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양무 선생 22주기 추모제
○ 일 시: 2022년 1월 22일(일) 11:00
○ 장 소: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
행사 정보
토요일
2022-01-22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
지도에서 보기
인물 정보
김양무
- 1950년 9월 21일 전남 남원 출생
- 1973년 6월 10일 유신헌법 철폐 투쟁으로 연행
- 1973년 7월 10일 강제입영
- 1978년 3월 1일 완도군 외중 교사
- 1982년 4월 10일 민족통일사상연구소 설립
- 1989년 9월 전민련 조국통일 중앙위원
- 1990년 9월 범민련 준비위 준비위원
- 1990년 11월 민자통 중앙회의 중앙위원
- 1993년 7월 범민련 준비위 정책위원장
- 1994년 7월 5일 범민련 광주·전남 결성사건으로 구속
- 1995년 11월 29일 범민련 남측본부 결성사건으로 구속
- 1997년 범민련 남측본부 상임부의장
- 1997년 7월 19일 이북 큰물피해돕기 사업으로 구속
- 1998년 8월 9차 범민족대회 남측추진본부장
- 1998년 8월 19일 범민족대회 관련 구속
- 1998년 10월 13일 서울구치소에서 혈변증세를 보여 안양병원 이송 → 직장암 진단으로 구속집행 정지 출소
- 1998년 11월 26일 전남대병원에서 직장암 수술
- 1999년 6월 3일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을 위한 99통일대축전 10차 범민족대회 남측추진본부추진본부장 추대
- 1999년 8월 16일 체포영장 발부에 항의하고 향후 범투본 투쟁을 위해 명동성당 농성투쟁 돌입
- 1999년 10월 22일 암이 신체 각 부위에 전이된 상태로 비밀리에 병원에 입원. 그러나 현 정권은 반인륜적, 반통일적 탄압으로 일관
- 2000년 1월 26일 운명
- 1973년 6월 10일 유신헌법 철폐 투쟁으로 연행
- 1973년 7월 10일 강제입영
- 1978년 3월 1일 완도군 외중 교사
- 1982년 4월 10일 민족통일사상연구소 설립
- 1989년 9월 전민련 조국통일 중앙위원
- 1990년 9월 범민련 준비위 준비위원
- 1990년 11월 민자통 중앙회의 중앙위원
- 1993년 7월 범민련 준비위 정책위원장
- 1994년 7월 5일 범민련 광주·전남 결성사건으로 구속
- 1995년 11월 29일 범민련 남측본부 결성사건으로 구속
- 1997년 범민련 남측본부 상임부의장
- 1997년 7월 19일 이북 큰물피해돕기 사업으로 구속
- 1998년 8월 9차 범민족대회 남측추진본부장
- 1998년 8월 19일 범민족대회 관련 구속
- 1998년 10월 13일 서울구치소에서 혈변증세를 보여 안양병원 이송 → 직장암 진단으로 구속집행 정지 출소
- 1998년 11월 26일 전남대병원에서 직장암 수술
- 1999년 6월 3일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을 위한 99통일대축전 10차 범민족대회 남측추진본부추진본부장 추대
- 1999년 8월 16일 체포영장 발부에 항의하고 향후 범투본 투쟁을 위해 명동성당 농성투쟁 돌입
- 1999년 10월 22일 암이 신체 각 부위에 전이된 상태로 비밀리에 병원에 입원. 그러나 현 정권은 반인륜적, 반통일적 탄압으로 일관
- 2000년 1월 26일 운명
’80년 5월 광주민중항쟁 이후 ’82년 4월 10일 민족통일사상연구소를 설립하여 광주자주화 투쟁 정신과 통일문제의 연결점을 찾는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통일운동의 새로운 모색을 위한 활동에 힘을 쏟았다. ’87년 6월 항쟁 등 민중들의 민주화운동은 자주통일운동으로 승화되어 ’90년대 조국통일운동이 활성화되는 조건을 마련하였다. <br>
김영삼정권은 민간통일운동에 대한 탄압을 통해 분단체제의 기득권과 통치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범민련을 중심으로 조국통일운동을 전개해 나가던 동지는 분단 통치기구인 안기부에 의해 무수한 감시와 위협, 고문에 시달렸다.<br>
’97년 7월 10일 사상 초유의 물난리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북동포들의 소식을 접하고 ‘이북 큰물피해 돕기 사업’을 진행하던 중 안기부에 연행되어 간첩으로 날조하려는 고문과 폭행을 당하며 광주교도소에 구속되었다<br>
이러한 투쟁 속에서 직장암을 얻게 되었고 ’98년 11월 26일 직장암 수술이후, 범민련 남측본부 활동을 재개하였으며 ’99년 범민족대회 남측본부 추진본부장으로 범민족대회 직후 체포영장이 발부되었으나 이에 항의하며 명동성당에서 농성투쟁을 전개하다 건강이 악화돼 ’00년 1월 26일 운명하였다.<br>
김영삼정권은 민간통일운동에 대한 탄압을 통해 분단체제의 기득권과 통치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범민련을 중심으로 조국통일운동을 전개해 나가던 동지는 분단 통치기구인 안기부에 의해 무수한 감시와 위협, 고문에 시달렸다.<br>
’97년 7월 10일 사상 초유의 물난리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북동포들의 소식을 접하고 ‘이북 큰물피해 돕기 사업’을 진행하던 중 안기부에 연행되어 간첩으로 날조하려는 고문과 폭행을 당하며 광주교도소에 구속되었다<br>
이러한 투쟁 속에서 직장암을 얻게 되었고 ’98년 11월 26일 직장암 수술이후, 범민련 남측본부 활동을 재개하였으며 ’99년 범민족대회 남측본부 추진본부장으로 범민족대회 직후 체포영장이 발부되었으나 이에 항의하며 명동성당에서 농성투쟁을 전개하다 건강이 악화돼 ’00년 1월 26일 운명하였다.<b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