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경숙열사 39주기 추모제
○ 일 시: 2018년 8월 11일(토) 11:00
○ 장 소: 마석 민족민주열사묘역
행사 정보
인물 정보
김경숙(당시 21세)
1965년 부친사망으로 행상, 가사 전담
1971년 초등학교 6학년때 광주에 있는 누에고치공장에서 노동자로 출발
1973년 서울로 상경. 양동에 있는 하청 제품공장, 한품섬유, 태진산업, 이천물산 등을 전전하며 봉제공장 미싱사로 노동함
1976년 8월 30일 YH무역(주) 입사. 노동조합이 결성되자 YH무역은 위장폐업 자행.
1977년 6월 YH 노동조합에서 설립한 녹지야학 입학
1978년 3월 YH 노동조합 대의원으로 선출
1978년 7월 YH 노동조합 소그룹 ‘차돌이’ 그룹장으로 활약
1979년 3월 30일 YH 무역 일방적 폐업공고 발표로 YH 사건 시발
1979년 4월 13일 YH 노조 폐업철폐 공장점거 농성. 5일동안(폐업1차 철회함) 동지는 후생부 책임담당으로 활약함
1979년 7월 25일 회사 정상화를 위한 노조 대의원대회 대회사 정상화 추진위원 56명 구성 위원으로 활약
1979년 8월 9일 신민당 당사 점거농성 투쟁 전개.
1979년 8월 11일 새벽 2시 2천여명의 경찰이 ‘101호작전’에 의해 신민당사에 난입, 강제해산시키는 과정에서 의문사
제 28차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인정자
김경숙 동지가 근무하던 YH무역은 1975년 5월 노동조합을 결성하였다. YH무역은 1백만원의 자본금으로 불과 2년만에 노동자 400여 명, 1년 순이익 13억원이라는 한국최대의 가발업체로 성장하였다. YH는 민주적인 노동조합을 파괴하기 위해 수십억의 돈을 미국으로 빼돌리고 폐업을 자행하였다. YH 노조의 폐업에 맞선 120일간의 투쟁과 신민당사 농성투쟁은 민주노조를 파괴하는 악덕자본가와 이를 비호하는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노동자의 단결된 힘을 보여준 역사적인 투쟁이었다. 그는 신민당사 농성 3일째 밤, 경찰의 폭력진압에 맞서 투신했다. 그리고 이 투쟁은 생존권을 짓밟는 악덕기업주를 처벌하기는커녕 정당한 폐업철회 투쟁을 벌이는 노동자들을 폭력으로 탄압, 김경숙 동지를 죽음으로 내몬 군사독재정권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은 부마항쟁으로 이어져 마침내 18년에 걸친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도화선이 되었다.
유고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에는 어느 누구나 티없이 맑고 깨끗한 사람이었다. 집안환경 관계로 인하여 여러 사람들의 차이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다가 나이 8세가 되던 해 아버지는 갑작스런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다. 우리집의 주인이신 아버지를 잃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당장 날품팔이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야만 하셨다. 없는 가정에서 어렵게 어머니의 수고로 초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졸업하기 직전 겨울방학 때부터 공장에 취직을 하였을 때 돈에 구애를 받던 나 자신은 이 가난한 우리 가정이 잘 살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을 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되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내가 배우지 못한 공부를 동생에게 가르쳐서 동생만은 성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의 간절한 소원이었다. 그리하여 고향을 등지고 타향에 발을 붙이게 된 것이다. 맨처음에는 커다란 포부로 꿈을 안고 서울로 왔으나 와서 보니 별것이 아니었다. 고향에서 생각했던 꿈은 이룩할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내 힘닿는 데까지 힘써 살아가리라고 다짐했다. 하청공장에 취직을 하여 말만 듣던 철야작업을 밤낮 하면서 약 2개월은 나의 코를 건들지도 못했다. 너무나 피곤하다 보니까 끊임없이 코피가 나는 것이다. 나의 몸은 더욱 약해지고 얼굴은 창백해졌다. 어떤 회사에서는 봉급을 약 3개월치를 받지 못했다. 헐벗고 굶주리며 풀빵 5원짜리 30원어치로 추위에 허덕이며 생계를 이어가기도 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자살이라도 해버리려고까지 마음을 먹었으나 고향이 그 길을 막았다. 하청공장에서는 작업관계로 일요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어쩔 수 없는 경영부실로 인해 여러차례 회사를 옮기게 되었다. 젊고 싱싱한 나이에 우리의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공장안에서 여러형태의 억압을 받으며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혼탁한 먼지속에 윙윙대는 기계소리를 들으며 어언 8년 동안 공장생활하는 나 자신을 볼 때 남은 것은 병밖에 없다. 몸은 비록 병들었지만 마음은 상하지 않는 인간으로서 올바른 삶을 살리라 다짐한다. 객지에 나와있는 외로운 우리들에게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니 이제는 두렵지 않다.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열심히 살도록 두손모아 간절히 기도하련다. 현실은 어려워도 주님의 자녀로서 나를 잃지 않고 살아가며 태양과 같은 밝은 등불이 되리라.
추모시 우리들의 지지 않는 꽃 김 경 숙 - 김경숙 동지 13주기 추모제 묘소참배에서 낭독한 추모시 1 당신의 나이 스물 하나였다. 1979년 8월 11일 잊지못할 그 밤 고향의 따뜻한 뒷산 품에 아버지를 여의던 길도 아닌 곳으로 농성장 창틀을 부여잡고 울부짖던 동료들 잘가라 배웅도 받지 못한 채 그대 마지막 떠나던 날은. 소리도 챙챙한 쇠파이프로 경대를 죽이고 창수를 죽이고 미경이를 몰아 붙이던 쇠파이프에 날마다 눈을 뜨면 해맑은 누이들의 절규를 짖이겨 대며 조여오는 미쳐 번뜩이는 쇠파이프와 곤봉에 투쟁의 붉은 순결 낭자하게 쏟아내고 그대 영영 어디로만 가고 있었는가 2 고요한 새벽 공기를 찢는 공격의 신호소리 지쳐 잠이든 청순한 처녀들 놀라 아우성치는 피의 축제 ‘101호 작전’ 짐승의 곤봉이 내 몸에 내리 꽂히고 차가운 시멘트 바닥 흘러 적시는 내 뜨거운 피 고막을 찢던 비명소리 아스라히 멀어지던 내 나이 스물 하나였어요. 3 어머니 날 묻지 마세요 날 태우지 마세요 한줌 재가 된 뼈마디 가루로는 난 이 땅을 떠날 수 없어요 내 살아온 삶의 전부를 바친 이 노동의 끝 우리 처음 만난 곳은 YH라네 우리들이 단결한 곳도 YH라네 그리운 동료들의 이름 한 번 부르지 못하고 이렇게 묻힐 순 없어요 친구여 나를 아는, 그리고 나를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이여 나의 슬픔을 나의 분노를 함께 이고 갈 내 가난한 이웃들이여 삼일이 아니라면 십삼년 삼십년이라도 좋아요 신성한 인간의 노동이 유린되는 곳 그곳이 나의 집입니다. 그대 노엽고 슬픈 가슴에 날 품어주오. 4 다시 피어나는 구나 드높은 조국의 팔월 하늘 그토록 가고 싶던 고향하늘도 모진 세월의 역사를 흘러 흘러 자유의 하얀 뭉게구름으로 피어나는 구나 슬픔으로 더욱 견고해진 우리들 가슴 가슴마다 피끓는 부활의 꽃을 새 세상의 아침을 향해 꽃잎 눈부시게 피어나는 (지지 않는) 꽃으로 그대 다시 우리 앞에 살아오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