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우종원동지 32주기 추모제
○ 일 시: 2017년 10월 8일(일) 11:00
○ 장 소: 마석 민족민주열사묘역
행사 정보
인물 정보
우종원(당시 23세)
1981년 대구 달성고 졸업.
서울대 사회과학대 사회복지학과 입학.
1983년 11월 학외 유인물 배포 사건으로 구속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음.
1984년 4월 특사로 석방.
1985년 10월 11일 수배중 경부선 철로변에서 변사체로 발견됨.
- 제 108차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인정자
가족들과 동지를 아는 친구들에 의하면 동지는 차분하고 온순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어렵게 생활을 꾸려나가시는 홀어머니의 막내였음에도 이웃의 불생을 외면하지 않고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강직한 성품을 가진 청년이었다. 서울대 운동권에서 핵심적인 위치에 있던 동지는, 이 사회의 심각한 모순과 고통받는 이웃에 대한 심각한 고민과 자기 성찰의 와중에도 항상 주위의 친구들을 다정다감하게 위해줄 줄 알았고, 때로는 기지에 찬 유모어로 자주 주위 사람들을 유쾌하게 했다고 한다. 그러던 85년 8월 중순경, 3주간의 훈련을 위해 집에 와 있던 중 삼민투 관련으로 수배된 사실을 알고 26일에 집에서 나왔으며, 그 이후 변사체로 발견되기까지 집과의 연락이 두절되었다. 27일 형사들이 집을 찾아왔고, 9월 27일에는 중앙일보에 발표된 삼민투 관련 용의자 수배명단에 이름이 게재되었다. 10월 12일 대구 시경 소속 형사가 집에 찾아와 동지의 어머니를 만나, “종원이는 아까운 학생이다. 삼민투에 가담하여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다 신세 망쳤다. 빨리 자수시켜라.” 는 요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 오후 6시 고향에 거주하는 백부로부터 우종원 동지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10월 11일 23시경, 경부선 하행열차를 타고 가다가 충북 영동~황간역 사이, 황간역 4km지점에서 투신자살했으며, 시체는 다음날 아침 철로 선로반원 사람들에 의해 발견됬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시신은 전날 많이 내린 비로 인하여 매우 젖은 상태였고, 하생선 철로에서 3m 떨어진 콩밭의 고랑에 횡으로 누운 상태로 비닐과 거적으로 싸여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염을 하기 위해 옷을 벗기고 본 시신의 상태를 보면, 코와 귀에서 출혈의 흔적이 있었고, 오른팔은 골절된 듯 굽혀진 채로 굳어 있었다. 가슴과 목 바로 밑의 두 군데는 커다란 멍자국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흙물이 묻은 줄 알고 닦아 내려했으나 지워지지 않자 멍든 것임을 확인했다. 또 복부가 전체적으로 붉은 색조를 띠고 있었다 한다. 10월 13일 자로 발급된 의사의 사망진단서 상에는 직접 사인을 “두개골 복합골절로 인한 뇌출혈”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당시 형님의 기억으로는 두부의 외상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동지는 감옥의 경험도 있었고, 달리는 열차에서 투신한 것에 비해서 거의 상처가 없었던 점, 유서라는 독서카드의 필적이 동지의 것이라고 볼 수 없는 점 등으로 보아 자살이라는 경찰의 주장은 신빙성을 잃고 있다.
동지가 남긴 글 <편지>
어머님, 형, 누나 아무리 내가 스스로 생각하기에 소신을 가지고 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오늘 이 순간까지도 어려운 여건에서 아무런 불편함없이 공부하도록 보살펴주신 어머니와 형, 누나들에게 죄송한 마음은 금할 길 없으며 입이 있어도 어떤 말을 해야할 지, 손이 있어도 어떻게 써야할 지 염치가 없습니다. 가운 날씨에 왔다갔다 하시는 어머님께 죄송스런 마음을 아무리 마음속에 간직한다 한들 여기에서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저는 편안히 잘 지낸다고 말씀드리기에 너무나 송구스럽습니다. 모쪼록 지금 이 순간부터는 가장 중요한 것이 어머님께서 건강에 유의하시고, 못난 자식을 염려하지 마시고, 형, 누나들이 모두 화목한 생활을 해주었으면 저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 중략 -- 대학을 졸업하고 출세를 해서 어머님을 복되게 해드리지 못하고 이런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과정까지를 저도 나름대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만 남들보다 어려운 환경하에서 공부하는 처지이고 누구보다 형, 누나들의 사랑을 잘 알고 있었기에 혼자 울어도 보고 잠을 못 이룬 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를 알면서 그냥 죽은 듯이 공부를 하고 일인의 영예를 위해 살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제가 가진 생각들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말해도 지금은 별로 위안이 되지도 않을 것 같고, 앞으로 자주 연락을 드리면서 얘기 하겠습니다. -- 중략 -- 형, 누나. 내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사회 정의를 위한다고 할지라도 형이나 누나로부터는 욕을 들을 만하다고 인정합니다. 동생 공부시키는라고 고생해가며 남들처럼 여유있게 생활하지도 못한 채 나에게 쏟아준 사랑에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지.... 가장 염려스러운 것이 어머님 건강이니 나를 대신해서 내 몫까지 효도를 다해주기 바랍니다. 나는 운동 열심히 하고 혼자 조용히 책이나 읽고 마음을 정리하겠습니다. 12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