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함석헌 선생 36주기 추모제
○ 일 시: 2023년 3월 4일(토) 오전 10시
○ 장 소: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3묘역 329번
행사 정보
토요일
2023-03-04
대전현충원
지도에서 보기
인물 정보
함석헌
- 1901년 3월 13일 평북 용천군 출생
- 1916년 양시 공립 보통학교 졸업 및 관립 평양고등보통학교 입학
- 1919년 3·1 운동에 참가한 후 학업 중단
- 1938년 3월 창씨개명과 일본어 수업을 거부하고 오산학교를 사임 당함
- 1940년 8월 동경에서 계우회 사건으로 평양 대동경찰서에 1년간 복역하기도 하면서 독립운동을 벌임.
-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고향에서 용암포 자치위원장, 용산군 자치 위원장이 됨
- 1956년 서울 용산구 원효로에 사택을 마련, 이때부터 「사상계」 집필 시작
- 1970년 4월 19일 잡지 「씨 의 소리」 창간호 발간
- 1971년 8월 삼선개헌반대투쟁위원회를 구성 활동.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조직하여 대표위원으로 1975년까지 활동
- 1971년 11월 13일 전태일 1주기 추도회 및 강연회를 시작으로 씨알의 소리사 주체로 1975년까지 해마다 계속함
- 1974년 11월 윤보선, 김대중과 민주회복국민회의를 만들고 대표위원 역임
- 1979년 11월 23일 명동 YWCA사건으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가 15일간 구속
- 1985년 퀘이커세계협회 멕시코 종교대회에 참석. 두 번째로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
- 1989년 2월 4일 민주화운동에 헌신하다 운명
’23년 오산고등보통학교를 거쳐 ’28년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모교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40년 평양 근교의 송산농사학원을 인수, 원장에 취임하였으나, 곧 계우회사건으로 1년간의 옥고를 치른 후 8·15광복 때까지 은둔생활을 하였다.
광복이 되자, 평북 자치위원회 문교부장이 되었으나 같은 해 11월에 발생한 신의주학생의거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투옥되었다. ’47년 단신으로 월남, 퀘이커교도로서 각 학교·단체에서 성경강론을 하였다. ’56년 「사상계(思想界)」를 통하여 주로 사회비평적인 글을 쓰기 시작하였는데, ‘한국기독교에 할말이 있다’라는 글로 신부 윤효중(尹孝重)과 신랄한 지상논쟁을 펴 큰 화제를 일으켰다.
’70년 「씨 의 소리」를 발간하여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76년의 명동사건, ’79년의 YMCA 위장결혼식 사건에 연루되어 재판에 회부되는 등 많은 탄압을 받았다. ’80년 「씨 의 소리」가 강제폐간되어 문필생활을 중단하였으며, ’84년에는 민주통일국민회의 고문을 지냈다. ‘폭력에 대한 거부’, ‘권위에 대한 저항’ 등 평생 일관된 사상과 신념을 바탕으로 항일·반독재에 앞장섰다. 저서에 「뜻으로 본 한국역사」, 「수평선 너머」 등이 있다.
- 1916년 양시 공립 보통학교 졸업 및 관립 평양고등보통학교 입학
- 1919년 3·1 운동에 참가한 후 학업 중단
- 1938년 3월 창씨개명과 일본어 수업을 거부하고 오산학교를 사임 당함
- 1940년 8월 동경에서 계우회 사건으로 평양 대동경찰서에 1년간 복역하기도 하면서 독립운동을 벌임.
-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고향에서 용암포 자치위원장, 용산군 자치 위원장이 됨
- 1956년 서울 용산구 원효로에 사택을 마련, 이때부터 「사상계」 집필 시작
- 1970년 4월 19일 잡지 「씨 의 소리」 창간호 발간
- 1971년 8월 삼선개헌반대투쟁위원회를 구성 활동.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조직하여 대표위원으로 1975년까지 활동
- 1971년 11월 13일 전태일 1주기 추도회 및 강연회를 시작으로 씨알의 소리사 주체로 1975년까지 해마다 계속함
- 1974년 11월 윤보선, 김대중과 민주회복국민회의를 만들고 대표위원 역임
- 1979년 11월 23일 명동 YWCA사건으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가 15일간 구속
- 1985년 퀘이커세계협회 멕시코 종교대회에 참석. 두 번째로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
- 1989년 2월 4일 민주화운동에 헌신하다 운명
’23년 오산고등보통학교를 거쳐 ’28년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모교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40년 평양 근교의 송산농사학원을 인수, 원장에 취임하였으나, 곧 계우회사건으로 1년간의 옥고를 치른 후 8·15광복 때까지 은둔생활을 하였다.
광복이 되자, 평북 자치위원회 문교부장이 되었으나 같은 해 11월에 발생한 신의주학생의거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투옥되었다. ’47년 단신으로 월남, 퀘이커교도로서 각 학교·단체에서 성경강론을 하였다. ’56년 「사상계(思想界)」를 통하여 주로 사회비평적인 글을 쓰기 시작하였는데, ‘한국기독교에 할말이 있다’라는 글로 신부 윤효중(尹孝重)과 신랄한 지상논쟁을 펴 큰 화제를 일으켰다.
’70년 「씨 의 소리」를 발간하여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76년의 명동사건, ’79년의 YMCA 위장결혼식 사건에 연루되어 재판에 회부되는 등 많은 탄압을 받았다. ’80년 「씨 의 소리」가 강제폐간되어 문필생활을 중단하였으며, ’84년에는 민주통일국민회의 고문을 지냈다. ‘폭력에 대한 거부’, ‘권위에 대한 저항’ 등 평생 일관된 사상과 신념을 바탕으로 항일·반독재에 앞장섰다. 저서에 「뜻으로 본 한국역사」, 「수평선 너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