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성완희열사 33주기 추모제
○ 일 시: 2021년 7월 3일(토) 10:00
○ 장 소: 마석 민족민주열사묘역
○ 일 시: 2021년 7월 3일(토) 10:00
○ 장 소: 마석 민족민주열사묘역
행사 정보
토요일
2021-07-03
마석 민족민주열사묘역
지도에서 보기
인물 정보
성완희(당시 29세)
1959년 6월 24일 충북 제천 출생
1974년 초등학교 졸업후 서울로 상경, 봉제공장에 취업
1986년 10월 태백시 철암동 강원탄광에 채탄후산부로 입사
1987년 8월 파업시 노동자 대표로 선출되어 파업을 승리로 이끔
1988년 2월 경비직으로 부당 전직 당했다가 투쟁으로 원직복귀
1988년 6월 21일 동료해고자 복직을 위해 시위에 돌입
1988년 6월 29일 노조사무실에서 5명이 단식농성중 어용노조 대의원 정대식 등의 각목 습격에 맞서 온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분신
1988년 7월 8일 원주 기독병원에서 운명
1974년 초등학교 졸업후 서울로 상경, 봉제공장에 취업
1986년 10월 태백시 철암동 강원탄광에 채탄후산부로 입사
1987년 8월 파업시 노동자 대표로 선출되어 파업을 승리로 이끔
1988년 2월 경비직으로 부당 전직 당했다가 투쟁으로 원직복귀
1988년 6월 21일 동료해고자 복직을 위해 시위에 돌입
1988년 6월 29일 노조사무실에서 5명이 단식농성중 어용노조 대의원 정대식 등의 각목 습격에 맞서 온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분신
1988년 7월 8일 원주 기독병원에서 운명
노태우가 위대한 보통사람의 시대를 열었다며 자축연을 벌이던 6·29 1주년이 되던 날,
강원도 태백시 강원탄광 노동자 성완희 동지는 “광산쟁이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아보자”고 절규하며 뜨겁디 뜨거운 청춘을 불살랐다.
동지는 1987년 8월 동료 이기만씨와 함께 파업을 주동한 후 회사 측의 계속적인 탄압에
맞서 싸워왔으며 87년 12월과 88년 2월 두 차례나 부당 해고를 당했으나 성완희 동지와
그의 동료들의 헌신적인 투쟁을 통해 복직을 쟁취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기만 동료가 자신의 복직투쟁을 도와준 혐의로(성완희 동지 복직호소 유인물 뿌림) 2월 2일 해고되자 자신의 일보다 더 열심히 복직투쟁을 전개하였고, 결국 노동부와 지방 노동위원회에서도 복직판정과 복직명령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강원탄광측이 이를 무시, 거부하자 6월22일 이기만 씨는 단식에 돌입하였고 성완희 동지도 동료들과 함께 복직투쟁에 참여하였다. 이씨의 생명을 건 단식 8일째인 6월29일 ‘이대로 두면 우리의 이기만이가 죽는다’며 동지는 동료 5명과 함께 휘발유 1통, 석유 1통을 들고 노조사무실에 들어가 문 2개를 못질하여 폐쇄하고 단식농성에 돌입하였다.
12시반경, 두차례나 문을 뜯고 창문을 깨고 정대식 등 구사대원들이 진입을 시도하자 성완희 동지는 “들어오기만 하면 분신하겠다”고 말하였으나 정대식이 “할테면 해봐라”고 무시하며 쇠파이프와 각목을 들고 난입하였고 성완희 동지는 휘발유를 끼얹고 성냥불을 그었다.
화염에 휩싸이자 동료 윤두원씨가 “같이 죽자”며 껴안아 윤씨도 배에 화상을 입었다. 성완희 동지는 화염에 싸인 채 “부당해고 철회하라” “인권탄압 중지하라” “광산쟁이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아보자” 외치며 밖으로 뛰쳐나가 노조 앞 큰길에 쓰러져서도 “강원산업에 제발…민주노조좀… 건설해 주십시오”라며 절규하였다.
성완희 동지는 온몸 75% 3도 화상을 입고 10일간 죽음과 싸우다 7월8일 아침 7시20분 끝내 운명하였다.
강원도 태백시 강원탄광 노동자 성완희 동지는 “광산쟁이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아보자”고 절규하며 뜨겁디 뜨거운 청춘을 불살랐다.
동지는 1987년 8월 동료 이기만씨와 함께 파업을 주동한 후 회사 측의 계속적인 탄압에
맞서 싸워왔으며 87년 12월과 88년 2월 두 차례나 부당 해고를 당했으나 성완희 동지와
그의 동료들의 헌신적인 투쟁을 통해 복직을 쟁취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기만 동료가 자신의 복직투쟁을 도와준 혐의로(성완희 동지 복직호소 유인물 뿌림) 2월 2일 해고되자 자신의 일보다 더 열심히 복직투쟁을 전개하였고, 결국 노동부와 지방 노동위원회에서도 복직판정과 복직명령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강원탄광측이 이를 무시, 거부하자 6월22일 이기만 씨는 단식에 돌입하였고 성완희 동지도 동료들과 함께 복직투쟁에 참여하였다. 이씨의 생명을 건 단식 8일째인 6월29일 ‘이대로 두면 우리의 이기만이가 죽는다’며 동지는 동료 5명과 함께 휘발유 1통, 석유 1통을 들고 노조사무실에 들어가 문 2개를 못질하여 폐쇄하고 단식농성에 돌입하였다.
12시반경, 두차례나 문을 뜯고 창문을 깨고 정대식 등 구사대원들이 진입을 시도하자 성완희 동지는 “들어오기만 하면 분신하겠다”고 말하였으나 정대식이 “할테면 해봐라”고 무시하며 쇠파이프와 각목을 들고 난입하였고 성완희 동지는 휘발유를 끼얹고 성냥불을 그었다.
화염에 휩싸이자 동료 윤두원씨가 “같이 죽자”며 껴안아 윤씨도 배에 화상을 입었다. 성완희 동지는 화염에 싸인 채 “부당해고 철회하라” “인권탄압 중지하라” “광산쟁이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아보자” 외치며 밖으로 뛰쳐나가 노조 앞 큰길에 쓰러져서도 “강원산업에 제발…민주노조좀… 건설해 주십시오”라며 절규하였다.
성완희 동지는 온몸 75% 3도 화상을 입고 10일간 죽음과 싸우다 7월8일 아침 7시20분 끝내 운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