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석규열사 30주기 추모제
○ 일 시: 2017년 8월 22일(화) 10:00
○ 장 소: 전북 남원시 사매면 관풍리 오리정
행사 정보
화요일
2017-08-22
전북 남원시 사매면 관풍리 오리정
지도에서 보기
인물 정보
이석규(당시 22세)
1966년 11월 30일 전북 남원 출생
1982년 용북중학교 졸업
1983년 광주 직업훈련원 수료
1984년 (주) 대우 조선 입사. 선각소조립부 근무
1987년 8월22일 김우중 회장과 면담을 요구하며 옥포아파트 사거리에서 동료들과 평화적 시위를 벌이던 중 오후 2시40분경 폭력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고 대우병원으로 옮겼으나 오후 3시30분경에 운명
- 제 87차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인정자
1982년 용북중학교 졸업
1983년 광주 직업훈련원 수료
1984년 (주) 대우 조선 입사. 선각소조립부 근무
1987년 8월22일 김우중 회장과 면담을 요구하며 옥포아파트 사거리에서 동료들과 평화적 시위를 벌이던 중 오후 2시40분경 폭력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고 대우병원으로 옮겼으나 오후 3시30분경에 운명
- 제 87차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인정자
이석규 동지는 벽지 농촌마을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어려운 집안형편을 돕기 위해 중학교를 졸업한 뒤 바로 산업현장에 뛰어들게 되었고 월 30만원의 임금, 월 560~580시간을 일해야 하는 지옥같은 생활 속에서도 꿋꿋이 살고자 했다.
87년 6월 민주화 항쟁의 거센 파고에 이어 7월말부터 전국적으로 번져가기 시작한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과 권익 투쟁은 대우조선에도 휘몰아쳤다. 1987년 8월 대우조선 노동자들은 “노조결성”, “임금인상” 등을 외치며 농성을 시작했고 노조를 결성하며 회사와 협상을 시도하였다. 결렬되는 협상과 회사의 기만적인 태도에 노동자들은 가두로 진출하였고 평화적 시위를 선언했지만 경찰은 무차별하게 진압하여 노동자와 시민들을 더욱 더 분노하게 했다. 대우재벌은 임금인상과 노동조건개선을 위한 투쟁을 무성의와 공권력으로 짓밟았고 대우 노동자들은 이에 항의해 또다시 평화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87년 8월22일, 김우중 회장과 면담을 요구하며 옥포아파트 사거리에서 동료, 가족들과 평화시위를 벌이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지 않기 위해 스크럼을 짜고 앉은 걸음으로 시위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경찰은 직격 최루탄을 난사했고 백골단은 흩어지는 시위대를 골목 구석까지 쫓아가서 짓밟고 옷을 발가벗기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아이들과 임산부까지 나선 평화시위를 무자비하게 짓밟던 와중 이석규 동지가 직격최루탄을 맞고 쓰러졌고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운명하였다.
이후 민주동지들의 장지인 망월동으로 향하던 중 갑작스런 장지의 변경에 분노한 노동자들은 살인경찰 구속과 피해보상, 휴업 조치 철회의 조건이 수락될 때까지 장례를 무기한 연기했으나 정권과 언론은 사체를 볼모로 한 노동쟁의 방법이라고 일제히 일방적으로 보도하며 사건의 본질을 왜곡하였다. 여기에 공권력은 시신을 탈취하여 남원의 선산에 안장하여 동지는 죽어서도 편안히 눈감지 못하고 또 한번 죽음을 당하였다.
<동지를 생각하며>
이석규 동지는 지옥같은 생활을 묵묵히 이겨내며 학업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 84년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마산고 부설 방송통신고등학교에 몇몇 직훈 동기들과 함께 입학했다. 이와 함께 5년짜리 재형저축을 붓기로 했다. 참혹하리만큼 가혹한 여건 속에서 그 나이 또래의 소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몸부림이었다.
학교에 가는 날이면 잔업, 특근, 철야에 지친 몸을 일으켜 채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 숙소에서 30~40분씩 걸어서 마산행 첫차에 몸을 싣고는 또 다시 골아 떨어진다. 옥포에서 3시간30분을 달려 마산에 도착하면, 아침 7시40분에서 8시 무렵이 된다. 아침을 사먹고 9시10분에 수업을 시작하면 겨울에는 오후 4시30분, 여름에는 4시50분~5시에 끝난다. 다시 저녁을 사먹고 옥포로 돌아오면 이미 깜깜한 밤이 되는데, 이렇게 하루에 드는 비용만 해도 1만원이 되었다.
더욱이 회사에서는 밀린 일을 핑계삼아 방통고에 다니는 노동자들에게 수업때마다 「확인서를 떼어오라」「특근, 잔업을 시키지 않겠다」고 협박하여 피곤한 몸을 쉬지도 못하고 일요일에도 어김없이 일터로 나가야 했다.
이런 사정 때문이었는지 84년초에 동지는 사내 기숙사를 나와서 장승포 주변에 있는 능포의 아파트 문간방에 동료 1명과 함께 입주하게 된다. 한달 월세 5만원으로 기숙사생활을 탈출해서 나름의 자유를 얻은 것이다.
대우조선의 노동자들은 일부가 기숙사에 살고 나머지 가족이 있거나 따로 나와 사는 사람들은 옥포, 옥림, 장승포(옥수동), 능포를 중심으로 세를 들어 살고 있다. 능포, 옥림 APT에는 주로 기능직 사원들이 집중적으로 몰려 살고 있었는데, 동지는 바다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포APT에 새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성격이 온순하고 내성적이어서 초기에는 친구도 제대로 사귀지 못했던 그는 옥포로 와서 이즈음 친구들과 어울리며 술과 담배를 배웠다. 술 담배는 절대 지나치지 않을 만큼 적당히 했는데, 외출해서 술자리에 있더라도 항상 일찍 들어가는 편이었다. 집 주인에게도 부모처럼 대하고 생활해서 「법이 없더라도 살 사람」이라는 평을 들을 만큼 성실했다.
그는 나중에 87년 2월 장승포읍 능포아파트 5동 206호에 월세 3만원을 내고 혼자 옮겨 가 생활하면서도 검약한 생활을 버리지 않았다. 비키니 옷장 하나에 전기스탠드와 라디오, 2단 책꽂이에 꽂힌 몇십권의 책이 그의 전 살림살이였다. 책꽂이 위에는 「부지런하자, 낭비하지 말자」 「임무에 충실하자」 「배우는 자세로 임하자」라는 세가지 생활신조를 직접 써서 붙여 놓고, 틈틈히 시간을 내어 고향의 부모, 친적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으로 외로운 마음을 달랬다. 아파트 주인 부부는 그가 평소, 검소하고 온순했으며 부끄럼을 많이 탔고 특히 방송통신강좌를 듣는 등 공부에도 남다른 열성을 갖고 있었다고 기억한다.
<추모글>
아침이 이슬을 털 때 오늘도 배고픈 하루는 메마른 새벽을 일으켜 세운다
앙금으로 굳어져가는 짓밞히던 억울한 세월 채 가시지 않은 슬픔이 많은 이땅 최루탄 파편으로 아스팔트위에 패댕겨쳐진 붉은피 가슴 붙들던 석규의 가난했던 삷 몸은 천근이나 무거워지고 비지땀 피눈물이 뒤섞여 뼈마다 앙상한 등허리 축축히 비가 내린다
참으로 인간다운 노동세상 언제?
밤마다 꿈꾸던 사람처럼 사는 세상은 어디?
일어서라
막힌 숨통 활짝 열어 젖히고 저 하늘 향하여 힘차게 외쳐라
자유롭게 사는 날을 위하여
인간답게 죽을수 있는 날을 위하여
87년 6월 민주화 항쟁의 거센 파고에 이어 7월말부터 전국적으로 번져가기 시작한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과 권익 투쟁은 대우조선에도 휘몰아쳤다. 1987년 8월 대우조선 노동자들은 “노조결성”, “임금인상” 등을 외치며 농성을 시작했고 노조를 결성하며 회사와 협상을 시도하였다. 결렬되는 협상과 회사의 기만적인 태도에 노동자들은 가두로 진출하였고 평화적 시위를 선언했지만 경찰은 무차별하게 진압하여 노동자와 시민들을 더욱 더 분노하게 했다. 대우재벌은 임금인상과 노동조건개선을 위한 투쟁을 무성의와 공권력으로 짓밟았고 대우 노동자들은 이에 항의해 또다시 평화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87년 8월22일, 김우중 회장과 면담을 요구하며 옥포아파트 사거리에서 동료, 가족들과 평화시위를 벌이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지 않기 위해 스크럼을 짜고 앉은 걸음으로 시위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경찰은 직격 최루탄을 난사했고 백골단은 흩어지는 시위대를 골목 구석까지 쫓아가서 짓밟고 옷을 발가벗기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아이들과 임산부까지 나선 평화시위를 무자비하게 짓밟던 와중 이석규 동지가 직격최루탄을 맞고 쓰러졌고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운명하였다.
이후 민주동지들의 장지인 망월동으로 향하던 중 갑작스런 장지의 변경에 분노한 노동자들은 살인경찰 구속과 피해보상, 휴업 조치 철회의 조건이 수락될 때까지 장례를 무기한 연기했으나 정권과 언론은 사체를 볼모로 한 노동쟁의 방법이라고 일제히 일방적으로 보도하며 사건의 본질을 왜곡하였다. 여기에 공권력은 시신을 탈취하여 남원의 선산에 안장하여 동지는 죽어서도 편안히 눈감지 못하고 또 한번 죽음을 당하였다.
<동지를 생각하며>
이석규 동지는 지옥같은 생활을 묵묵히 이겨내며 학업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 84년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마산고 부설 방송통신고등학교에 몇몇 직훈 동기들과 함께 입학했다. 이와 함께 5년짜리 재형저축을 붓기로 했다. 참혹하리만큼 가혹한 여건 속에서 그 나이 또래의 소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몸부림이었다.
학교에 가는 날이면 잔업, 특근, 철야에 지친 몸을 일으켜 채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 숙소에서 30~40분씩 걸어서 마산행 첫차에 몸을 싣고는 또 다시 골아 떨어진다. 옥포에서 3시간30분을 달려 마산에 도착하면, 아침 7시40분에서 8시 무렵이 된다. 아침을 사먹고 9시10분에 수업을 시작하면 겨울에는 오후 4시30분, 여름에는 4시50분~5시에 끝난다. 다시 저녁을 사먹고 옥포로 돌아오면 이미 깜깜한 밤이 되는데, 이렇게 하루에 드는 비용만 해도 1만원이 되었다.
더욱이 회사에서는 밀린 일을 핑계삼아 방통고에 다니는 노동자들에게 수업때마다 「확인서를 떼어오라」「특근, 잔업을 시키지 않겠다」고 협박하여 피곤한 몸을 쉬지도 못하고 일요일에도 어김없이 일터로 나가야 했다.
이런 사정 때문이었는지 84년초에 동지는 사내 기숙사를 나와서 장승포 주변에 있는 능포의 아파트 문간방에 동료 1명과 함께 입주하게 된다. 한달 월세 5만원으로 기숙사생활을 탈출해서 나름의 자유를 얻은 것이다.
대우조선의 노동자들은 일부가 기숙사에 살고 나머지 가족이 있거나 따로 나와 사는 사람들은 옥포, 옥림, 장승포(옥수동), 능포를 중심으로 세를 들어 살고 있다. 능포, 옥림 APT에는 주로 기능직 사원들이 집중적으로 몰려 살고 있었는데, 동지는 바다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포APT에 새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성격이 온순하고 내성적이어서 초기에는 친구도 제대로 사귀지 못했던 그는 옥포로 와서 이즈음 친구들과 어울리며 술과 담배를 배웠다. 술 담배는 절대 지나치지 않을 만큼 적당히 했는데, 외출해서 술자리에 있더라도 항상 일찍 들어가는 편이었다. 집 주인에게도 부모처럼 대하고 생활해서 「법이 없더라도 살 사람」이라는 평을 들을 만큼 성실했다.
그는 나중에 87년 2월 장승포읍 능포아파트 5동 206호에 월세 3만원을 내고 혼자 옮겨 가 생활하면서도 검약한 생활을 버리지 않았다. 비키니 옷장 하나에 전기스탠드와 라디오, 2단 책꽂이에 꽂힌 몇십권의 책이 그의 전 살림살이였다. 책꽂이 위에는 「부지런하자, 낭비하지 말자」 「임무에 충실하자」 「배우는 자세로 임하자」라는 세가지 생활신조를 직접 써서 붙여 놓고, 틈틈히 시간을 내어 고향의 부모, 친적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으로 외로운 마음을 달랬다. 아파트 주인 부부는 그가 평소, 검소하고 온순했으며 부끄럼을 많이 탔고 특히 방송통신강좌를 듣는 등 공부에도 남다른 열성을 갖고 있었다고 기억한다.
<추모글>
아침이 이슬을 털 때 오늘도 배고픈 하루는 메마른 새벽을 일으켜 세운다
앙금으로 굳어져가는 짓밞히던 억울한 세월 채 가시지 않은 슬픔이 많은 이땅 최루탄 파편으로 아스팔트위에 패댕겨쳐진 붉은피 가슴 붙들던 석규의 가난했던 삷 몸은 천근이나 무거워지고 비지땀 피눈물이 뒤섞여 뼈마다 앙상한 등허리 축축히 비가 내린다
참으로 인간다운 노동세상 언제?
밤마다 꿈꾸던 사람처럼 사는 세상은 어디?
일어서라
막힌 숨통 활짝 열어 젖히고 저 하늘 향하여 힘차게 외쳐라
자유롭게 사는 날을 위하여
인간답게 죽을수 있는 날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