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계훈제선생 19주기 추모제
○ 일 시: 2018년 3월 14일(수) 12:00
○ 장 소: 마석 민족민주열사묘역
행사 정보
수요일
2018-03-14
마석 민족민주열사묘역
지도에서 보기
인물 정보
계훈제
- 1921년 12월 31일 평북 선천 부황 출생
- 1940년대 일제시기 학병을 거부하는 등 항일운동에 참여하고 해방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문리대 학생회장 지냄
- 1950년대 말 ‘진보당’ 사건으로 위축된 운동진영을 복원시키기 위해 노력하면서 4.19시기에 4월혁명에 참여. `자유언론수호협의회`구성. `사상계` 편집장 활동 학생운동의 대부로서 그리고 사회운동가로서 직간접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
- 1960년~1961년 교원노조 결성, 국학대 강사
- 1962년 함석헌 장준하 선생 등과 ‘자유언론수호협의회’ 결성
- 1969년 삼선개헌반대투쟁위 상임운영위원
- 1970년~1979년 ‘씨알 의 소리’ 편집위원
- 1973년~1974년 구화고등학교 교장, 민주회복국민회의 운영위원
- 1975년 긴급조치 9호 위반 투옥
- 1977년 민주주의국민연합 운영위원
- 1980년 ‘민주화의 봄’ 시기 전국적 전 계층적 열망을 묶어 세우기 위해 노력하다 내란음모죄로 수배, 2년여 도피생활
- 1982년 포고령 위반, 김대중내란음모 사건 관련 투옥
- 1984년 민주통일국민회의 부의장
- 1985년 민통련 부의장
- 1986년 민통련 의장대행
- 1987년 6월항쟁 시기 민통련의장 대행으로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구성하여 활동 6.10 항쟁을 선언한 성공회 농성을 주도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됨
- 1988년 범민족대회를 준비하며 통일운동에서도 지도적 역할을 함
- 19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고문
- 1989년 자주민주통일국민회의 공동의장
- 1991년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상임고문
- 1995년 고 장준하 선생 20주기 추모행사 준비위원
- 1999년 3월 14일 운명
- 1940년대 일제시기 학병을 거부하는 등 항일운동에 참여하고 해방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문리대 학생회장 지냄
- 1950년대 말 ‘진보당’ 사건으로 위축된 운동진영을 복원시키기 위해 노력하면서 4.19시기에 4월혁명에 참여. `자유언론수호협의회`구성. `사상계` 편집장 활동 학생운동의 대부로서 그리고 사회운동가로서 직간접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
- 1960년~1961년 교원노조 결성, 국학대 강사
- 1962년 함석헌 장준하 선생 등과 ‘자유언론수호협의회’ 결성
- 1969년 삼선개헌반대투쟁위 상임운영위원
- 1970년~1979년 ‘씨알 의 소리’ 편집위원
- 1973년~1974년 구화고등학교 교장, 민주회복국민회의 운영위원
- 1975년 긴급조치 9호 위반 투옥
- 1977년 민주주의국민연합 운영위원
- 1980년 ‘민주화의 봄’ 시기 전국적 전 계층적 열망을 묶어 세우기 위해 노력하다 내란음모죄로 수배, 2년여 도피생활
- 1982년 포고령 위반, 김대중내란음모 사건 관련 투옥
- 1984년 민주통일국민회의 부의장
- 1985년 민통련 부의장
- 1986년 민통련 의장대행
- 1987년 6월항쟁 시기 민통련의장 대행으로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구성하여 활동 6.10 항쟁을 선언한 성공회 농성을 주도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됨
- 1988년 범민족대회를 준비하며 통일운동에서도 지도적 역할을 함
- 19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고문
- 1989년 자주민주통일국민회의 공동의장
- 1991년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상임고문
- 1995년 고 장준하 선생 20주기 추모행사 준비위원
- 1999년 3월 14일 운명
어린 시절 독립군의 모습을 지켜보며 민족의 현실에 눈을 뜬 그는 임시정부로 갈 계획으로 국경을 넘다 일본 헌병에 붙잡혀 지원병 훈련소로 압송됐다. 그 뒤 평양 근처 채석장에서 중노동을 하면서 `’민족해방협동단’이란 항일운동단체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했다.’45년 해방되자 고 장준하선생의 권유로 백범 김구 선생 밑에서 일을 했다. 백범의 영향 아래 신탁통치 반대투쟁에 나섰고, 백범의 남북협상을 지지하며 삭발을 하기도 했다.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장 때는 ‘국대안 반대투쟁’을 이끌었다. 동지는 5·16 쿠데타가 일어난 뒤 민주화운동의 가시밭길을 걷기 시작한다. 3선개헌반대투쟁위 상임위원, 「사상계」 편집장, 민통련 부의장을 지내며 반독재 민주화투쟁에 앞장섰다. 이 과정에서 3차례나 투옥됐고, ’80년에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도피생활을 했다. 그 후에도 민통련 의장, 전국연합 상임고문을 역임하며 한반도의 혁명적 변화와 민주화를 위해 평생 동안 투쟁을 계속했다. 동지는 지난 ’95년 고문 등으로 얻은 지병인 폐질환이 악화돼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병상에서도 나라를 먼저 걱정하던 선생은 자서전 `나의 투쟁, 나의 일생’을 집필하기도 했으나 끝내 마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항상 흰 고무신에 작업복으로 민주화운동 현장을 누볐던 옷차림이 말해주듯 동지는 저항정신과 청렴성, 도덕성의 상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