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 시: 2022년 4월 30일(토) 11:00
○ 장 소: 마석 민족민주열사묘역
행사 정보
인물 정보
유구영
- 1978년 청주고등학교 졸업
- 1981년 고려대 행정학과 졸업, 한국신학대학원 입학
- 1988년 영등포 기계공단 노동조합 사무국장
- 1990년 대한 중전기 분회장
- 1993년 서울지역 노동조합 협의회 정책실장
- 1995년 민주노총 정책기획실 정책부국장
- 1996년 5월 2일 새벽 2시 25분경 동지들과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간암으로 운명. 고려대 졸업후 노동운동에 투신. 영등포기계공단 노동조합 사무국장. 서노협 활동하다 간암에 걸림. 이에 굴하지 않고 병마와 싸우며 민주노총 건설을 위해 헌신. 95년부터 민주노총 정책기획실 정책부국장 활동하다, 96년 5월 2일 운명
동지는 ’78년 청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 행정학과에 입학하였고 대학에서 유신체제의 모순을 인식하고 ’81년 졸업과 동시에 노동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간암 중기의 하늘이 무너지는 선고가 내려지기 전날 밤에도 동지는 민주노총의 핵심적 과제 중의 하나이면서 동지의 최대 관심사의 하나였던 노동자 정치세력화 방안을 새벽 4시까지 정리했다. 동지가 민주노총의 정책기획국 부국장으로 활동하며 꿈에도 염원하는 민주노총 건설이 실현되고, 자신의 땀이 밴 그 조직이 이제 막 새롭게 활동을 펼치려던 참이었던 ’96년 5월 2일, 그의 병세가 악화되어 여러 번의 입원과 치료에도 불구하고, 결국 동지는 새벽 2시 25분경, 아직 채 못 피운 서른아홉살의 짧은 생애로 운명하였다.
고려대를 졸업하고 노동운동에 투신한 유구영 동지는 영등포 기계공단 노조 사무국장을 거쳐 서노협 선봉대장 및 정책실장으로 활동하던 중 간암에 걸렸음을 알았다. 질환의 성격상 육체적인 무리는 치명적인 것이었음에도 각종 수련회나 교육 등으로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렇듯 병마와 싸워나가면서도 활동을 그치지 않고 민주노총 건설을 위해 헌신하였으며 95년 12월부터는 민주노총 정책기획실 정책부국장으로 일하였다. 96년 5월2일, 병세의 악화로 인해 여러번의 입원과 치료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 권영길 위원장을 비롯한 동지들과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에 새벽 2시 25분경, 원숙한 40대의 생애를 시작하지도 못한채 운명하였다.
동지를 생각하며
유구영 동지! 동지의 얼굴이 떠오르면 “어서 빨리 일을 시작해야 할텐데”했던 동지의 말이 어김없이 송곳처럼 아프게 우리 귀를 찔러 오고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보람은 민주노총 건설”이라고 했던 동지의 얼굴이 우리 가슴으로 안겨옵니다. 유구영 동지! 우리는 여덟시간 노동제 쟁취와 노동해방을 위해 피어린 투쟁을 벌였던 선배 노동자들을 기리고, 민주노총 합법화 가능성과 근로조건 개악 시도의 이중적인 정세를 돌파하는 첫번째 투쟁-노동절 투쟁을 벌이면서, 동지가 병마와 마지막 싸움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큰 보람, 천만 노동자의 자랑스러운 조직, 4천만 민중의 희망-민주노총을 건설하고 처음 맞는 노동절 투쟁이었는데, 정작 그토록 민주노총 건설을 위해 애썼던 동지는 그 자리에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의 곁을 떠나갔습니다. 기쁜 일 해드린 것 없는데 마지막까지 아버님 가슴에 한을 묻은 것이 무거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도 이제 마음 풀고 편히 가십시오. 이제 민주노총이 자식이 되어 먼저간 동지를 대신해 아들 노릇하겠습니다. 그리고 노동해방 그날까지 우리 노동자를 지지하고 성원해 주십시오.
동지를 그리며
세칭 일류대의 전망좋은 인기학과를 졸업한 유구영 동지가 안락한 삶을 쫓았다면 그 장래는 장미빛 탄탄대로였을 것이다. 그러나 동지는 이 탄탄대로를 ‘죽음에 이르는 길’로 보았다. 대신에 동지는 고난에 찬 가시밭길을 택했다. 동지는 결단을 내렸고 대학을 졸업하던 이듬해인 82년, 노동자의 삶이 펼쳐지는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동지는 노동자 계급의 일원으로 살고자 하는 자기와의 치열한 싸움을 했다. 우리는 이를 힘겨운 현장생활의 와중에서도 청주직업훈련원 전기과를 야간으로 이수한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로부터 죽음의 병마와 싸우기까지 동지는 오직 노동자의 총체적 해방을 향한 투쟁의 한 길을 걸어왔다. 영등포 산업선교회 교육간사, 영등포 기계공단노조 사무국장, 대한중전기 분회장을 거치는 동안 동지는 한번도 노동현장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늘 투쟁의 맨 앞자리에 서 있었다. 90년부터 2년여동안 맡았던 서노협 선봉대장은 이를 웅변하고 있다. 부천 세종병원에서 역시 노동조합운동에 헌신하고 있는 부인 신윤복씨는 몸을 돌보지 않고 이랜드투쟁에 매달리던 동지의 모습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유구영 동지는 특히 노조운동내에서도 상대적으로 취약한 영역인 섬유와 유통, 영세사업장의 조직화에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있었다. 사무국장을 지낸 영등포 기계공단노조는 공단내의 영세사업장 노동자로 구성된 지역노조였다. 한편 서노협 전임을 비롯해 직업적 노동운동가의 길을 걷는 동안 동지는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세 명의 가족을 거느린 동지의 손에 쥐어진 것은 임무수행에 필요한 최소한의 활동비가 전부였다. 그나마 민주노총이 출범한 뒤 부족하나마 비로소 지급되기 시작한 ‘첫월급’을 그는 병상에서 받았다. 간암 중기의 하늘이 무너지는 선고가 내려지기 전날 밤에도 동지는 민주노총의 핵심적 과제 중의 하나이면서 동지의 최대 관심사의 하나였던 노동자 정치세력화 방안을 새벽 4시까지 정리했다. 유구영 동지가 꿈에도 염원하며 정열을 쏟아부었던 민주노총 건설이 실현되고, 자신의 땀이 밴 그 조직이 이제 막 새롭게 활동을 펼치려던 참이었다. 향년 40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