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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행사

고 안치웅열사 33주기 추모제

고 안치웅열사 33주기 추모제

○ 일 시: 2021년 5월 23일(일) 11:00

○ 장 소: 마석 민족민주열사묘역


행사 정보

일요일 2021-05-23
지도보기 마석 민족민주열사묘역 지도에서 보기

인물 정보

안치웅

1963년 10월 17일 출생
1982년 3월 서울대 무역학과에 입학 서울대 학술동아리 ‘대학문화연구회’ 등에 가입 활동
1983년 11월 3일 학생의 날 학내 시위에 참여한 사실로 관악경찰서에 연행
1985년 3월 28일 부평역 가두시위로 구류
1985년 4월 10일 노동운동 탄압규탄 대회로 구류
1985년 6월 29일 구로공단 내 대우어패럴 근로자들의 농성에 참여한 사실로 구속,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위반죄’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김해교도소에서 수형 생활을 하다가
1986년 7월 4일 만기 출소
1987년 9월 복권되어 같은 해 특례 입학하였고, 국제경제학과 4학년 2학기 수료
1988년 2월 대학 졸업
1988년 5월 26일 평소와 같이 외출하였다가 행방불명 됨

동지는 ’82년 3월 서울대 무역학과에 입학하여, 서울대 학술동아리 ‘대학문화연구회’ 등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83년 10월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유인물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과 같은 해 11월 3일 학생의 날 학내 시위에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관악경찰서에 연행되었다.


또한 ’85년 6월 29일 구로공단 내 대우어패럴 근로자들의 농성에 참여하였다가 구속되어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위반죄’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김해교도소에서 수형 생활을 하다가 ’86년 7월 4일 만기 출소하였다.


북파공작 특수부대원이라는 박모씨는 “’86년 여름경 학생운동을 하였던 안치웅이라는 대학생을 납치·살해한 후 저수지에 수장했다”고 서울방송(SBS)에 제보하였으나, 박모씨의 소재를 파악하지 못하여 진위를 확인할 수 없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과정에서도 거의 진상규명이 되지 못한 상태이며 가족들은 아직도 애타게 동지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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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세상 기사(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61704)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하다 출소한 뒤 실종된 안치웅 열사에 대한 장례식이 실종 23년만에 치러졌다.


1982년 서울대 국제경제학과(무역학과)에 입학한 안치웅 열사는 민주화추진위원회 핵심 활동가로 1985년 구로동맹파업을 지원하다 그 해 6월 구속돼 징역 1년을 선고받고 1986년 7월4일 출소했다. 그러나 안 열사는 공안기관의 지속적인 감시 중 1988년 5월26일 오전 “아는 목사를 만나러 간다”며 집을 나선 후 행방불명됐다.
안치웅 열사가 출소한 당시, 전두환 정권은 학생-노동운동 지도부, 특히 민추위 지도부 궤멸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때다. 안 열사는 출소 이후 복학하여 88년 2월 졸업 후 실종될 때까지 기관원들의 요시찰 대상이 되어 끊임없는 감시와 미행을 당해 왔음을 여러 정황에서 알 수 있었다.
2010년 2월 박원순 변호사가 제출한 의견서에서 “의문사위원화와 민주화보상위원회의 조사자료를 보면, 안치웅은 출소후 지속적으로 감시 사찰을 받은 것으로 판단됨 .... 당시 안치웅이 감시상황에 놓였다고 추단케 하는 정황적 배경들이 확인됨 ... 공안당국의 감시사찰 상황 말고는, 달리 안치웅의 실종을 설명할 합리적 이유가 없음” 이라고 밝히고 있다.
2002년 9월과 2004년 6월 의문사진상규명위는 안씨의 행방불명과 관련, 진상규명 불능 결정을 내렸다. 이어 2009년 7월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에서도 안씨의 행방불명을 민주화운동관련 행방불명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나, 2010년 7월 재심의에서 민주화운동관련 행방불명으로 처음 인정했다.


민주열사 안치웅 장례위원회는 29일 안치웅 열사의 초혼장을 치렀다. 오전 9시30분 서울대 광장(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입관식으로 초혼장을 시작해, 유가족과 용산참사 유족 및 관계자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오전 10시 영결식이 엄수됐다.


입관식에서 안치웅 열사의 어머니 백옥심(71) 여사는 “우리 치웅이가 있었으면 이렇게 고운 옷을 입혔을 텐데...이렇게 보내야 하다니...”라며 한참을 오열해 주위를 숙연하게 했다.
영결식에서 배은심 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회장은 조사에서 “자식이 집으로 찾아올까 매일 밤 형광등을 켜놓고 지낸 세월이 자그마치 23년”이라며 “이것이 이 나라 독재정권의 실체를 그대로 보여주는 현실”이라고 고인과 유족을 위로했다.



하관식은 오후 1시경 마석 민주열사묘역에서 유족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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