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옥순 동지 22주기 추모제
○ 일 시: 2023년 2월 19일(일) 12시(정오)
○ 장 소: 마석모란공원
행사 정보
일요일
2023-02-19
마석모란공원
지도에서 보기
인물 정보
이옥순
1954년 전북 정읍 출생
1973년 3월 원풍모방 입사
1982년 9월 해고. 집시법, 노동조합법 위반으로 구속
1983년 8월 석방
1985년 8월 최초의 공개적 노동자 정치조직인 서울노동운동연합 부의장 선출 이후 의장직무대행. 수배
1989년 여성 노동자 교육선교원 총무
1991년 장기수 출신인 권낙기 선생님과 결혼. 장기수 선생님들의 든든한 벗이 됨
1999년 통일을 여는 여성모임 `금강초롱`회장
70년대 민주노동운동 동지회 사무국장
2000년 5월 폐암 투병시작
2000년 6월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대외협력위원장
2000년 10월 조선노동당 창건 55돌 기념식 경축 방북대표단으로 참석
2001년 2월 23일 운명
1973년 3월 원풍모방 입사
1982년 9월 해고. 집시법, 노동조합법 위반으로 구속
1983년 8월 석방
1985년 8월 최초의 공개적 노동자 정치조직인 서울노동운동연합 부의장 선출 이후 의장직무대행. 수배
1989년 여성 노동자 교육선교원 총무
1991년 장기수 출신인 권낙기 선생님과 결혼. 장기수 선생님들의 든든한 벗이 됨
1999년 통일을 여는 여성모임 `금강초롱`회장
70년대 민주노동운동 동지회 사무국장
2000년 5월 폐암 투병시작
2000년 6월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대외협력위원장
2000년 10월 조선노동당 창건 55돌 기념식 경축 방북대표단으로 참석
2001년 2월 23일 운명
<p>동지는 1970년대 여성노동운동의 중심이었던 원풍모방에서 운동의 삶을 시작했다. 원풍모방 투쟁 과정에서 해고, 구속을 당하고 출소 후 여성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였다.<br/>
991년에는 장기수 선생님이신 권낙기 선생님과 결혼하여 장기수 선생님의 든든한 벗이 되기도 했으며, 통일을 여는 여성모임 ‘금강초롱’회장을 역임하며 통일운동을 시작하였으며, 70년대 민주노동운동동지회 사무국장을 역임하며 70년대 노동운동가들의 힘을 모아 사회에 기여하고자 했다. 이렇게 한 평생을 노동운동, 통일운동에 헌신했던 동지는 암에 걸린 몸을 이끌고 정력적으로 전국연합 대외협력위원장 활동을 전개하다 2001년 2월 23일 운명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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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동지가 남긴 글</strong><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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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자주여성시대를 열어 가는 길에 여러분과 함께 하겠습니다 - 여성 민 2000년 5월호 중</strong><br/>
전국에 있는 여성일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옥순 입니다. 여성동지들께서 걱정해 주시는 덕분에 지금도 저는 투병의 끈을 늦추지 않고 열심히 생활하고 있습니다. 지난 10월 9일부터 14일까지 저는 몸은 좀 불편하겠지만 통일의 길에서 제 몫을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북조선 노동당 당 창건 55돌(10월 10일)을 축하하기 위해 전국연합 대표로 평양을 다녀왔습니다. 남북 정상이 6.15공동선언으로 자주적 통일의 길을 걸어갈 것을 합의한 이후 통일 정세는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남북 교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서 이번 남한 사회단체 대표들의 방북은 바로 6.15선언의 뜻을 넓혀 나가고 그동안 정부가 독점해 왔던 통일논의 부분을 민간차원으로 확대해 나가는데 그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br/>
방북 남측 대표들이 재판에 계류중이라는 이유로 정부에서 불허하는 바람에 출발이 많이 늦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평양에 도착했을 때, 북 동포들 500여명은 빵으로 식사를 때우면서 4시간을 기다려 빨간 꽃을 흔들며 열열히 환영을 해주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잘 오셨습네다." 하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반겨주는데 `오랜 세월동안 왜 만나지 못했던가, 역시 우리는 하나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br/>
10월 10일 북조선 노동당 당창건 55돌 행사에 참가한 저는 사실 놀라움과 감동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북의 군인들이 보여주었던 사열식과 100만 명의 인민들이 천명이 한 명처럼 백만 명도 한 명처럼 움직이는 웅장하고 경의로운 카드색션을 보면서 인간이 만들어내는 예술의 극치를 보는 듯 했습니다. 그것은 현재 북의 경제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변함 없는 믿음과 굳은 의지로 하나 되어 있어 앞으로의 어떠한 고난과 역경에도 끄떡없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었습니다. 또 `어려울 때는 같이 죽을 먹고 형편이 나아지면 같이 밥을 먹는다`는 일치단결의 정신이 바로 `북 사회를 이끌 어가는 중요한 힘`임을 알게되었습니다. 거리를 지나다 보면 "오늘을 위한 오늘에 살지 말고 내일을 위한 오늘에 살자", "자력갱생" 등의 구호가 눈에 띠는데 이것은 북 사회가 유지되고 운영되는 원리와 힘을 알게 하는 구호들입니다. 돈 있는 자와 힘있는 자가 판치고 대우받는 남 사회에서는 보기 힘든 초지일관. 인간 중심의 사고는 무척 부러운 면 중에 하나였습니다. 셋째 날 몸이 많이 안 좋아서 병원에 가서 물리치료와 X-RAY를 찍은 일이 있었는데 북에서 가장 권위 있는 암 전문의사 선생님 네 분은 환자 옆에서 검사 화면을 직접 보면서 환자인 저에게 자세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실제 남한에서의 의사들은 자신이 방사선에 노출되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환자들을 촬영실에 혼자 나두고 옆 방으로 피하지 않습니까?) 그 외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언젠가 여러분들도 직접 방북하여 구석구석 더 깊이 있게 경험하고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빨리 오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저를 포함한 많은 여성일꾼들이 궁금해 왔던 것은 북 여성들의 삶과 지위, 조직상황 등 이었을 것입니다. 여맹 대표를 직접 만나 많은 얘기를 나눌 기회가 없어서 안타까웠지만 그나마 사회 구석구석에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며 일하고 있는 여성들 모습은 우리들과는 사뭇 달랐습니다.<br/>
출산과 육아라는 여성이 갖는 가장 큰 부담은 사실 국가에서 기본적으로 책임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쌍둥이를 낳을 경우 더욱 큰 집으로 이사를 갈 수 있도록 한다든지, 경사라고 해서 경제적인 측면으로 포상과 지원을 한답니다. 또한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남성들과 그리 큰 차별이 없어 보였습니다. 앞서 이야기 한데로 북에서는 출산과 육아의 부담이 별로 없기 때문에 결혼에 앞서 출산과 육아 때문에 고민하는 우리보다 결혼연령이 대체로 낮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 이후의 활동에 대해서 특별히 사회적 제약을 받지 않으며 기혼자들의 활동이 매우 자연스러워 보였습니다. 남한에서 결혼을 한다는 것은 일하는 것 자체, 아니 자신의 삶의 많은 부분을 포기해야하는 것 때문에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 중에는 일하는 전문여성이 되기 위해 독신을 택하는 자가 있는 반면 북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처럼 기본적으로 여성의 지위가 사회적으로 보장된 속에서 여맹은 물론 조국통일 시대를 열어 가는 조직으로 우뚝 서 있었습니다. 자주여성 대표조직이 부재한 우리로서는 여간 부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남의 여성들은 참으로 어려운 처지와 상황에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IMF상황에서 비정규직으로 밀리는 여성노동자들, 사회적 성차별, 가사부담 등등...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다양한 지역과 부문의 투쟁과 조직적 단결이 있어야 하겠고 무엇보다도 자주여성 시대를 이끌어 가는 여성조직이 매우 시급하게 결성되어야 합니다. 앞으로 우리의 할 일은 너무나 많습니다. 통일의 물꼬는 터졌고 조국통일의 날은 다가오고 있는 것이 확실한데 우리들의 준비가 너무 부족함을 이번 방문을 통해 절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우리 여성들이 그 길에서 제 몫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통일을 열망하는 전국의 여성 대오를 빨리 모아내서 남북교류를 내실 있게 준비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지금 자주, 민주, 통일을 지향하는 여성들의 단결은 첫발을 내딛고 있습니다. 전국적인 방침에 따르고 한 깃발에 모일 것을 다짐하며 지역에서 찬찬히 준비해 나가면 우리는 큰 힘으로 하나될 수 있습니다.<br/>
마지막으로, 저보다 다른 전국연합 간부들이 갔어야 했는데 제가 갈 수 있도록 배려해준 전국연합 일꾼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며 북에서 5박 6일 동안 받은 융숭한 대접에 보답하는 길은 비록 아픈 몸이지만 제 열의와 열정을 다해서 통일을 앞당기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각오합니다.</p>
991년에는 장기수 선생님이신 권낙기 선생님과 결혼하여 장기수 선생님의 든든한 벗이 되기도 했으며, 통일을 여는 여성모임 ‘금강초롱’회장을 역임하며 통일운동을 시작하였으며, 70년대 민주노동운동동지회 사무국장을 역임하며 70년대 노동운동가들의 힘을 모아 사회에 기여하고자 했다. 이렇게 한 평생을 노동운동, 통일운동에 헌신했던 동지는 암에 걸린 몸을 이끌고 정력적으로 전국연합 대외협력위원장 활동을 전개하다 2001년 2월 23일 운명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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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동지가 남긴 글</strong><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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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자주여성시대를 열어 가는 길에 여러분과 함께 하겠습니다 - 여성 민 2000년 5월호 중</strong><br/>
전국에 있는 여성일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옥순 입니다. 여성동지들께서 걱정해 주시는 덕분에 지금도 저는 투병의 끈을 늦추지 않고 열심히 생활하고 있습니다. 지난 10월 9일부터 14일까지 저는 몸은 좀 불편하겠지만 통일의 길에서 제 몫을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북조선 노동당 당 창건 55돌(10월 10일)을 축하하기 위해 전국연합 대표로 평양을 다녀왔습니다. 남북 정상이 6.15공동선언으로 자주적 통일의 길을 걸어갈 것을 합의한 이후 통일 정세는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남북 교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서 이번 남한 사회단체 대표들의 방북은 바로 6.15선언의 뜻을 넓혀 나가고 그동안 정부가 독점해 왔던 통일논의 부분을 민간차원으로 확대해 나가는데 그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br/>
방북 남측 대표들이 재판에 계류중이라는 이유로 정부에서 불허하는 바람에 출발이 많이 늦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평양에 도착했을 때, 북 동포들 500여명은 빵으로 식사를 때우면서 4시간을 기다려 빨간 꽃을 흔들며 열열히 환영을 해주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잘 오셨습네다." 하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반겨주는데 `오랜 세월동안 왜 만나지 못했던가, 역시 우리는 하나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br/>
10월 10일 북조선 노동당 당창건 55돌 행사에 참가한 저는 사실 놀라움과 감동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북의 군인들이 보여주었던 사열식과 100만 명의 인민들이 천명이 한 명처럼 백만 명도 한 명처럼 움직이는 웅장하고 경의로운 카드색션을 보면서 인간이 만들어내는 예술의 극치를 보는 듯 했습니다. 그것은 현재 북의 경제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변함 없는 믿음과 굳은 의지로 하나 되어 있어 앞으로의 어떠한 고난과 역경에도 끄떡없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었습니다. 또 `어려울 때는 같이 죽을 먹고 형편이 나아지면 같이 밥을 먹는다`는 일치단결의 정신이 바로 `북 사회를 이끌 어가는 중요한 힘`임을 알게되었습니다. 거리를 지나다 보면 "오늘을 위한 오늘에 살지 말고 내일을 위한 오늘에 살자", "자력갱생" 등의 구호가 눈에 띠는데 이것은 북 사회가 유지되고 운영되는 원리와 힘을 알게 하는 구호들입니다. 돈 있는 자와 힘있는 자가 판치고 대우받는 남 사회에서는 보기 힘든 초지일관. 인간 중심의 사고는 무척 부러운 면 중에 하나였습니다. 셋째 날 몸이 많이 안 좋아서 병원에 가서 물리치료와 X-RAY를 찍은 일이 있었는데 북에서 가장 권위 있는 암 전문의사 선생님 네 분은 환자 옆에서 검사 화면을 직접 보면서 환자인 저에게 자세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실제 남한에서의 의사들은 자신이 방사선에 노출되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환자들을 촬영실에 혼자 나두고 옆 방으로 피하지 않습니까?) 그 외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언젠가 여러분들도 직접 방북하여 구석구석 더 깊이 있게 경험하고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빨리 오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저를 포함한 많은 여성일꾼들이 궁금해 왔던 것은 북 여성들의 삶과 지위, 조직상황 등 이었을 것입니다. 여맹 대표를 직접 만나 많은 얘기를 나눌 기회가 없어서 안타까웠지만 그나마 사회 구석구석에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며 일하고 있는 여성들 모습은 우리들과는 사뭇 달랐습니다.<br/>
출산과 육아라는 여성이 갖는 가장 큰 부담은 사실 국가에서 기본적으로 책임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쌍둥이를 낳을 경우 더욱 큰 집으로 이사를 갈 수 있도록 한다든지, 경사라고 해서 경제적인 측면으로 포상과 지원을 한답니다. 또한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남성들과 그리 큰 차별이 없어 보였습니다. 앞서 이야기 한데로 북에서는 출산과 육아의 부담이 별로 없기 때문에 결혼에 앞서 출산과 육아 때문에 고민하는 우리보다 결혼연령이 대체로 낮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 이후의 활동에 대해서 특별히 사회적 제약을 받지 않으며 기혼자들의 활동이 매우 자연스러워 보였습니다. 남한에서 결혼을 한다는 것은 일하는 것 자체, 아니 자신의 삶의 많은 부분을 포기해야하는 것 때문에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 중에는 일하는 전문여성이 되기 위해 독신을 택하는 자가 있는 반면 북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처럼 기본적으로 여성의 지위가 사회적으로 보장된 속에서 여맹은 물론 조국통일 시대를 열어 가는 조직으로 우뚝 서 있었습니다. 자주여성 대표조직이 부재한 우리로서는 여간 부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남의 여성들은 참으로 어려운 처지와 상황에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IMF상황에서 비정규직으로 밀리는 여성노동자들, 사회적 성차별, 가사부담 등등...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다양한 지역과 부문의 투쟁과 조직적 단결이 있어야 하겠고 무엇보다도 자주여성 시대를 이끌어 가는 여성조직이 매우 시급하게 결성되어야 합니다. 앞으로 우리의 할 일은 너무나 많습니다. 통일의 물꼬는 터졌고 조국통일의 날은 다가오고 있는 것이 확실한데 우리들의 준비가 너무 부족함을 이번 방문을 통해 절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우리 여성들이 그 길에서 제 몫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통일을 열망하는 전국의 여성 대오를 빨리 모아내서 남북교류를 내실 있게 준비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지금 자주, 민주, 통일을 지향하는 여성들의 단결은 첫발을 내딛고 있습니다. 전국적인 방침에 따르고 한 깃발에 모일 것을 다짐하며 지역에서 찬찬히 준비해 나가면 우리는 큰 힘으로 하나될 수 있습니다.<br/>
마지막으로, 저보다 다른 전국연합 간부들이 갔어야 했는데 제가 갈 수 있도록 배려해준 전국연합 일꾼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며 북에서 5박 6일 동안 받은 융숭한 대접에 보답하는 길은 비록 아픈 몸이지만 제 열의와 열정을 다해서 통일을 앞당기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각오합니다.</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