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정법영열사 40주기 추모제
○ 일 시: 2018년 7월 8일(일) 11:00
○ 장 소: 이천 민주공원
행사 정보
일요일
2018-07-08
이천 민주공원
지도에서 보기
인물 정보
정법영(당시 23세)
1960년 6월 충북 청원군 출생
진천 한천초등학교 졸업
청주 주성중학교 졸업
1973년 7월 청주시청 청소부들의 근로조건개선 및 임금인상투쟁 운동 참여
1977년 청주신학대 입학. 수원 아카데미하우스에서 노동문제 강의를 듣는 등 산업선교에 관심 가짐
1978년 3월 17일 청주도시산업선교회에서 신흥제분, 조광피혁 노동자들과 함께 목숨을 건 4개월 간의 단식투쟁
1978년 6월 25일 귀가 후 이상한 언행을 하기 시작하며 정신에 문제가 생김
1978년 7월 8일 청주신학교 2학년 재학중에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괴한들에 의해 의문의 죽음을 당함
- 제 103차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인정자
진천 한천초등학교 졸업
청주 주성중학교 졸업
1973년 7월 청주시청 청소부들의 근로조건개선 및 임금인상투쟁 운동 참여
1977년 청주신학대 입학. 수원 아카데미하우스에서 노동문제 강의를 듣는 등 산업선교에 관심 가짐
1978년 3월 17일 청주도시산업선교회에서 신흥제분, 조광피혁 노동자들과 함께 목숨을 건 4개월 간의 단식투쟁
1978년 6월 25일 귀가 후 이상한 언행을 하기 시작하며 정신에 문제가 생김
1978년 7월 8일 청주신학교 2학년 재학중에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괴한들에 의해 의문의 죽음을 당함
- 제 103차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인정자
정법영 동지는 1973년 청주지역에 도시산업선교가 시작될 무렵 중학생으로 사회선교와
현실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1978년 3월 청주지역에서 노동자들은 퇴직금문제로
장기적인 농성을 전개하게 되었고, 농민 소작인 중 한사람이 토지를 매입하려는 과정에서
뭇매를 맞고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노동자와 농민들은 단식 농성으로 맞서
투쟁하였고 정법영 동지도 같이 투쟁에 참여하면서 경찰의 집중적인 표적이 되었다.
이러한 민중생존권 수호를 위한 궐기 과정에서 113일이 경과되도록 문제 해결이 안되자
심리적 갈등을 겪던 정법영 동지는 정체불명의 친구들을 몇 번 따라다니며
술을 먹은 적이 있는데, 78년 7월4일에도 정체불명의 친구들과 만난 후 청주 성가의원에
혼자 가서 약을 먹었다면서 치료를 해달라고 했다. 병원에서 가족에게 연락이 와서 가보니
이미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으며 이후 5일간을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한 채 7월 8일 운명하였다.
동지를 생각하며
인간의 삶의 질의 변화는 이 사회를 지배하는 정치 경제적 구조악을 타파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유신이나 5공을 능가하는 거짓 포장된 민주화시대에
살고 있음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아니 누구보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계실 분들이
이런 중요한 때에 그런 왜곡된 주장을 감히 공개적으로 교회협의회를 통해서 내세움을
볼 때 솔직히 우려와 분노를 금할 수 없습니다. 거짓과 폭력이 지배하는 한 민중은
저항할 것이고, 교회도 이들을 지원해야 한다고 우리는 믿고 있으며, 향후 그들의
주장도 경계와 더불어 지켜 볼 것입니다. 이제 고 정법영 동지가 우리 곁을 떠난 지도
14년이 지나갑니다. 법영 동지는 분명 한알의 썩어가는 밀알이 되어 숱한 과제를
우리에게 남기고 가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백배, 천배의 새로운 밀알로 태어나
이 땅을 지배하는 군사독재 집단과 이에 추종하는 그 어떤 거짓 논리와 주장에 대해서도
현혹되지 않고 과감히 맞서 싸울 것입니다. 이야말로 고 정법영 동지가 우리에게 알려준
정신이고, 이는 또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고 정법영 동지여 고이 잠드소서!
1992년 7월 8일 청주 도시산업선교회 평신도 청년일동 드림
동지가 남긴 글 <대성여객 사장에게 보낸 동지의 편지>
사장님께 안녕하십니까? 저는 청주 시민의 한사람으로 귀 버스 회사의 차를 이용하는
시민중의 한사람입니다. 그런데 귀 버스 회사가 시민의 편익을 제공하는 공공사업에
힘쓰고 있음을 알고 있는 저는 의외의 사건에 대하여 한말씀 부탁합니다.
지난 2월에 낸 귀버스의 박성세씨 사고(10월 16일자 충청일보)에 대해 시민으로서
납득할 만한 보상을 즉각 해주시기를 재 부탁합니다. 기업가의 양심있는 판단을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청주시민의 한사람
<일 기>
1978년 5월 5일
오늘은 오랜만에 아버님을 만나 이야기했다. 존경하는 아버님이다.
한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존경한다. 진실로 이것은 나의 전부이다.
인간으로서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을 그는 불평없이 해나간다. 당신은 비록 가정에 풍요한
만족감을 주지는 못하지만 그이는 돈 많은 사장보다 그 어느 지성인이라 자부하는 자와
아니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훌륭한 인격자요 지성인임을 지니고 있는 당신을
난 항시 존경합니다. 전 당신을 깊이 생각해 볼 때 마음의 갈등이 수없이 오곤 합니다.
한 인간의 목적된 삶의 영위 또한 그 가치관 같은 것을 생각하면 미숙한 전 울고만 싶습니다.
여하튼 언제나 당신을 생각하면 그저 고마울 뿐입니다. 그리고 당신께 감사드리고 기도합니다.
당신을 위해서 말입니다.
추모시
정 법영 영전에 어디에서나 낯선 이방인처럼 그대를 외롭게 병들게 한 것은 누구였는가?
쫓기는 긴장으로 불안으로 그대를 내어 몰은 것은 누구의 범행이었는가?
가난한 이들, 억눌린 이들, 짓밟히고 슬픔에 잠긴 이들의 친구처럼 살고파하더니
외로운 이웃을 위한 고난을 사명처럼 외우며 살더니 황량한 “겨울공화국”의 한 벌판 위에서
스스로 생명의 잔을 산산조각 냄은 무슨 절규인가?
<윤응진(한신대 교수), ‘정법영 영전에’ 中>
현실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1978년 3월 청주지역에서 노동자들은 퇴직금문제로
장기적인 농성을 전개하게 되었고, 농민 소작인 중 한사람이 토지를 매입하려는 과정에서
뭇매를 맞고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노동자와 농민들은 단식 농성으로 맞서
투쟁하였고 정법영 동지도 같이 투쟁에 참여하면서 경찰의 집중적인 표적이 되었다.
이러한 민중생존권 수호를 위한 궐기 과정에서 113일이 경과되도록 문제 해결이 안되자
심리적 갈등을 겪던 정법영 동지는 정체불명의 친구들을 몇 번 따라다니며
술을 먹은 적이 있는데, 78년 7월4일에도 정체불명의 친구들과 만난 후 청주 성가의원에
혼자 가서 약을 먹었다면서 치료를 해달라고 했다. 병원에서 가족에게 연락이 와서 가보니
이미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으며 이후 5일간을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한 채 7월 8일 운명하였다.
동지를 생각하며
인간의 삶의 질의 변화는 이 사회를 지배하는 정치 경제적 구조악을 타파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유신이나 5공을 능가하는 거짓 포장된 민주화시대에
살고 있음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아니 누구보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계실 분들이
이런 중요한 때에 그런 왜곡된 주장을 감히 공개적으로 교회협의회를 통해서 내세움을
볼 때 솔직히 우려와 분노를 금할 수 없습니다. 거짓과 폭력이 지배하는 한 민중은
저항할 것이고, 교회도 이들을 지원해야 한다고 우리는 믿고 있으며, 향후 그들의
주장도 경계와 더불어 지켜 볼 것입니다. 이제 고 정법영 동지가 우리 곁을 떠난 지도
14년이 지나갑니다. 법영 동지는 분명 한알의 썩어가는 밀알이 되어 숱한 과제를
우리에게 남기고 가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백배, 천배의 새로운 밀알로 태어나
이 땅을 지배하는 군사독재 집단과 이에 추종하는 그 어떤 거짓 논리와 주장에 대해서도
현혹되지 않고 과감히 맞서 싸울 것입니다. 이야말로 고 정법영 동지가 우리에게 알려준
정신이고, 이는 또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고 정법영 동지여 고이 잠드소서!
1992년 7월 8일 청주 도시산업선교회 평신도 청년일동 드림
동지가 남긴 글 <대성여객 사장에게 보낸 동지의 편지>
사장님께 안녕하십니까? 저는 청주 시민의 한사람으로 귀 버스 회사의 차를 이용하는
시민중의 한사람입니다. 그런데 귀 버스 회사가 시민의 편익을 제공하는 공공사업에
힘쓰고 있음을 알고 있는 저는 의외의 사건에 대하여 한말씀 부탁합니다.
지난 2월에 낸 귀버스의 박성세씨 사고(10월 16일자 충청일보)에 대해 시민으로서
납득할 만한 보상을 즉각 해주시기를 재 부탁합니다. 기업가의 양심있는 판단을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청주시민의 한사람
<일 기>
1978년 5월 5일
오늘은 오랜만에 아버님을 만나 이야기했다. 존경하는 아버님이다.
한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존경한다. 진실로 이것은 나의 전부이다.
인간으로서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을 그는 불평없이 해나간다. 당신은 비록 가정에 풍요한
만족감을 주지는 못하지만 그이는 돈 많은 사장보다 그 어느 지성인이라 자부하는 자와
아니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훌륭한 인격자요 지성인임을 지니고 있는 당신을
난 항시 존경합니다. 전 당신을 깊이 생각해 볼 때 마음의 갈등이 수없이 오곤 합니다.
한 인간의 목적된 삶의 영위 또한 그 가치관 같은 것을 생각하면 미숙한 전 울고만 싶습니다.
여하튼 언제나 당신을 생각하면 그저 고마울 뿐입니다. 그리고 당신께 감사드리고 기도합니다.
당신을 위해서 말입니다.
추모시
정 법영 영전에 어디에서나 낯선 이방인처럼 그대를 외롭게 병들게 한 것은 누구였는가?
쫓기는 긴장으로 불안으로 그대를 내어 몰은 것은 누구의 범행이었는가?
가난한 이들, 억눌린 이들, 짓밟히고 슬픔에 잠긴 이들의 친구처럼 살고파하더니
외로운 이웃을 위한 고난을 사명처럼 외우며 살더니 황량한 “겨울공화국”의 한 벌판 위에서
스스로 생명의 잔을 산산조각 냄은 무슨 절규인가?
<윤응진(한신대 교수), ‘정법영 영전에’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