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윤기열사 33주기 추모제
○ 일 시: 2022년 4월 3일(일) 11:00
○ 장 소: 마석민족민주열사묘역
○ 일 시: 2022년 4월 3일(일) 11:00
○ 장 소: 마석민족민주열사묘역
행사 정보
일요일
2022-04-03
마석민족민주열사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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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김윤기
- 1964년 12월 18일 서울 출생
- 1983년 3월 국민대학교 무역학과 입학
- 1986년 5월 5·3인천 투쟁에 참가하여 구속되어 1년형을 선고받음
- 1988년 7월 덕진양행 입사
- 1988년 11월 29일 덕진양행 노조결성, 위원장으로 선출됨. 이후 회사측과 구사대가 구타, 폭행, 업무집행방해 등의 탄압을 자행하다 급기야 `공장이전` 강행. 2월 16일부터 노조 파업농성 돌입.
- 1989년 4월 3일 회사측과의 교섭에서 공장이전 철회를 요구하며 신나를 끼얺고 항의, 온몸에 불이 붙어 운명(국민대에서 추모제 진행)
- 제 20차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인정자
국민대에 입학해 동아리 ‘청문회’에서 활동하며 사회민주화와 노동자들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던 동지는 ’86년 5·3 인천투쟁에 참가해 실형 1년을 선고받고 만기출소 후 노동자와 삶을 함께 하고자 ’88년 7월 덕진양행에 입사했다. 동지는 동료들과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찾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11월 29일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위원장에 선출되어 회사 측과 교섭에 들어갔다. 1월 중순 사측은‘공장이전이라는 노조 탄압을 휘두름으로써 민주노조의 생명을 끊어놓으려 하였다. 이에 덕진노조는 동지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경비절감 한다더니 땅값 비싼 서울이전이냐. 서울이전 철회하라!” 외치며 2월 16일부터 파업농성에 돌입하였다. 마지막 농성마저도 또다시 협상이 결렬되자 이에 격분한 동지는 공장 이전 철회에 대한 분명한 답변을 요구하며 자신의 몸에 신나를 끼얹고 항의 도중, 온몸에 펑하고 불이 붙어 쓰러져 병원으로 옮기던 중 운명하였다.
- 1983년 3월 국민대학교 무역학과 입학
- 1986년 5월 5·3인천 투쟁에 참가하여 구속되어 1년형을 선고받음
- 1988년 7월 덕진양행 입사
- 1988년 11월 29일 덕진양행 노조결성, 위원장으로 선출됨. 이후 회사측과 구사대가 구타, 폭행, 업무집행방해 등의 탄압을 자행하다 급기야 `공장이전` 강행. 2월 16일부터 노조 파업농성 돌입.
- 1989년 4월 3일 회사측과의 교섭에서 공장이전 철회를 요구하며 신나를 끼얺고 항의, 온몸에 불이 붙어 운명(국민대에서 추모제 진행)
- 제 20차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인정자
국민대에 입학해 동아리 ‘청문회’에서 활동하며 사회민주화와 노동자들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던 동지는 ’86년 5·3 인천투쟁에 참가해 실형 1년을 선고받고 만기출소 후 노동자와 삶을 함께 하고자 ’88년 7월 덕진양행에 입사했다. 동지는 동료들과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찾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11월 29일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위원장에 선출되어 회사 측과 교섭에 들어갔다. 1월 중순 사측은‘공장이전이라는 노조 탄압을 휘두름으로써 민주노조의 생명을 끊어놓으려 하였다. 이에 덕진노조는 동지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경비절감 한다더니 땅값 비싼 서울이전이냐. 서울이전 철회하라!” 외치며 2월 16일부터 파업농성에 돌입하였다. 마지막 농성마저도 또다시 협상이 결렬되자 이에 격분한 동지는 공장 이전 철회에 대한 분명한 답변을 요구하며 자신의 몸에 신나를 끼얹고 항의 도중, 온몸에 펑하고 불이 붙어 쓰러져 병원으로 옮기던 중 운명하였다.
5·3 인천투쟁에 참가하여 실형 1년을 선고받았던 김윤기 동지는 만기출소 후 노동자와 삶을 함께 하고자 1988년 7월 덕진양행에 입사하였다. 동지는 동료들과 함께 열악한 봉제공장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찾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11월 29일 남자 기숙사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위원장에 선출되어 회사측과 교섭에 들어갔다. 그러나 회사측의 야비하고 무성의한 태도로 계속 결렬되었고 공장장과 구사대는 조합원을 구타, 폭행, 노조 집단탈퇴 음모를 조작하며 단전, 단수, 전화 불통 조치를 취하고 업무집행 방해, 퇴거불응 명목으로 고발하는 등 숨막히는 탄압을 자행하였으며, 급기야 1월 중순에는 ‘공장이전’이라는 신종노조 탄압을 성남지역에서 최초로 휘두름으로써 민주노조의 생명을 끊어놓으려 하였다.
이에 덕진노조는 김윤기 위원장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경비절감 한다더니 땅값 비싼 서울이전이냐 서울이전 철회하라!” 외치며 2월16일부터 파업농성에 돌입하였다. 그 이후 지속적인 교섭결렬로 3월 30일 10차 교섭까지 결렬되자 파업투쟁 47일째인 4월3일 김윤기 동지와 노조지도부는 이 협상이 마지막이라는 굳은 결의와 각오로 협상에 임하였다. 그러나 사장이 계속 억지 주장만 되풀이 하며 또다시 협상이 결렬되자 이에 격분한 김윤기 동지는 공장 이전 철회에 대한 분명한 답변을 요구하며 자신의 몸에 신나를 끼얹고 항의 도중, 온몸에 펑하고 불이 붙어 쓰러져 병원으로 옮기던 중 운명하였다.
동지를 생각하며
<추모시>
열사의 무덤 앞에서
김선미(김윤기 동지의 동생)
품이 넉넉한 오빠대신에
세상을 껴안기로 했지요.
세상은 내 한몸으로 보듬을 수 없을 만큼
크고, 넓고, 깊고 무겁지만
삶과 죽음이 가로 놓여 가까이 가려해도
갈 수 없는 오라버니 따스한 품속보다
차라리 오라버니가 껴안으려 했던 세상을
보듬기로 했습니다.
그 편이 덜 안타깝고 속 있는 일이라 생각이 듭니다.
가까이 가서 품에 다아본 세상은
삐죽삐죽 가시가 돋아 있기도 하고
뭉글뭉글 어머니 젖가슴 마냥 귀퉁이 밖에 안되겠지만
칙칙한 흙 속에 갇힌 오라버니 몸뚱이보담
따스함을 가진 사람들이 부대끼고 살아가는 세상이
훨씬 살아있을 적 오라버니를 닮았지요.
이제 속절없이 오라버니 곁에 함께 있지 못함을 서운해 하지는
않을 겁니다.
오라버니가 불덩이를 이고 걸었던 노동해방의 길에
태우다 사그라든 불을 지펴 놓을랍니다.
오빠가 짐졌던 죽은자리 대신에
보란 듯 노동자 세상을 채우겠습니다.
동지가 남긴 글
<편 지 1>
부모님께
날씨가 무척이나 더워지고 있습니다. 아버님 병환은 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선미는 학교에 잘 다니고 있겠지요. 영기는 너무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제 할 일은 잘 알아서 할 것입니다.
제가 구속이 된지도 벌써 두달이 다 되어갑니다. 많은 걱정을 하신 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 대학에 갈려고 결정하였을 때는 그 동안 찌들리고 찌들어서 먹을 것, 입을 것 제대로 가리지도 못하면서 저희들 가르치시고 키우시느라 고생하시는 부모님과 저희 집과 같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능력이 닿는대로 도움을 주면서 소박하게 살아갈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대학에 들어와서 세상 넓은 줄 알고 어려운 줄 알았습니다. 그 어려움은 개인의 의지, 즉 저의 소박한 희망과는 무관하게 힘들게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또 다시 한 구석에서 저와 같은 생각을 하며 한숨지으며 살아갈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의 가난이라는 문제는 저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공통과제이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서로는 서로를 속이고 짓밟고 위에 올라서는 아수라장의 세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언젠가 한 번은 경동시장에서 리어카를 끌고 밀고 하면서 두길이나 되는 채소더미를 가지고 씨름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퍼뜩 우리가 채소가게 하던 때의 아버지 어머니 생각을 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지만 가까운 친척이나 되는 것처럼 친근하고 다정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단순히 남이 아니라 나와 같이 한국에 사는 동포, 내가 그 사람과 같고 그 사람들이 나와 같은 한국인이고 같은 피, 같은 살, 같은 생각들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입학당시의 소박한 저의 희망은 거대한 포부로 바뀌었습니다. 가족만이 아니다. 어머님, 아버님, 그리고 영기, 선미만이 가족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가족으로 느껴졌습니다.
모든 가난하고 억눌리는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저는 살아가려고 했습니다. 저도 남들과 같이 평범하게 살아볼까 생각해 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떼돈은 못 벌더라도 얄팍하게나마 부모님께 월급봉투를 내밀어 보고도 싶고 코딱지만 하지만 마당에서 세수나 할 수 있는 내 집을 갖고서 살고도 싶고, 흔히 이야기 하는 장남의 역할을 남부럽지 않게 해보고 싶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저의 모습이 처량하게까지 느껴지곤 합니다. 부모님 말씀 거역하는 망나니가 되어있고, 장래성 없는 건달이 될 것도 같고, 한 평생 남에게 도움은 못 줄 망정 거지 노릇이나 할까 겁나곤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로 제가 한 일을 잘못했다고 생각하거나 반성을 하여서는 아닙니다. 제가 가고 있는 길은 절대적으로 옳은 길입니다. 그 옳은 길이 가족의 문제와 대립적인 문제로 발생했을 때 저도 가장 힘들고 괴롭습니다. 저도 가정에 대해서, 장래에 대해서, 저에 관한 일과 함께 무척이나 많이 고민하였습니다. 그러한 녀석이 이렇게 감옥에나 들락거리고 있느냐고 말씀하시겠지만 그만한 까닭이 있습니다.
어머님은 저의 어머님이시고 우리 형제들의 어머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은 어머니에게 효도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고 기쁘게 해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는 모든 사람들의 어머니처럼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보호하고 감싸며 질서를 유지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더 크신 어머니(물론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이 국가가 소수의 권력 모리배들에게 유린당하고 악용 당하고 있을 때 저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어머니가 폭력배들에게 머리채를 끄댕기며 맞고 있을 때에 저는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둘은 모두 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저보다 똑똑한 사람 많이 있습니다. 생활이 넉넉한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제가 바로. 어머님의 아들이 왜 이렇게 되어야 하는가는 분명합니다. 누구보다 양심적이고, 누구보다 착하게 살려고 하며, 또한 성실하며 궁극적으로는 현명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멍청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바로 나 자신과 가족도 같이 위하는 길이 되고,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하자 할 때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며 마침내는 자기 무덤을 자기가 파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날씨가 무척이나 추워질 것 같습니다. 환절기에 몸조심하시고 안녕히 계십시오.
1986. 11. 11.
불효자 올립니다
<편 지 2>
아우님 보시오.
공부하랴 일들하랴 힘들게 생활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오.
참으로 즐거워할만한 일인 것 같소.
차가운 마루바닥, 거무틱틱한 보리밥, 수십명의 교도관에 팔을 뒤틀려도, 땅에 질질 끌려가도 승리의 자신감에 찬 힘찬 ‘타도’와 ‘쟁취’의 외침 뿐 우리에겐 오직 전진 뿐이오.
사랑하는 조국이 있기에, 믿음직한 동지들이 있기에, 또한 우리들의 정당함이 승리할 것을 믿기에 우리는 쓰러질 수 없고, 쓰러지지도 않을 것이오.
형을 졸지에 보지 못하게 된 설움과 방황은 짧으면 짧을수록 좋을 것 같으오.
어려운 일인 줄 알지만 모두 단합하여 한치의 틈과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일들을 풀어나가야 할 줄 아오.
어떠한 고난과 시련이 우리 앞에 닥쳐도 승리의 그날이 우리 앞에 있음을 잊지 말고 힘차게 버티며 싸워나가야 할 것이오.
어느 때보다도 혹독한 겨울이 될 것 같소. 병들지 않고 항상 푸른 나무로 자라나길 바라오.
이만 줄이오.
1986. 11. 6.
윤기 씀
이에 덕진노조는 김윤기 위원장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경비절감 한다더니 땅값 비싼 서울이전이냐 서울이전 철회하라!” 외치며 2월16일부터 파업농성에 돌입하였다. 그 이후 지속적인 교섭결렬로 3월 30일 10차 교섭까지 결렬되자 파업투쟁 47일째인 4월3일 김윤기 동지와 노조지도부는 이 협상이 마지막이라는 굳은 결의와 각오로 협상에 임하였다. 그러나 사장이 계속 억지 주장만 되풀이 하며 또다시 협상이 결렬되자 이에 격분한 김윤기 동지는 공장 이전 철회에 대한 분명한 답변을 요구하며 자신의 몸에 신나를 끼얹고 항의 도중, 온몸에 펑하고 불이 붙어 쓰러져 병원으로 옮기던 중 운명하였다.
동지를 생각하며
<추모시>
열사의 무덤 앞에서
김선미(김윤기 동지의 동생)
품이 넉넉한 오빠대신에
세상을 껴안기로 했지요.
세상은 내 한몸으로 보듬을 수 없을 만큼
크고, 넓고, 깊고 무겁지만
삶과 죽음이 가로 놓여 가까이 가려해도
갈 수 없는 오라버니 따스한 품속보다
차라리 오라버니가 껴안으려 했던 세상을
보듬기로 했습니다.
그 편이 덜 안타깝고 속 있는 일이라 생각이 듭니다.
가까이 가서 품에 다아본 세상은
삐죽삐죽 가시가 돋아 있기도 하고
뭉글뭉글 어머니 젖가슴 마냥 귀퉁이 밖에 안되겠지만
칙칙한 흙 속에 갇힌 오라버니 몸뚱이보담
따스함을 가진 사람들이 부대끼고 살아가는 세상이
훨씬 살아있을 적 오라버니를 닮았지요.
이제 속절없이 오라버니 곁에 함께 있지 못함을 서운해 하지는
않을 겁니다.
오라버니가 불덩이를 이고 걸었던 노동해방의 길에
태우다 사그라든 불을 지펴 놓을랍니다.
오빠가 짐졌던 죽은자리 대신에
보란 듯 노동자 세상을 채우겠습니다.
동지가 남긴 글
<편 지 1>
부모님께
날씨가 무척이나 더워지고 있습니다. 아버님 병환은 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선미는 학교에 잘 다니고 있겠지요. 영기는 너무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제 할 일은 잘 알아서 할 것입니다.
제가 구속이 된지도 벌써 두달이 다 되어갑니다. 많은 걱정을 하신 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 대학에 갈려고 결정하였을 때는 그 동안 찌들리고 찌들어서 먹을 것, 입을 것 제대로 가리지도 못하면서 저희들 가르치시고 키우시느라 고생하시는 부모님과 저희 집과 같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능력이 닿는대로 도움을 주면서 소박하게 살아갈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대학에 들어와서 세상 넓은 줄 알고 어려운 줄 알았습니다. 그 어려움은 개인의 의지, 즉 저의 소박한 희망과는 무관하게 힘들게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또 다시 한 구석에서 저와 같은 생각을 하며 한숨지으며 살아갈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의 가난이라는 문제는 저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공통과제이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서로는 서로를 속이고 짓밟고 위에 올라서는 아수라장의 세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언젠가 한 번은 경동시장에서 리어카를 끌고 밀고 하면서 두길이나 되는 채소더미를 가지고 씨름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퍼뜩 우리가 채소가게 하던 때의 아버지 어머니 생각을 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지만 가까운 친척이나 되는 것처럼 친근하고 다정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단순히 남이 아니라 나와 같이 한국에 사는 동포, 내가 그 사람과 같고 그 사람들이 나와 같은 한국인이고 같은 피, 같은 살, 같은 생각들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입학당시의 소박한 저의 희망은 거대한 포부로 바뀌었습니다. 가족만이 아니다. 어머님, 아버님, 그리고 영기, 선미만이 가족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가족으로 느껴졌습니다.
모든 가난하고 억눌리는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저는 살아가려고 했습니다. 저도 남들과 같이 평범하게 살아볼까 생각해 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떼돈은 못 벌더라도 얄팍하게나마 부모님께 월급봉투를 내밀어 보고도 싶고 코딱지만 하지만 마당에서 세수나 할 수 있는 내 집을 갖고서 살고도 싶고, 흔히 이야기 하는 장남의 역할을 남부럽지 않게 해보고 싶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저의 모습이 처량하게까지 느껴지곤 합니다. 부모님 말씀 거역하는 망나니가 되어있고, 장래성 없는 건달이 될 것도 같고, 한 평생 남에게 도움은 못 줄 망정 거지 노릇이나 할까 겁나곤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로 제가 한 일을 잘못했다고 생각하거나 반성을 하여서는 아닙니다. 제가 가고 있는 길은 절대적으로 옳은 길입니다. 그 옳은 길이 가족의 문제와 대립적인 문제로 발생했을 때 저도 가장 힘들고 괴롭습니다. 저도 가정에 대해서, 장래에 대해서, 저에 관한 일과 함께 무척이나 많이 고민하였습니다. 그러한 녀석이 이렇게 감옥에나 들락거리고 있느냐고 말씀하시겠지만 그만한 까닭이 있습니다.
어머님은 저의 어머님이시고 우리 형제들의 어머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은 어머니에게 효도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고 기쁘게 해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는 모든 사람들의 어머니처럼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보호하고 감싸며 질서를 유지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더 크신 어머니(물론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이 국가가 소수의 권력 모리배들에게 유린당하고 악용 당하고 있을 때 저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어머니가 폭력배들에게 머리채를 끄댕기며 맞고 있을 때에 저는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둘은 모두 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저보다 똑똑한 사람 많이 있습니다. 생활이 넉넉한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제가 바로. 어머님의 아들이 왜 이렇게 되어야 하는가는 분명합니다. 누구보다 양심적이고, 누구보다 착하게 살려고 하며, 또한 성실하며 궁극적으로는 현명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멍청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바로 나 자신과 가족도 같이 위하는 길이 되고,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하자 할 때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며 마침내는 자기 무덤을 자기가 파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날씨가 무척이나 추워질 것 같습니다. 환절기에 몸조심하시고 안녕히 계십시오.
1986. 11. 11.
불효자 올립니다
<편 지 2>
아우님 보시오.
공부하랴 일들하랴 힘들게 생활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오.
참으로 즐거워할만한 일인 것 같소.
차가운 마루바닥, 거무틱틱한 보리밥, 수십명의 교도관에 팔을 뒤틀려도, 땅에 질질 끌려가도 승리의 자신감에 찬 힘찬 ‘타도’와 ‘쟁취’의 외침 뿐 우리에겐 오직 전진 뿐이오.
사랑하는 조국이 있기에, 믿음직한 동지들이 있기에, 또한 우리들의 정당함이 승리할 것을 믿기에 우리는 쓰러질 수 없고, 쓰러지지도 않을 것이오.
형을 졸지에 보지 못하게 된 설움과 방황은 짧으면 짧을수록 좋을 것 같으오.
어려운 일인 줄 알지만 모두 단합하여 한치의 틈과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일들을 풀어나가야 할 줄 아오.
어떠한 고난과 시련이 우리 앞에 닥쳐도 승리의 그날이 우리 앞에 있음을 잊지 말고 힘차게 버티며 싸워나가야 할 것이오.
어느 때보다도 혹독한 겨울이 될 것 같소. 병들지 않고 항상 푸른 나무로 자라나길 바라오.
이만 줄이오.
1986. 11. 6.
윤기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