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손구룡동지 28주기 추모제
○ 2021년 1월 29일(토) 11:00
○ 장 소: 진주 내동공원묘원
행사 정보
토요일
2022-01-29
진주 내동공원묘원
지도에서 보기
인물 정보
손구룡(당시 28세)
1966년 경남 진양출생
1985년 경상대 행정학과 입학
1991년 경상대 사회과학대 부학생회장
1991년 진양군 농촌활동 도중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
1993년 진양군 농민회 협동사업국 영업부장
1994년 2월 1일 새벽 고 김순복 동지와 함께 서울 농민대회 참석도중 함양군 형남주유소 근처 도로에서 참사, 중태. 병원으로 옮겨 입원 중 운명
1985년 경상대 행정학과 입학
1991년 경상대 사회과학대 부학생회장
1991년 진양군 농촌활동 도중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
1993년 진양군 농민회 협동사업국 영업부장
1994년 2월 1일 새벽 고 김순복 동지와 함께 서울 농민대회 참석도중 함양군 형남주유소 근처 도로에서 참사, 중태. 병원으로 옮겨 입원 중 운명
1994년 2월 1일 “UR재협상, 국회비준거부, 농업대개혁 쟁취를 위한 전국농민대회”참석을 위하여 진양군 농민회 사무실에서 아침 6시25분경 서울로 출발하였다. 전농의 지침에 따라 도 방송차량을 가지고 올라가야 했다. 이 방송차량을 손구룡, 김순복 동지가 맡기로 하고, 진양군 농민회 본대 버스 뒤를 따라 손구용 동지가 운전하는 1톤 트럭이 진주→김천 방면으로 동시에 출발하였다.
신청군의 도로는 전날 내린 비와 눈으로 얼어 빙판길이었다. 두 동지가 탄 차량이 경남 함양군 수동면 내백리 남효부락앞 S자형 커브지점 빙판길에서 미끄러져 반대편 언덕쪽으로 추락지점에서 느티나무(지름 약 30㎝)와 충돌하여 김순복 동지는 두개골 파열로 즉사하였으며 손구룡 동지는 두개골 파열로 경상대학교 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산소 호흡기로 연명하다 저녁 8시50분경에 운명하였다.
동지가 남긴 글
<1989년 1월1일-손구룡 동지의 제대수첩에서>
“이젠 나를 아는 모든 이들을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이 사회를 위해서 나아가 조국을 위해서 열심히 살 것을 다짐하나니 아홉마리 용의 비상을 꿈 꾼 내가 용의 해에 이루지 못했으니 기사년 뱀의 해는 기필코 이루리라”
추모글
열사는 이렇게 청춘을 바쳤다내
지난 2월 1일, 600만 농민이 서울 대학로로 모였다.
전국농민회총연맹, 한국여성농민회총연합, 한국농어민후계자중앙연합회, 농민단체협의회 등 어느 지역 어느 단체 할 것 없이 농민이라면 누구나 한 마음 한뜻으로 모인 것이다. 우리 6백만 농민은 자식보다 소중히 여기는 농사일을 제쳐두고 오직 UR 재협상 쟁취, UR 국회비준 거부를 목표로 모인 것이다.
이와같은 취지아래, 진양군 농민회에서 서울 대학로를 향해 진주를 떠났고 도중에 함양 근처 국도에서 두 열사는 예기치 않은 참변을 당하였다.
UR을 반대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것을 우연한 사고로 받아들일 수 없다. 열사의 죽음은 우연한 것도 사고에 의한 것도 아니다. 열사의 죽음은 국민과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저버리고 미국의 시장개방 압력에 굴복한 김영삼정권에 의해 비롯된 것이다.
강대국에 빌붙어 제 나라의 국민을 압살하는 정권을 놓고 어찌 문민정부라 할 수 있겠는가?
지난날 군사독재 정권들도 결단을 내리지 못한 UR을 문민정부의 간판을 달고 국민의 의사는 조금도 반영하지 않고 도장을 찍어 줄 수 있단 말인가?
생각컨대 김영삼정권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람이 어찌 두 열사뿐일 수 있으며 어찌 농민 뿐이랴. 열사의 죽음은 숨을 쉬어도 사실상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6백만 농민의 삶과 민족농업의 생명과 5천만 국민의 숨통을 죄는 비통한 현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열사의 죽음에서 이제 우리는 벼랑 끝에 놓인 우리 농민과 농업을 살리고, 온 국민과 민족의 재생의 활로를 본다.
열사의 뜻을 이어받아 UR을 반드시 막아내고 흔들리는 민족 정기를 기필코 회복하고야 말 것이다.
<故 김순복 故 손구룡 열사 장례위원회 자료집 中에서>
신청군의 도로는 전날 내린 비와 눈으로 얼어 빙판길이었다. 두 동지가 탄 차량이 경남 함양군 수동면 내백리 남효부락앞 S자형 커브지점 빙판길에서 미끄러져 반대편 언덕쪽으로 추락지점에서 느티나무(지름 약 30㎝)와 충돌하여 김순복 동지는 두개골 파열로 즉사하였으며 손구룡 동지는 두개골 파열로 경상대학교 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산소 호흡기로 연명하다 저녁 8시50분경에 운명하였다.
동지가 남긴 글
<1989년 1월1일-손구룡 동지의 제대수첩에서>
“이젠 나를 아는 모든 이들을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이 사회를 위해서 나아가 조국을 위해서 열심히 살 것을 다짐하나니 아홉마리 용의 비상을 꿈 꾼 내가 용의 해에 이루지 못했으니 기사년 뱀의 해는 기필코 이루리라”
추모글
열사는 이렇게 청춘을 바쳤다내
지난 2월 1일, 600만 농민이 서울 대학로로 모였다.
전국농민회총연맹, 한국여성농민회총연합, 한국농어민후계자중앙연합회, 농민단체협의회 등 어느 지역 어느 단체 할 것 없이 농민이라면 누구나 한 마음 한뜻으로 모인 것이다. 우리 6백만 농민은 자식보다 소중히 여기는 농사일을 제쳐두고 오직 UR 재협상 쟁취, UR 국회비준 거부를 목표로 모인 것이다.
이와같은 취지아래, 진양군 농민회에서 서울 대학로를 향해 진주를 떠났고 도중에 함양 근처 국도에서 두 열사는 예기치 않은 참변을 당하였다.
UR을 반대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것을 우연한 사고로 받아들일 수 없다. 열사의 죽음은 우연한 것도 사고에 의한 것도 아니다. 열사의 죽음은 국민과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저버리고 미국의 시장개방 압력에 굴복한 김영삼정권에 의해 비롯된 것이다.
강대국에 빌붙어 제 나라의 국민을 압살하는 정권을 놓고 어찌 문민정부라 할 수 있겠는가?
지난날 군사독재 정권들도 결단을 내리지 못한 UR을 문민정부의 간판을 달고 국민의 의사는 조금도 반영하지 않고 도장을 찍어 줄 수 있단 말인가?
생각컨대 김영삼정권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람이 어찌 두 열사뿐일 수 있으며 어찌 농민 뿐이랴. 열사의 죽음은 숨을 쉬어도 사실상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6백만 농민의 삶과 민족농업의 생명과 5천만 국민의 숨통을 죄는 비통한 현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열사의 죽음에서 이제 우리는 벼랑 끝에 놓인 우리 농민과 농업을 살리고, 온 국민과 민족의 재생의 활로를 본다.
열사의 뜻을 이어받아 UR을 반드시 막아내고 흔들리는 민족 정기를 기필코 회복하고야 말 것이다.
<故 김순복 故 손구룡 열사 장례위원회 자료집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