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석광수동지 30주기 추모제
○ 일 시: 2021년 6월 23일(수) 11:30
○ 장 소: 마석 민족민주열사묘역
○ 일 시: 2021년 6월 23일(수) 11:30
○ 장 소: 마석 민족민주열사묘역
행사 정보
수요일
2021-06-23
마석 민족민주열사묘역
지도에서 보기
인물 정보
석광수(당시 30세)
1961년 강원도 삼척군 출생
1982년 강국택시에서 3년간 근무
1986년 인천 공성교통에 입사
1991년 6월 14일 지도부 연행에 항의, 차량시위에 적극 참가.
1991년 6월 15일 지도부 석방을 요구하며 분신
1991년 6월 24일 10시 28분 운명
1982년 강국택시에서 3년간 근무
1986년 인천 공성교통에 입사
1991년 6월 14일 지도부 연행에 항의, 차량시위에 적극 참가.
1991년 6월 15일 지도부 석방을 요구하며 분신
1991년 6월 24일 10시 28분 운명
6월14일 회사측의 성실한 교섭 자세를 촉구하기 위한 차량시위 도중에 경찰의 폭력적인 조합원 연행에 항의하여 6월 15일 총파업 돌입과 함께 공권력의 폭력진압과 무자비한 강제 연행에 항의하던 석광수 동지는 사업주의 비열하고, 무책임한 임금협상에 온몸으로 항거하다 분신, 그는 가족과 동지들의 안타까운 염원을 뒤로하고 24일 운명하였다. 그러나 회사측은 사태의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이사장이 잠적하였다. 이에 가족들의 보름이 넘는 농성과 노조 집행부의 노력으로 보상금, 장례비, 치료비를 받아내고 장례를 치루었다.
동지를 생각하며
석광수 동지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석광수 동지는 1961년생으로 강원도 삼척군 하장면 추동리에서 출생하여, 77년 세일포장에서 13만원의 임금노동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였다. 20살때 인천에 상경하여 계산동 주차장에 취직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자취생활을 시작하였다. 82년 부평 한시택시인 강국택시에 입사, 3년간 근무하다가 취업을 하고 있지 못한 친구를 위해 그 자리를 물려주고 강국택시를 퇴사했다. 86년 3월 공성교통에 입사하여 거의 만근을 할 만큼 성실히 근무생활을 하였고, 계산동 노틀담 수녀원에서 벌이고 있는 장애자 돕기 후원회원으로 없는 살림에 매달 3만원씩 후원회비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석광수 동지는 친구소개로 91년 4월6일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보증금 150만원에 월세 10만원짜리 사글세방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91년 3월 노조 대의원으로 피선되어 현 박용주 조합장을 도와 모든 조합 활동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한다. 석 동지는 6월14일 차량시위 당시 경찰들의 폭력적인 차량견인에 항의하여 선두에 서서 싸웠다. 지도부 및 조합원 동지 210여명이 연행된 이후 석광수동지는 회사로 돌아와 분신 4시간전 경에 이러한 말을 했다고 한다.
내가 모범기사라, 민자당 물을 좀 먹었지만 이 ××들! 해도 너무 한다. 우리가 차를 세워두어야 하는거야? 임금교섭 도중에 지부장을 끌고 가고 이건 말도 안되는 공권력개입이다. 2시가 넘어 이웃회사 차들이 몇 대 들어오자 석광수 동지는 차를 세워 놓고 끝까지 싸워야한다. “혼자만 벌어먹고 살려고 하면 하루 갈 것이 일주일 간다”며 열변을 토하기도 하였다. 밤새 북을 치며 노동가를 부르다가 6시20분경 분신한 것이다.
동지의 성급한 행동을 막지 못했던 우리들이 한스럽다. 석광수 동지의 죽음이 조직의 단결력 강화로 승화될 수 있도록 모든 동지들은 단호하게 투쟁하여 나아갑시다.
<성명서>
故 석광수 열사의 의로운 죽음을 애도하며
우리는 석광수 열사가 32살의 젊은 나이에, 그것도 결혼한 지 두달만에 사랑하는 가족과 동료들을 남겨두고 분신한 지 열흘만인, 6월24일 오전 운명을 달리함에 비통함을 금할 길 없다.
터져나오는 울분을 깨물며, 우리는 석광수 열사의 죽음을 지금도 택시지부 교섭위원 10여명을 고발하는 작태를 보인 인천택시사업조합의 파렴치한 교섭자세와 경찰당국의 무자비한 폭력이 불러 일으킨 타살임을 분명히 밝혀둔다.
‘91년 봄 인천, 서울, 광주, 대전, 성남, 여수, 목포 지역의 택시 노동자들이 파업투쟁을 벌이고, 자신의 목숨을 끊어 항거하는 극한 상황은 결코 우연적인 현상이 아니며, 어느 몇 사람의 선동에 의한 것도 아니다. 짓밟힐 대로 짓밟히고, 생존의 벼랑 끝에 내몰린, 전국 13만 택시 노동자들의 한맺힌 절규가 각지에서 터져 나오고 있고, “집권 여당인 민자당이 설마 그렇게까지 나올줄 몰랐다”며 석광수 열사 또한 분신하며 절규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분명히 밝혀 둔다.
자신의 탐욕만을 찾으려고 혈안이 된 사업주들과, 이를 비호해 온 노동부와 관계당국이 석광수 열사의 죽음에 명백한 책임이 있음을!
우리는 석광수 열사의 죽음을 결코 헛되이 하지 않을 것이다. 신혼의 단꿈에 빠져 있어야할 젊은 노동자를, 분신이라는 극한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명할 수 밖에 없도록, 벼랑끝으로 내몬 참담한 현실을 결코 후대에는 물려주지 않을 것이며, 이것이 살아있는 우리들의 책임임을 다짐한다.
석광수 열사의 영정 앞에서 우리는 옷깃을 여미며, 또한 투쟁의지를 가다듬으며 다음과 같은 사항을 요구한다!
1. 인천택시사업조합은 지부간부에 대한 고발을 즉시 취하하고, ‘91년 임금교섭에 성실히 응하여, 인천택시지부의 요구를 전면 수용하라!
2. 인천택시사업조합은 석광수열사의 유족과 전국 13만 택시노동자에게 공개 사과하고, 유족에 대한 보상을 즉시 이행하라!
3. 경찰당국은 무자비한 연행, 폭력, 구속사태를 자행한 경찰 책임자를 문책하고 공개 사죄하라!
4. 노동부, 교통부, 시청등 관계당국은 벼랑 끝에 내몰린 택시노동자의 생존권을 제도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을 수립하라!
우리는 위와 같은 요구조건이 전면 관철될 때까지, 단호히 투쟁할 것이다. 사업조합과 관계당국이 여전히 무성의로 일관한다면 가족의 의사를 존중하여 장례를 무기한 연기하고, 석광수 열사와 생사를 함께 할 것이다.
1991. 6. 24.
故 석광수열사 장례대책위원회 전택노련 인천시지부
동지를 생각하며
석광수 동지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석광수 동지는 1961년생으로 강원도 삼척군 하장면 추동리에서 출생하여, 77년 세일포장에서 13만원의 임금노동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였다. 20살때 인천에 상경하여 계산동 주차장에 취직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자취생활을 시작하였다. 82년 부평 한시택시인 강국택시에 입사, 3년간 근무하다가 취업을 하고 있지 못한 친구를 위해 그 자리를 물려주고 강국택시를 퇴사했다. 86년 3월 공성교통에 입사하여 거의 만근을 할 만큼 성실히 근무생활을 하였고, 계산동 노틀담 수녀원에서 벌이고 있는 장애자 돕기 후원회원으로 없는 살림에 매달 3만원씩 후원회비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석광수 동지는 친구소개로 91년 4월6일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보증금 150만원에 월세 10만원짜리 사글세방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91년 3월 노조 대의원으로 피선되어 현 박용주 조합장을 도와 모든 조합 활동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한다. 석 동지는 6월14일 차량시위 당시 경찰들의 폭력적인 차량견인에 항의하여 선두에 서서 싸웠다. 지도부 및 조합원 동지 210여명이 연행된 이후 석광수동지는 회사로 돌아와 분신 4시간전 경에 이러한 말을 했다고 한다.
내가 모범기사라, 민자당 물을 좀 먹었지만 이 ××들! 해도 너무 한다. 우리가 차를 세워두어야 하는거야? 임금교섭 도중에 지부장을 끌고 가고 이건 말도 안되는 공권력개입이다. 2시가 넘어 이웃회사 차들이 몇 대 들어오자 석광수 동지는 차를 세워 놓고 끝까지 싸워야한다. “혼자만 벌어먹고 살려고 하면 하루 갈 것이 일주일 간다”며 열변을 토하기도 하였다. 밤새 북을 치며 노동가를 부르다가 6시20분경 분신한 것이다.
동지의 성급한 행동을 막지 못했던 우리들이 한스럽다. 석광수 동지의 죽음이 조직의 단결력 강화로 승화될 수 있도록 모든 동지들은 단호하게 투쟁하여 나아갑시다.
<성명서>
故 석광수 열사의 의로운 죽음을 애도하며
우리는 석광수 열사가 32살의 젊은 나이에, 그것도 결혼한 지 두달만에 사랑하는 가족과 동료들을 남겨두고 분신한 지 열흘만인, 6월24일 오전 운명을 달리함에 비통함을 금할 길 없다.
터져나오는 울분을 깨물며, 우리는 석광수 열사의 죽음을 지금도 택시지부 교섭위원 10여명을 고발하는 작태를 보인 인천택시사업조합의 파렴치한 교섭자세와 경찰당국의 무자비한 폭력이 불러 일으킨 타살임을 분명히 밝혀둔다.
‘91년 봄 인천, 서울, 광주, 대전, 성남, 여수, 목포 지역의 택시 노동자들이 파업투쟁을 벌이고, 자신의 목숨을 끊어 항거하는 극한 상황은 결코 우연적인 현상이 아니며, 어느 몇 사람의 선동에 의한 것도 아니다. 짓밟힐 대로 짓밟히고, 생존의 벼랑 끝에 내몰린, 전국 13만 택시 노동자들의 한맺힌 절규가 각지에서 터져 나오고 있고, “집권 여당인 민자당이 설마 그렇게까지 나올줄 몰랐다”며 석광수 열사 또한 분신하며 절규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분명히 밝혀 둔다.
자신의 탐욕만을 찾으려고 혈안이 된 사업주들과, 이를 비호해 온 노동부와 관계당국이 석광수 열사의 죽음에 명백한 책임이 있음을!
우리는 석광수 열사의 죽음을 결코 헛되이 하지 않을 것이다. 신혼의 단꿈에 빠져 있어야할 젊은 노동자를, 분신이라는 극한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명할 수 밖에 없도록, 벼랑끝으로 내몬 참담한 현실을 결코 후대에는 물려주지 않을 것이며, 이것이 살아있는 우리들의 책임임을 다짐한다.
석광수 열사의 영정 앞에서 우리는 옷깃을 여미며, 또한 투쟁의지를 가다듬으며 다음과 같은 사항을 요구한다!
1. 인천택시사업조합은 지부간부에 대한 고발을 즉시 취하하고, ‘91년 임금교섭에 성실히 응하여, 인천택시지부의 요구를 전면 수용하라!
2. 인천택시사업조합은 석광수열사의 유족과 전국 13만 택시노동자에게 공개 사과하고, 유족에 대한 보상을 즉시 이행하라!
3. 경찰당국은 무자비한 연행, 폭력, 구속사태를 자행한 경찰 책임자를 문책하고 공개 사죄하라!
4. 노동부, 교통부, 시청등 관계당국은 벼랑 끝에 내몰린 택시노동자의 생존권을 제도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을 수립하라!
우리는 위와 같은 요구조건이 전면 관철될 때까지, 단호히 투쟁할 것이다. 사업조합과 관계당국이 여전히 무성의로 일관한다면 가족의 의사를 존중하여 장례를 무기한 연기하고, 석광수 열사와 생사를 함께 할 것이다.
1991. 6. 24.
故 석광수열사 장례대책위원회 전택노련 인천시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