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수경동지 31주기 추모제
○ 일 시: 2021년 6월 6일(일) 11:00
○ 장 소: 대구 현대공원 1묘원 청15지구323호
○ 일 시: 2021년 6월 6일(일) 11:00
○ 장 소: 대구 현대공원 1묘원 청15지구323호
행사 정보
일요일
2021-06-06
대구 현대공원 1묘원 청15지구323호
지도에서 보기
인물 정보
김수경(당시 18세)
1972년 출생.
1988년 대구 경화여고 입학. 전교조 결성을 이유로 자신의 담임을 포함한 교사들이 해직되자 학생회 활동에 참여. 이 과정에서 학교측으로부터 문제학생으로 찍혀 고민을 했고, 교사로부터 폭행을 당함.
1989년 전교조결성시 대의원으로 교사징계반대활동 주도
1990년 경화여고 학생회 총무부장
1990년 6월 5일 밤 10시 25분경 영남대 인문관 옥상에서 투신, 운명
제 99차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인정자
1988년 대구 경화여고 입학. 전교조 결성을 이유로 자신의 담임을 포함한 교사들이 해직되자 학생회 활동에 참여. 이 과정에서 학교측으로부터 문제학생으로 찍혀 고민을 했고, 교사로부터 폭행을 당함.
1989년 전교조결성시 대의원으로 교사징계반대활동 주도
1990년 경화여고 학생회 총무부장
1990년 6월 5일 밤 10시 25분경 영남대 인문관 옥상에서 투신, 운명
제 99차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인정자
김수경 양은 부부교사인 부모의 2녀 1남 중 차녀로 태어나 모범적인 학교생활을 하였다.
중학교 때도 반장을 하고 선행상을 받았고, 성적도 우등상을 받을 정도로 우수했다.
고교시절에도 고 2때 반장을 했으며, 통지표에도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며 근면, 성실하고 명랑, 쾌활하며 책임강이 강하다고 적혀있다.
2학년 때 담임교사 최진열 교사에 의하면 “무척 책임강이 강하고, 남의 고민을 같이 아파해주며, 자기 고민을 드러내지 않는 무척 인간미가 풍부하고 여유가 있는 넉넉한 학생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1980년 초 전교조 운동 때 대구 경화 고등학교에서는 김수경 동지의 담임이었던 최진열 교사를 포함해서 모두 6명의 교사가 해직당하면서 학생회 활동에 열심히 참가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동지는 해직 반대 시위를 여러차례 주도하고 그것으로 인해 문제 학생으로 찍히게 되어 많은 고통을 당하였으나 많은 학생들이 고통에 빠진 상태에서 친구들의 고통에 대한 상담역을 하면서도 자신의 고민은 내색하지 않았다.
동지는 학생회 총무부장을 역임하면서 학생회장과 함께 학교를 이끌게 되는데 당시 대구의 다른 학생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막강했던 경화여고 학생회는 많은 탄압을 받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수경 동지는 친구와 함꼐 서진교 교사로부터 건방지다는 이유로 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동지는 폭행당해 고통스러워하는 친구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 학생회장 차은남 양에게 쪽지편지를 전해주고, “전교조와 관련해 이런 식으로 찍힌 학생은 대접을 못 받는다는 것을 알았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긴 후 최진열 교사에게 편지를 부쳤다.
결국 김수경 동지는 자신의 죽음이 왜곡되지 않길 바라며 90년 6월 5일 밤 10시 25분에 영남대 인문관 4층 옥상에서 투신, 운명하였다. 동지의 죽음은 단순한 자살이 아니라 논리와 도덕성이 결여된 군사독재 정권의 학생자치활동 탄압이 낳은 살인이며, 참교육을 지지하는 자주적인 학생활동을 탄압하는 정권에 대하여 한 여고생의 극한적인 항거였다
<동지가 남긴 글>
선생님께
선생님! 먼저 이런 글을 올리게 될 수밖에 없었던 절 용서부터 해주세요.
뭘 어떻게 써야 할지 타고 오는 버스 속에서 한참을 생각했는데 결국 남는 건, 제게 남는 건 눈물밖에 없습니다.
아마, 이 편지가 도착할 때 쯤이면 아마 전 이 세상에 없을 것 같습니다.
-----중략 -----
그때 잠깐 엄마와 담임 선생님과의 대면이 있었는데 그 틈을 이용해 은남이 선거 때 찬조연설헀던 얘기, 학교에서 주시하는 인물이라는 등 써클에 가입이 되어 있니 어쩌니 저쩌니 하는 식으로 얘기(고자질)을 했었던가봐요.
-----중략-----
그 다음날 전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 꼴을 하고는 진학실로 갔습니다.
앉자마자 대뜸 묻는 얘기 ‘무슨 생각을 하느냐’, ‘자주 만나는 선배얘기 뭐냐’, ‘전교조 선생님이 어쩌고 저쩌고’ 국사시간마다 눈은 제가 앉아있는 분단 쪽을 향했고 분단 아이들이 당황했어요.
선생님! 제가 작년에 전교조를 지지했던 것도 사실이었고 그런 선생님을 더 좋아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이유 하나만으로 제가 학교다니가가 불편하다면 아니 고통스럽다면 이미 그곳은 학교가 아닙니다.
오늘 청소시간에 자신의 말을 무시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따귀를 맞고 모든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습니다.
서진교! 그 사람은 제게 반항적인 행동을 보였느니 순종이 좋지 않느니 그러다가 퇴학이 어쩌니 저쩌니 앞으로 사회생활이 어쩌니 저쩌니 그러곤 자신이 너무 했었다고
---- 아무 감정이 없었다고---- 확실히 전 학교가 주시하고 있는 주요인물이었습니다.
그게 너무 서럽고---- 더러운 세상(죄송합니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두들 제가 걸려들기만을 기다렸던 것 같았습니다. 이제 왜 제가 죽으려고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처음엔 아무런 글귀 하나도 남겨 놓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분명 제가 죽은 후 세상은 절 성적 때문에 비관자살을 헀노라고 그렇게 왜곡되는게 싫어서였습니다.
이런 제자 둔 것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시구요.
건강하세요.
전교조를 지지했던 게 죄가 된다면 법정에서 떳떳이 죗값을 받고 싶습니다.
p.s. 선생님 사랑합니다. 90. 6. 5. 수경올림
중학교 때도 반장을 하고 선행상을 받았고, 성적도 우등상을 받을 정도로 우수했다.
고교시절에도 고 2때 반장을 했으며, 통지표에도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며 근면, 성실하고 명랑, 쾌활하며 책임강이 강하다고 적혀있다.
2학년 때 담임교사 최진열 교사에 의하면 “무척 책임강이 강하고, 남의 고민을 같이 아파해주며, 자기 고민을 드러내지 않는 무척 인간미가 풍부하고 여유가 있는 넉넉한 학생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1980년 초 전교조 운동 때 대구 경화 고등학교에서는 김수경 동지의 담임이었던 최진열 교사를 포함해서 모두 6명의 교사가 해직당하면서 학생회 활동에 열심히 참가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동지는 해직 반대 시위를 여러차례 주도하고 그것으로 인해 문제 학생으로 찍히게 되어 많은 고통을 당하였으나 많은 학생들이 고통에 빠진 상태에서 친구들의 고통에 대한 상담역을 하면서도 자신의 고민은 내색하지 않았다.
동지는 학생회 총무부장을 역임하면서 학생회장과 함께 학교를 이끌게 되는데 당시 대구의 다른 학생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막강했던 경화여고 학생회는 많은 탄압을 받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수경 동지는 친구와 함꼐 서진교 교사로부터 건방지다는 이유로 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동지는 폭행당해 고통스러워하는 친구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 학생회장 차은남 양에게 쪽지편지를 전해주고, “전교조와 관련해 이런 식으로 찍힌 학생은 대접을 못 받는다는 것을 알았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긴 후 최진열 교사에게 편지를 부쳤다.
결국 김수경 동지는 자신의 죽음이 왜곡되지 않길 바라며 90년 6월 5일 밤 10시 25분에 영남대 인문관 4층 옥상에서 투신, 운명하였다. 동지의 죽음은 단순한 자살이 아니라 논리와 도덕성이 결여된 군사독재 정권의 학생자치활동 탄압이 낳은 살인이며, 참교육을 지지하는 자주적인 학생활동을 탄압하는 정권에 대하여 한 여고생의 극한적인 항거였다
<동지가 남긴 글>
선생님께
선생님! 먼저 이런 글을 올리게 될 수밖에 없었던 절 용서부터 해주세요.
뭘 어떻게 써야 할지 타고 오는 버스 속에서 한참을 생각했는데 결국 남는 건, 제게 남는 건 눈물밖에 없습니다.
아마, 이 편지가 도착할 때 쯤이면 아마 전 이 세상에 없을 것 같습니다.
-----중략 -----
그때 잠깐 엄마와 담임 선생님과의 대면이 있었는데 그 틈을 이용해 은남이 선거 때 찬조연설헀던 얘기, 학교에서 주시하는 인물이라는 등 써클에 가입이 되어 있니 어쩌니 저쩌니 하는 식으로 얘기(고자질)을 했었던가봐요.
-----중략-----
그 다음날 전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 꼴을 하고는 진학실로 갔습니다.
앉자마자 대뜸 묻는 얘기 ‘무슨 생각을 하느냐’, ‘자주 만나는 선배얘기 뭐냐’, ‘전교조 선생님이 어쩌고 저쩌고’ 국사시간마다 눈은 제가 앉아있는 분단 쪽을 향했고 분단 아이들이 당황했어요.
선생님! 제가 작년에 전교조를 지지했던 것도 사실이었고 그런 선생님을 더 좋아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이유 하나만으로 제가 학교다니가가 불편하다면 아니 고통스럽다면 이미 그곳은 학교가 아닙니다.
오늘 청소시간에 자신의 말을 무시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따귀를 맞고 모든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습니다.
서진교! 그 사람은 제게 반항적인 행동을 보였느니 순종이 좋지 않느니 그러다가 퇴학이 어쩌니 저쩌니 앞으로 사회생활이 어쩌니 저쩌니 그러곤 자신이 너무 했었다고
---- 아무 감정이 없었다고---- 확실히 전 학교가 주시하고 있는 주요인물이었습니다.
그게 너무 서럽고---- 더러운 세상(죄송합니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두들 제가 걸려들기만을 기다렸던 것 같았습니다. 이제 왜 제가 죽으려고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처음엔 아무런 글귀 하나도 남겨 놓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분명 제가 죽은 후 세상은 절 성적 때문에 비관자살을 헀노라고 그렇게 왜곡되는게 싫어서였습니다.
이런 제자 둔 것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시구요.
건강하세요.
전교조를 지지했던 게 죄가 된다면 법정에서 떳떳이 죗값을 받고 싶습니다.
p.s. 선생님 사랑합니다. 90. 6. 5. 수경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