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신건수동지 28주기 추모제
○ 일 시: 2022년 5월 1일(일) 16:00
○ 장 소: 서울 강동구 천호대로1240 4동 606호
○ 일 시: 2022년 5월 1일(일) 16:00
○ 장 소: 서울 강동구 천호대로1240 4동 606호
행사 정보
일요일
2022-05-01
서울 강동구 천호대로1240 4동 606호
지도에서 보기
인물 정보
신건수(당시 24세)
1970년 7월 7일 서울 출생
1989년 2월 서울 숭문고등학교 졸업
1989년 3월 서울 숭실대학교 기계공학과 입학
1990년 8월 숭실대 가톨릭 학생회 제17대 회장 역임
1991년 6월 서울대교구 카톨릭 대학생연합회 제6대 남부지구장 역임
1994년 5월 2일 부산 노동절 집회 참석후 상경도중 불의의 사고로 운명. 화장.
2019년 2월15일 숭실대로 부터 명예졸업 학위를 수여받았슴
1989년 2월 서울 숭문고등학교 졸업
1989년 3월 서울 숭실대학교 기계공학과 입학
1990년 8월 숭실대 가톨릭 학생회 제17대 회장 역임
1991년 6월 서울대교구 카톨릭 대학생연합회 제6대 남부지구장 역임
1994년 5월 2일 부산 노동절 집회 참석후 상경도중 불의의 사고로 운명. 화장.
2019년 2월15일 숭실대로 부터 명예졸업 학위를 수여받았슴
갈라진 대지에 서는 그대
1
분노의 그릇은 깨지기 쉽고
인내의 밤은 그 끝을 세기 어려우니,
임진의 그대 기억 풀며 다짐하는
기약은 이슬보다 먼저 사라지리
5월 제단에 바친 영혼 아직도 모자라
하늘은 그대의 육신 거두었는가.
스물넷 푸른 사제복에 그리움이 많아
초록빛 강물은 아직 그대 발길 붙드는가.
아니면, 자본가의 언어가 침묵하는 그날까지
고작 찬바람에 웅크리며 외면하며,
무엇을 분노하고 무엇을 인내할지 몰라
오늘 그대 흘려보내지 못하는가.
2
팔이 짧아 안을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눈이 나빠 볼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발이 없어 다가서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귀가 막혀 듣지 못한 것은
아니다, 비틀거리는 새벽의 눈길에 남은
말을 잃은 노동자의 발자국들에 무릎을 꿇어
그대 외쳤다. 신앞에 홀로 설 때까지
나 분노는 민중을 외면하지 않으리라.
그대 마지막 뿌린 흙빛 씨앗 하나
내시에 냇물을 타고 흘러 쓰러진 자의 가슴마다
꽃을 피우는 그 날, 해방의 날에
그대 율법과 사랑은 한줄기로 흐르리라.
유고글
동아리 일지에
1994.년 2월 16일 수요일 분도.
아무리 장난을 많이 치는 사람이라도 어느 한 부분에서는 진지해지기 나름이다. 언뜻 생각만 해도, 많은 단어가 떠오른다. 어머니, 나의 인생, 친구, 비밀, 그중 사람을 가장 진지하게 만드는 것이 죽음 앞에선 사람들일 것이다. 94년은 문민정부의 허위를 느끼게하는 죽음이 계속 뒤를 잇는다. 저번 전국 농민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올라오던 경북농민회 2분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셨고 늙은 몸에 통일을 위해 애쓰신 ‘문익환’목사님이 과로로 사망하셨고, 2월 13일에는 민족시인 김남주 시인이 췌장암으로 사망하셨다. 투병 3개월 만이다. 16일 오전 8시, 같이 일하는 동지들과 경기대학교로 영결식에 참석했다. 차가운 아침 기온에 3-400여명의 참석자는 조용히 가시는 분의 마지막 길을 함께 했다. 30에 감옥에 투옥되어 40의 나이에 근 10여년의 수형생활을 마치고 10년 지인이던 분과 결혼하여 현재 5살 ‘토일’이라는 아들을 얻었다. 일반사람의 47세는 사회에서 안정적 위치를 가지며 원숙한 사회생활을 영위할 나이이다. 그러나 김남주님은 그 나이에 어머니를 남기고, 아들을 남기고, 부인을 남기고, 그보다 훨씬 나이 많은 사람의 애도속에 떠나갔다.
그분은 상당히 시를 좋아하셨다. 스스로 말하기를 혁명적 열정과 이론뿐 아니라 그 속에 시가 없으면 안된다 하였다. 시란 인간의 감정에 호소하는 글이다. 아마도 그분의 열정적 삶 또한 투철한 혁명적 삶속에 시의 감성이 결합되었으리라.
영결식의 참석속에서 가장 깊은 감동은 그분의 유언적 성격을 띤 육성 녹음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 분은 70년대에 또한 5공때 독재에 맞서 남조선 민족해방전선에서 일하시다 투옥되었다. 그 활동의 연장에서 남기는 말씀은 남조선민족해방전선 만세!
반민중적, 반기독교적 모습에 대해 비합활동으로 끊임없이 살아오신 분이 남는 자들에게 또한 바라는 말이었다.
순간 거기에 참석한 이들의 숙연함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통한 모양이다.
우리의 한 동지는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간의 공동의 마음(고통, 열정…)을 느끼며 눈물이 흐르더란다. 마흔이 넘은 어머니 품에 이끌려 무엇인지도 모른채 싱글싱글 웃기만 하는 토일이의 얼굴위로 눈물에 젖은 그분을 지나쳐 헌화하러 가는 이들의 모습은 순례지의 모습이었다. 프란체스코 형제 여러분, 투쟁할 때만이 진정으로 자유로왔다던 그분의 말씀이 혹시 현재의 복음은 아닐까 합니다. 94년은 ‘한국 방문의 해’이기 보다는 ‘이웃 방문의 해’란 의미가 더 큰 것 같습니다. 하나 하나의 삶속에서 예수의 해방을 이룹시다. 그래서 12월 31일 이렇게 이야기 합시다.
“하느님 나라 건설 투쟁 만세!”
1
분노의 그릇은 깨지기 쉽고
인내의 밤은 그 끝을 세기 어려우니,
임진의 그대 기억 풀며 다짐하는
기약은 이슬보다 먼저 사라지리
5월 제단에 바친 영혼 아직도 모자라
하늘은 그대의 육신 거두었는가.
스물넷 푸른 사제복에 그리움이 많아
초록빛 강물은 아직 그대 발길 붙드는가.
아니면, 자본가의 언어가 침묵하는 그날까지
고작 찬바람에 웅크리며 외면하며,
무엇을 분노하고 무엇을 인내할지 몰라
오늘 그대 흘려보내지 못하는가.
2
팔이 짧아 안을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눈이 나빠 볼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발이 없어 다가서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귀가 막혀 듣지 못한 것은
아니다, 비틀거리는 새벽의 눈길에 남은
말을 잃은 노동자의 발자국들에 무릎을 꿇어
그대 외쳤다. 신앞에 홀로 설 때까지
나 분노는 민중을 외면하지 않으리라.
그대 마지막 뿌린 흙빛 씨앗 하나
내시에 냇물을 타고 흘러 쓰러진 자의 가슴마다
꽃을 피우는 그 날, 해방의 날에
그대 율법과 사랑은 한줄기로 흐르리라.
유고글
동아리 일지에
1994.년 2월 16일 수요일 분도.
아무리 장난을 많이 치는 사람이라도 어느 한 부분에서는 진지해지기 나름이다. 언뜻 생각만 해도, 많은 단어가 떠오른다. 어머니, 나의 인생, 친구, 비밀, 그중 사람을 가장 진지하게 만드는 것이 죽음 앞에선 사람들일 것이다. 94년은 문민정부의 허위를 느끼게하는 죽음이 계속 뒤를 잇는다. 저번 전국 농민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올라오던 경북농민회 2분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셨고 늙은 몸에 통일을 위해 애쓰신 ‘문익환’목사님이 과로로 사망하셨고, 2월 13일에는 민족시인 김남주 시인이 췌장암으로 사망하셨다. 투병 3개월 만이다. 16일 오전 8시, 같이 일하는 동지들과 경기대학교로 영결식에 참석했다. 차가운 아침 기온에 3-400여명의 참석자는 조용히 가시는 분의 마지막 길을 함께 했다. 30에 감옥에 투옥되어 40의 나이에 근 10여년의 수형생활을 마치고 10년 지인이던 분과 결혼하여 현재 5살 ‘토일’이라는 아들을 얻었다. 일반사람의 47세는 사회에서 안정적 위치를 가지며 원숙한 사회생활을 영위할 나이이다. 그러나 김남주님은 그 나이에 어머니를 남기고, 아들을 남기고, 부인을 남기고, 그보다 훨씬 나이 많은 사람의 애도속에 떠나갔다.
그분은 상당히 시를 좋아하셨다. 스스로 말하기를 혁명적 열정과 이론뿐 아니라 그 속에 시가 없으면 안된다 하였다. 시란 인간의 감정에 호소하는 글이다. 아마도 그분의 열정적 삶 또한 투철한 혁명적 삶속에 시의 감성이 결합되었으리라.
영결식의 참석속에서 가장 깊은 감동은 그분의 유언적 성격을 띤 육성 녹음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 분은 70년대에 또한 5공때 독재에 맞서 남조선 민족해방전선에서 일하시다 투옥되었다. 그 활동의 연장에서 남기는 말씀은 남조선민족해방전선 만세!
반민중적, 반기독교적 모습에 대해 비합활동으로 끊임없이 살아오신 분이 남는 자들에게 또한 바라는 말이었다.
순간 거기에 참석한 이들의 숙연함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통한 모양이다.
우리의 한 동지는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간의 공동의 마음(고통, 열정…)을 느끼며 눈물이 흐르더란다. 마흔이 넘은 어머니 품에 이끌려 무엇인지도 모른채 싱글싱글 웃기만 하는 토일이의 얼굴위로 눈물에 젖은 그분을 지나쳐 헌화하러 가는 이들의 모습은 순례지의 모습이었다. 프란체스코 형제 여러분, 투쟁할 때만이 진정으로 자유로왔다던 그분의 말씀이 혹시 현재의 복음은 아닐까 합니다. 94년은 ‘한국 방문의 해’이기 보다는 ‘이웃 방문의 해’란 의미가 더 큰 것 같습니다. 하나 하나의 삶속에서 예수의 해방을 이룹시다. 그래서 12월 31일 이렇게 이야기 합시다.
“하느님 나라 건설 투쟁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