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 시: 2021년 10월 19일(화) 13:00
○ 장 소: 마석 민족민주열사묘역
행사 정보
인물 정보
최종길(당시 42세)
1955년 3월 서울대 법대 졸업
1955년 5월 서울대 법대 석사과정
1958년 서독 쾰른대 박사과정, 박사학위 취득
1962년 서울대 법대 교수
1973년 10월 16일 중앙정보부에 출두
1973년 10월 19일 조사받던 중 의문의 죽음을 당함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잔상규명 결과 중앙정보부 고문 과정에서 숨져 추락사로 위장하여 조작한 사실이 밝혀짐.
- 제 191차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인정자
중앙정보부는 73년 10월 25일 [유럽거점 대규모 간첩단]을 적발하였다고 발표하였다.
그 명단에는 73년 10월 19일 중앙정보부에서 의문사한 서울대 법대 교수 최종길씨도 들어 있었다.
이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해명은 최씨가 “범행사실을 자백한 후 국내 간첩조직망에 대한 여죄를 조사받던 중 용변을 보겠다고 변소에 가 투신자살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박정권은 유신체제에 대한 국내외적인 비난을 모면하기 위해 간첩단 조작음모를 꾸미고 있었고, 중앙정보부의 연락을 받고 최씨가 출두하기 이전 동베를린을 거쳐 평양에 다녀온 것으로 사건 조서가 꾸며져 있었고, 투신했다는현장을 공개하지 않고, 부검을 완강히 거부한 속에서 유가족을 협박해 장례를 급히 치루게 만든 점은 고문에 의한 타살을 은폐하기 위한 술책으로 간주된다.
동지를 생각하며 <1988년 10월 19일 故 최종길 서울법대교수의 죽음 15주기를 맞아 평화신문에 실린 ‘15년 갇힌 죽음, 이젠 풀어야 한다’ 축약>
1973년 10월 16일 오후 2시,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수사중이던 간첩사건에 대하여 수사협조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자진출두한 서울법대 최종길 교수는 끝내 살아 동아오지 못했다. 중앙정보부는 최 교수가 “동베를린에 갔다온 것이 밝혀지자 양심의 가책을 못이겨”, 용변 중 7층 건물에서 뛰어내려 1973. 10. 19. 오전 1시 30분 자살하였다고 유가족을 기만하고 강압하여 서둘러 비밀리에 장례를 치르게 했다.
장례가 끝난 뒤인 10월 25일, 중앙정보부는 최교수가 “범행사실을 자백한 후 국내 간첩조직망에 대한 여죄를 조사받던 중 용변을 보겠다고 변소에 가 투신자살했다.”고 다르게 발표했다.
최종길 교수의 의문의 죽음에 대한 항의와 진상규명 요구가 교수, 사제단, 재야 인권운동 부문에서 높아져 갔으나 중앙정보부를 상대로 진상규명을 기댜한다는 것은 애시당초 무망한 일이었고, 88년 ‘서울의 봄’이 잠시 왔을 때 서울법대학생회를 중심으로 진상규명 운동이 준비되었으나 5.17로 또다시 무산되었다.
박정희정권이 쿠데타를 집권한 이래 중앙정보부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위세 당당한 권력기관이 되어 외국에까지 악명높은 비밀경찰조직으로 널리 알려졌다.
1972년 10월 유신정변이후 학원에서 유신반대투쟁이 서서히 조직되기 시작했고, 1973년 8월 8일에는 김대중 전신민당 대통령 후보를 납치하는 사건이 일어나 세계의 이목이 박정권과 중앙정보부에 집중되고 있었다.
따라서 정치권력으로서는 국내외의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릴 필요성이 있었고 학원의 반유신투쟁에 찬물을 끼얹을 필요가 있었다.
그 때 수사하고 있었떤 간첩단 사건과 그 사건에 최종길 교수의 의도적으로 접합시킨 것은 결코 우연만은 아니라는 것이 사제단의 견해이며, 또 대부분의 관심있는 내.외국민의 시각도 마찬가지이다.
더구나 최종길 교수는 중앙정보부에 가기 며칠 전 교수회의 석상에서 학생들의 처벌에 반대하고 학생들에 대한 폭행을 중앙정보부에 항의하자고 주장하였다.
또한 가족이 확인하여 기록한 양심선언에 의하면, 간첩사건에 대한 실질적인 조사는 이미 최 교수가 연행되던 10. 16.일 이전에 완전 종결되었고, 감찰송치를 위한 의견서가 완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투신 자살 운운하며 최교수에 간첩누명을 씌우려던 중앙정보부의 수사결과가 허구요 거짓임을 입증하는 사실들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간단히 살펴보자.
1) 최교수가 죽고난 뒤 중앙정보부측이 가족에게 말한바가 ‘동베를린엘 다녀온 사실이 밝혀지자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자살했다’고 했다가 ‘평양에 다녀온 사실이 밝혀지자’로 둔갑했는가 하면, 공식발표문에는 ‘국내조직을 대라고 하지 이에 불응 투신자살’ 등으로 횡설수설 번복하고 있다.
2) 가족에게 투신자살 현장을 공개하지 않았다(그러나 10. 19일 당시 중앙정보부 감찰실에 근무중이던 최종길 교수의 친동생 최종선씨가 비밀리에 극적으로 확인한 바에 의하면 현장에는 유혈이나 유혈을 씻어낸 물자국의 흔적이 없었다고 한다.)
3) 사체부검에 최 교수측의 변호인과 의료진의 입회를 중앙정보부가 완강히 거부했다.
4) 새벽 1시 30분이라면 중앙정보부의 모든 창문은 안으로 잠겨져 있는 시간이다. 그렇다면 창문을 열고 변기앞부리-->변기꼭대기-->창턱을 거쳐 뛰어내리기까지는 어느 한 가지 동작에서도 실수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12초가 걸리게 된다. 그러나 최 교수는 잠그는 장치에 익숙치도 않았을 것이고 작고 뚱뚱한 몸집이며 더구나 조사 과정이므로 허리띠를 풀어놓은 상태에서 수사관에 6m 거리를 두고 투신을 했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다.
5) 가족들에 의하면 10. 19. 최 교수가 사망 직후 장송록 수사단장은 가족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처음 이틀 동안은 범행을 완전 부인했기 때문에 지하실에서 조사를 했으나, 어제(18일)부터는 심경변화를 일으켜 순순히 자백하므로 아늑한 7층 호텔방으로 옮겨 조사하던 중 용변을 보겠다기에... 투신하셨다는 겁니다. 밤중에 빨리 들어오라는 전화가 왔기에 나는 지하실에서 물을 먹이다가 일어난 사고로 생각하고 달려왔더니 투신 자살하셨다는 겁니다.” 결국 지하실에서의 고문, 물을 먹인 사실을 간접적으로나마 얼떨결에 시인하고 있는 셈이다.
6) 또한 중앙정보부는 최 교수가 죽은 뒤 가족들에게 막대한 보상금을 제공하겠다고 하면서 침묵을 지키록 강요하였으나 가족들은 그것이 허위조작을 시인하는 것이 되므로 강력히 거절.저항하였다. 그러나 중앙정보부는 장례식이 끝나자 태도를 돌변하고 10월 25일자 동아일보에 「유럽거점 대규모 간첩단 적발」이라는 대문짝만한 제목과 함께 최 교수에 대한 죄상을 근거나 증거도 없이 늘어놓으며 사건을 마무리 지었고 이후 깊은 미궁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던 것이가.
70년대 초반 가혹한 노동조건에 분신으로 항거한 전태일 열사의 죽음과 유신독재 권력의 고문에 의한 최종길 교수의 죽음은 70년대의 수탈과 전체적 억압을 상징하고, 또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15년이 넘도록 올바른 사인규명을 요구하는 뚜렷한 움직임이 없었다는 것은 유신독재의 연장선속에서 5공, 6공이 그대로 한국 현대사회의 암흑을 이루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정권의 조작된 ‘간첩단 사건’으로 최종길 교수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음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제 최종길 교수의 죽음의 진상을 완전히 볏겨 독재권력의 본질을 국민앞에 폭로하는 것만이 앞으로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우리의 책임이요 의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