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덕인열사 25주기 추모제
○ 일 시: 2018년 11월 27일(화) 19:00
○ 장 소: 민주당사 앞
행사 정보
수요일
2018-11-28
국회앞 장애인농성장
지도에서 보기
인물 정보
이덕인(당시 28세)
1967년 12월 전남 신안군 출생
1995년 6월 아암도에서 노점 시작
1995년 11월 25일 노점 철거에 반대 농성중 실종
1995년 11월 28일 오전 10시 철거 감시용 망루에서 농성중에 있던 이석근씨에 의해 발견
1995년 6월 아암도에서 노점 시작
1995년 11월 25일 노점 철거에 반대 농성중 실종
1995년 11월 28일 오전 10시 철거 감시용 망루에서 농성중에 있던 이석근씨에 의해 발견
4급 장애인이라는 힘겨운 신체 조건하에서도 노점생활로 기반을 꾸리고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가려고 성실하게 살아가던 이덕인동지는 현정권과 인천시 당국의 대책없는 노점철거에 항거하여 투쟁하다 급기야 그들에게 살해되었다.
이덕인동지는 인천시가 휴식공간 목적으로 군사보호시설 지구 철조망을 제거하자 95년 7월 3일부터 이 지역에서 전국노점상연합회 소속 장애인 22명, 빈민 20명과 함께 노점을 시작했다.
1995년 11월 24일 오전 7시 경찰과 철거용역회사 직원 등 1,500여명이 아암도의 노점상을 철거하기 위해 난입하였다. 이덕인 동지를 포함한 30여명의 노점상인들은 물리적인 힘으로는 도저히 강제철거를 막아낼 수 없다고 보고 10월경에 건설해 둔 망루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전개하였다. 경찰은 이들에게 소방차를 동원하여 물을 쏟아 붓고 돌맹이를 집어 던지면서 농성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노점상인들은 외부와 단절되어 있었으며 음식물의 반입이 차단되어 있었다. 물에 젖은 옷속으로 살인적인 추위가 밀어 닥쳤지만 대책없는 노점상 해산시도에 대해 하염없는 농성이 계속되었다.
농성 둘째날인 11월 25일 저녁 이덕인 동지는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외부로 탈출할 것을 결심하였다. 당시 준비하고 있던 사법시험의 자격상실이 걱정되기도 하였지만, 고립되고 있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외부에 소식을 알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덕인동지는 이근석과 함께 행동하기로 하고 이 날 저녁 8시 45분경 탈출을 시도하였다. 이덕인 동지가 먼저 망루를 내려갔다. 그러나 뒤따라 나오기로 했던 이근식은 경찰이 자신들을 발견하고 망루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듯하여 이덕인 동지에게 먼저 가라고 손짓한 후 다시 망루위로 올라갔다. 이것이 이덕인 동지의 마지막 생전모습이었다.
망루를 떠난 지 3일 뒤 11월 28일 오전 10시경 이덕인 동지는 농성장 근처의 아암도 앞바다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이덕인 동지를 처음 발견한 것은 농성하던 노점상인들이었다. 그때까지 극도의 허기 그리고 추위와 싸우면서 근근이 버티던 농성자들은 망루에서 50미터 가량 떨어진 바닷가에서 한 시신이 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농성자들은 즉시 이 사실을 망루 주변의 경찰에게 알리고 신원확인을 요청하였다. 그것은 다름아닌 25일 망루를 빠져 나갔던 이덕인 동지였다.
발견 당시의 이덕인 동지는 상의와 신발이 벗겨진 채 물속에 엎어져 있었으며 사체의 뒷모습을 보니 팔이 줄로 묶여 있었으며, 시신을 뒤집어 똑바로 눕히자 두 손목도 밧줄에 묶여져 있었다. 또한 시신의 얼굴과 뒷머리, 양쪽어깨, 팔 등에는 상처와 피멍이 수두룩하였으며, 동지는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시신의 손목에 포박된 줄은 노점상들이 천막을 고정하기 위해 사용하는 약 10밀리미터 두께의 줄이며 주변에 많이 널려 있던 것이었다.
시신이 발견되자 경찰은 황급히 망루를 무력적으로 철거하기 시작했고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농성자들은 이덕인 동지의 죽음으로 더욱 전의를 상실하고 농성을 중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농성자 전원은 인천 남부경찰서로 연행되어 갔다.
한편 시신은 11월 28일 오전 11시 50분 유가족들에 의해 세광병원으로 옮겨졌다. 이 날 남인천의원 원장 박용섭이 검안하였는데, 그는 “얼굴과 팔, 상체 등에 상처와 피멍든 자국이 선명한 것으로 보아 구타에 의한 사망으로 추정된다.”고 자신의 소견을 말하였다. 이 날 오후 6시 30분 유족들은 보다 정확한 사인규명을 위하여 시신을 세광병원에서 중앙길병원으로 옮겼다.
그 다음날(11월 29일) 새벽 4시 30분경 현장을 지휘하던 경찰책임자가 방문하였다. 이 때 유가족측은 시신탈취를 막고 공정한 부검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경찰측과의 합동부검을 제안하였다. 그런데 4시 45분경 쇠파이프와 곤봉, 오함마 등으로 무장한 경찰 약 천오백여명이 벽과 유리창을 뚫고 병원영안실로 난입하였다. 당시 영안실에는 이덕인의 시신발견소식을 듣고 달려온 노점상과 학생, 시민단체회원 등 100여명이 시신을 지키고 있었다. 영장도 없이 시신을 탈취하려는 경찰과 그것을 저지하려는 사람들 간의 치열한 충돌도 잠시 시신은 곧 경찰에 의해 탈취되어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옮겨졌다. 그리고 그 날 시신을 지키던 이덕인의 형 이덕창은 시신과 함께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강제로 납치당해갔고 나머지 사람들은 많은 부상을 입은 채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시신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1시간만에 유가족의 동의 없이 부검되었으며 재부검이 불가능할 정도로 시신이 훼손된 채로 가족에게 반환되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이덕인 동지의 사인은 익사라고 발표하였다. 경찰은 이러한 부검결과를 인용하면서 이덕인 동지는 탈출하기 위해 연안부두쪽으로 수영하던 중 탈진상태에서 익사하였다고 수사결과를 발표하였다.
이덕인동지의 죽음이 경찰에 의한 타살이라는 증거로는...
① 사체발견 당시 밧줄이 다소 풀어지기는 했으나 두손이 포박된 상태로 묶여져 있었던 점.
② 최초 발견시 사체에 타박상으로 보이는 눈위의 열상(찢겨진 상처) 및 얼굴 부위와 어깨등의 좌상(피멍든 상처)이 존재했던 점.
③ 이덕인 동지가 옷을 입은 상태(이석근씨의 진술에 의하면 야전조끼를 입고 있었다고 함)로 탈출하였는데도 사체발견시에는 상의가 벗겨진 상태였다는 사실 등이 있다.
이덕인 동지의 죽음은 근본적으로 민중과 빈민들, 이 사회에서 소외받는 장애인들의 삶이 어찌되건 자신의 권력유지에만 급급해하며 그들의 생계마저 포크레인으로 가차없이 짓뭉개는 김영삼정권의 반민중적 본질에서 비롯된 것이다.
더구나 인천시당국이 노점상들의 문제를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해결하려 한 것이 아니라 경찰과 용역깡패들을 동원해 강제적으로 철거를 실시하고, 더구나 망루로 피신한 노점상들에게 물과 음식을 차단시키고 급기야 탈진한 노점상들을 향하여 추운 겨울의 강한 바닷바람에 얼어 죽도록 소방호스로 물을 뿌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황을 야기시켜 결국은 이덕인동지를 죽음으로 내몰리게 한 것은 가혹한 인권유린행위인 것이다.
추모시
이덕인 열사여 우리는 그대를 빈민해방 열사라 부른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한 이들이 있듯이
만국의 빈민들이여 이제는 단결하라고 해야 할 때입니다.
이덕인 열사의 죽음으로
이땅에는 다시는 빈민들의 죽음이 없게하고
이땅에는 다시는 노점상들의 죽음을 없도록 하고
이땅에는 빈민들의 인권이 무시 당하는 일이 없도록하여
진실로 민중이 주인되는 참세상을 이룩할 수 있도록 하여 주기를
이덕인 열사의 영정 앞에 빌고 또 빌어 봅니다.
열사가 태어나는 곳은 억압과 탄압이 없는 세상
노점상들이 자유로운 일을 할 수 있는 세상
조국을 사랑하고 남과 북이 하나되는 세상
나라가 통일이 되어 휴전선이 없는 나라
그런 세상에 살기를 간절히 발원하오니 진달래 꽃이 온 산천을 뒤 덮고 있 는
그런 세상으로 분명 갈 것입니다.
빈민이 주인되는 나라
천년만년 자유를 누리는 나라
이덕인 열사가 외치는 나라
빈민이 없고
누구나 평등히 사는 나라
홍길동이가 원하던 나라
임꺽정이가 건설하려던 나라
장길산이가 원하던 나라
그런 나라에 태어나소서
만일에 그런 나라가 아니면
농민해방을 외친 녹두장군이 되소서
이덕인 열사여
민중이 주인되는 나라가 되면
조국이 하나되는 나라가 되면
빈민이 없고 노점상이 없는
태평성대를 이루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열사여 차별이 없는 세상에서
못다한 한을 푸소서
<당시의 장례위원회 자료집 中에서>
이덕인동지는 인천시가 휴식공간 목적으로 군사보호시설 지구 철조망을 제거하자 95년 7월 3일부터 이 지역에서 전국노점상연합회 소속 장애인 22명, 빈민 20명과 함께 노점을 시작했다.
1995년 11월 24일 오전 7시 경찰과 철거용역회사 직원 등 1,500여명이 아암도의 노점상을 철거하기 위해 난입하였다. 이덕인 동지를 포함한 30여명의 노점상인들은 물리적인 힘으로는 도저히 강제철거를 막아낼 수 없다고 보고 10월경에 건설해 둔 망루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전개하였다. 경찰은 이들에게 소방차를 동원하여 물을 쏟아 붓고 돌맹이를 집어 던지면서 농성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노점상인들은 외부와 단절되어 있었으며 음식물의 반입이 차단되어 있었다. 물에 젖은 옷속으로 살인적인 추위가 밀어 닥쳤지만 대책없는 노점상 해산시도에 대해 하염없는 농성이 계속되었다.
농성 둘째날인 11월 25일 저녁 이덕인 동지는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외부로 탈출할 것을 결심하였다. 당시 준비하고 있던 사법시험의 자격상실이 걱정되기도 하였지만, 고립되고 있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외부에 소식을 알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덕인동지는 이근석과 함께 행동하기로 하고 이 날 저녁 8시 45분경 탈출을 시도하였다. 이덕인 동지가 먼저 망루를 내려갔다. 그러나 뒤따라 나오기로 했던 이근식은 경찰이 자신들을 발견하고 망루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듯하여 이덕인 동지에게 먼저 가라고 손짓한 후 다시 망루위로 올라갔다. 이것이 이덕인 동지의 마지막 생전모습이었다.
망루를 떠난 지 3일 뒤 11월 28일 오전 10시경 이덕인 동지는 농성장 근처의 아암도 앞바다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이덕인 동지를 처음 발견한 것은 농성하던 노점상인들이었다. 그때까지 극도의 허기 그리고 추위와 싸우면서 근근이 버티던 농성자들은 망루에서 50미터 가량 떨어진 바닷가에서 한 시신이 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농성자들은 즉시 이 사실을 망루 주변의 경찰에게 알리고 신원확인을 요청하였다. 그것은 다름아닌 25일 망루를 빠져 나갔던 이덕인 동지였다.
발견 당시의 이덕인 동지는 상의와 신발이 벗겨진 채 물속에 엎어져 있었으며 사체의 뒷모습을 보니 팔이 줄로 묶여 있었으며, 시신을 뒤집어 똑바로 눕히자 두 손목도 밧줄에 묶여져 있었다. 또한 시신의 얼굴과 뒷머리, 양쪽어깨, 팔 등에는 상처와 피멍이 수두룩하였으며, 동지는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시신의 손목에 포박된 줄은 노점상들이 천막을 고정하기 위해 사용하는 약 10밀리미터 두께의 줄이며 주변에 많이 널려 있던 것이었다.
시신이 발견되자 경찰은 황급히 망루를 무력적으로 철거하기 시작했고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농성자들은 이덕인 동지의 죽음으로 더욱 전의를 상실하고 농성을 중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농성자 전원은 인천 남부경찰서로 연행되어 갔다.
한편 시신은 11월 28일 오전 11시 50분 유가족들에 의해 세광병원으로 옮겨졌다. 이 날 남인천의원 원장 박용섭이 검안하였는데, 그는 “얼굴과 팔, 상체 등에 상처와 피멍든 자국이 선명한 것으로 보아 구타에 의한 사망으로 추정된다.”고 자신의 소견을 말하였다. 이 날 오후 6시 30분 유족들은 보다 정확한 사인규명을 위하여 시신을 세광병원에서 중앙길병원으로 옮겼다.
그 다음날(11월 29일) 새벽 4시 30분경 현장을 지휘하던 경찰책임자가 방문하였다. 이 때 유가족측은 시신탈취를 막고 공정한 부검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경찰측과의 합동부검을 제안하였다. 그런데 4시 45분경 쇠파이프와 곤봉, 오함마 등으로 무장한 경찰 약 천오백여명이 벽과 유리창을 뚫고 병원영안실로 난입하였다. 당시 영안실에는 이덕인의 시신발견소식을 듣고 달려온 노점상과 학생, 시민단체회원 등 100여명이 시신을 지키고 있었다. 영장도 없이 시신을 탈취하려는 경찰과 그것을 저지하려는 사람들 간의 치열한 충돌도 잠시 시신은 곧 경찰에 의해 탈취되어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옮겨졌다. 그리고 그 날 시신을 지키던 이덕인의 형 이덕창은 시신과 함께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강제로 납치당해갔고 나머지 사람들은 많은 부상을 입은 채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시신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1시간만에 유가족의 동의 없이 부검되었으며 재부검이 불가능할 정도로 시신이 훼손된 채로 가족에게 반환되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이덕인 동지의 사인은 익사라고 발표하였다. 경찰은 이러한 부검결과를 인용하면서 이덕인 동지는 탈출하기 위해 연안부두쪽으로 수영하던 중 탈진상태에서 익사하였다고 수사결과를 발표하였다.
이덕인동지의 죽음이 경찰에 의한 타살이라는 증거로는...
① 사체발견 당시 밧줄이 다소 풀어지기는 했으나 두손이 포박된 상태로 묶여져 있었던 점.
② 최초 발견시 사체에 타박상으로 보이는 눈위의 열상(찢겨진 상처) 및 얼굴 부위와 어깨등의 좌상(피멍든 상처)이 존재했던 점.
③ 이덕인 동지가 옷을 입은 상태(이석근씨의 진술에 의하면 야전조끼를 입고 있었다고 함)로 탈출하였는데도 사체발견시에는 상의가 벗겨진 상태였다는 사실 등이 있다.
이덕인 동지의 죽음은 근본적으로 민중과 빈민들, 이 사회에서 소외받는 장애인들의 삶이 어찌되건 자신의 권력유지에만 급급해하며 그들의 생계마저 포크레인으로 가차없이 짓뭉개는 김영삼정권의 반민중적 본질에서 비롯된 것이다.
더구나 인천시당국이 노점상들의 문제를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해결하려 한 것이 아니라 경찰과 용역깡패들을 동원해 강제적으로 철거를 실시하고, 더구나 망루로 피신한 노점상들에게 물과 음식을 차단시키고 급기야 탈진한 노점상들을 향하여 추운 겨울의 강한 바닷바람에 얼어 죽도록 소방호스로 물을 뿌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황을 야기시켜 결국은 이덕인동지를 죽음으로 내몰리게 한 것은 가혹한 인권유린행위인 것이다.
추모시
이덕인 열사여 우리는 그대를 빈민해방 열사라 부른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한 이들이 있듯이
만국의 빈민들이여 이제는 단결하라고 해야 할 때입니다.
이덕인 열사의 죽음으로
이땅에는 다시는 빈민들의 죽음이 없게하고
이땅에는 다시는 노점상들의 죽음을 없도록 하고
이땅에는 빈민들의 인권이 무시 당하는 일이 없도록하여
진실로 민중이 주인되는 참세상을 이룩할 수 있도록 하여 주기를
이덕인 열사의 영정 앞에 빌고 또 빌어 봅니다.
열사가 태어나는 곳은 억압과 탄압이 없는 세상
노점상들이 자유로운 일을 할 수 있는 세상
조국을 사랑하고 남과 북이 하나되는 세상
나라가 통일이 되어 휴전선이 없는 나라
그런 세상에 살기를 간절히 발원하오니 진달래 꽃이 온 산천을 뒤 덮고 있 는
그런 세상으로 분명 갈 것입니다.
빈민이 주인되는 나라
천년만년 자유를 누리는 나라
이덕인 열사가 외치는 나라
빈민이 없고
누구나 평등히 사는 나라
홍길동이가 원하던 나라
임꺽정이가 건설하려던 나라
장길산이가 원하던 나라
그런 나라에 태어나소서
만일에 그런 나라가 아니면
농민해방을 외친 녹두장군이 되소서
이덕인 열사여
민중이 주인되는 나라가 되면
조국이 하나되는 나라가 되면
빈민이 없고 노점상이 없는
태평성대를 이루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열사여 차별이 없는 세상에서
못다한 한을 푸소서
<당시의 장례위원회 자료집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