조선대학교에서 열린 '노동법 안기부법 날치기 통과, 한보비리 등 부정, 부패, 부도덕, 반민중, 폭력적인 김영삼 정권 규탄 남총련 집회' 참가, 사수대 활동 시위도중 시커먼 물체에 맞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바로 운명. 이후 한총련 차원으로 두달여의 장례투쟁 벌임. 당시 백골단은 쇠도리깨까지 동원해 시위를 진압함.
- 제 92차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인정자
동지는 ’96년 조선대에 입학해 과소모임인 지방자치제 연구반 활동을 했고, 이듬해 연구회 분과장으로 활동했다. 동지는 김영삼 정부의 총체적인 부정, 부패, 부도덕, 폭력성에 입각한 반민족 반민중 정권을 응징하기 위해 남총련 주최로 ’97년 3월 20일 오후 2시에 조선대에서 열린 개강선포식에 참가했다. 전경과 학생의 대치 중 녹두대에서 깃발을 들고 있던 동지가 후배에게 깃발을 넘긴 후 맨 앞에서 전경과 대치해 투석전을 전개하던 중, 시커먼 물체에 맞고 주춤거리며 뒤로 몇 발자국을 물러서다가 미끄러지듯 쓰러졌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운명했다. 그러나 사망원인에 대해 병원과 경찰 측은 심장쇼크로 인한 사망으로 발표했고 동지의 시신은 2개월 여간 장례식도 치르지 못한 채 영안실에 보관되었다. 이후 한총련은 ‘시위도중 사망 시인할 것. 몸에 칼을 대지 않는다는 전제로 모든 사인진상 규명을 위해 나설 것. 도청 노제를 비롯한 모든 장례행렬을 보장할 것. 검문, 원천봉쇄를 하지 말 것’을 요구하며 투쟁을 계속 전개했고 경찰 측은 시신에 대한 부검 없이는 장례식을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장례식을 방해했다. 결국 동지는 사망한 지 64일 만에 부모, 친지, 조선대 학우 7백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광주 망월동 묘지에 안장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