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우정선생 15주기 추모제
○ 일 시: 2017년 5월 29일(월) 11:00
○ 장 소: 종로5가 기독교회관 2층 강당
행사 정보
월요일
2017-05-29
종로5가 기독교회관 2층 강당
지도에서 보기
인물 정보
이우정
- 1923년 경기도 포천 출생
- 1936년 3월 : 서울 덕수 초등학교 졸업
- 1940년 3월 : 서울 경기여자고등학교 졸업
- 1948년 5월 : 한신대 전문부 졸업
- 1951년 5월 : 한신대 본과 졸업
- 1951년 9월 - 1953년 5월 : 카나다 토론토 대학교 임마누엘 대학 수학
- 1993년 5월 : 카나다 토론토 대학교 빅토리아 대학 명예 문학박사
- 1953- 1970 : 한국신학대학교수
- 1971-1972 : 한국기독교교육협의회 교육부장
- 1972-1974 : 기독교장로회 여신도회 전국 연합회 베다니 평신도 교육원 원장
- 1974-1976 : 서울여자대학교 교수
- 1973-1977 : 한국교회여성연합회 회장
- 1977-1981 : 한국기독교장로회 여신도회 전국연합회 회장
- 1978-1981 : 한국기독학생회 이사장
- 1982 : 한빛교회 장로 임직
- 1985-1986 : 한국기독교사회문제 연구원장
- 1985-1992 : 세계교회협의회(W.C.C.)선교위원회(C.W.M.E) 부위원장
- 1987-1990 : 한국여성단체연합 회장
- 1990-1992 : 한국기독교회협의회(K.N.C.C.) 부회장
- 1991-1993 : 신민당 수석 최고의원
- 1992-1996 : 대한민국 국회의원
- 1994-1996 : 대한민국 국회 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
- 1997-1999 :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수석대표
- 1991- 2002 : 한국여성단체연합 고문
- 1996- 2002: 새정치국민회의 상임고문
- 2000- 2002: 평화를만드는여성회 이사장
- 1998- 2002: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
- 1998- 2002: 대통령 통일 고문
- 1998- 2002: 제 2건국위원회 공동위원장
- 1998- 2002: 통일부 민주평통자문위원
- 1998- 2002: 의회를 사랑하는 여성모임 고문
- 1999- 2002: 장묘문화개혁위원회 공동의장
- 1999- 2002: 정치개혁위원회 고문
- 2000- 2002: 민주화보상위원회 위원장
* 수상내역
1) 1976.11 미국의 Christianity and Crisis 인권상 수상
2) 1995. 4 한신대학교 한신상 수상
3) 1996. 12 일본 아시아 인권상의 여성 인권상 수상
4) 1997 아시아인권기금상 수상
5) 1999 대한민국 국민훈장 모란장 수상
한 평생, 진보적 여성운동과 민주화, 평화 통일, 신학발전을 위해 헌신한 故 이우정 선생님의 걸어온 길은 격동의 한국 역사 와 어우러져 있습니다. 교수, 장로, 여신학자, 민주투사, 여성운동가, 국회의원, 평화운동가 등 다양한 변신과 함께 이어진 왕성 한 활동은 이 땅의 역사 그 자체입니다. 여성 운동의 대모인 故 이우정 선생님의 삶 자체는 운동이고, 신앙이며, 앎과 실천의 통합 입니다.
故 이우정 선생님은 식민치하였던 1923년 신소설의 개척자 이해조의 손녀로 태어났습니다. 민족적 암흑기에 삶의 의미와 새로운 희망을 기독교에서 발견한 故 이우정 선생님은 한국신학대학의 전신인 조선신학교와 캐나다에서 신학 수업을 받고, 한국신학대학과 서울여자대학교 등에서 교수 생활에 헌신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1974년 국민의 기본권조차도 극도로 제한된 유신치하에서 교수직을 사임하고 고난의 길을 택하였습니다.
그후 故 이우정 선생님은 교수 시절부터 시작한 교회여성단체활동에 깊이 관여하였습니다. 한국기독교장로회여신도회, 한국교회여성연합회 등을 통하여 청계천, 중랑천변의 철거민들, 해고 당한 여성노동자들, 구속된 학생들의 가족 등, 인권이 유린되는 현장에서 그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며 그들의 분노와 고통을 함께 하였습니다. 한국교회여성연합회를 이끌며 기생관광저지운동에 앞장서고, 한국원폭피해자들의 문제를 정치화하였습니다, 투옥된 학생, 청년과 종교지도자들의 석방탄원운동도 꾸준히 전개하는 한편, 이를 세계교회와 여성계에 호소하며 국제여론의 형성에도 정력을 바쳤습니다.
1980년 3월에 서울여대에 복직된 故 이우정 선생님은 국제회의에 참석했다가 7월말에 다시 해직통고를 받고, 그해 9월 유니온 신학교 초청교수로 초빙받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여성신학 연구에 몰두하면서, 여성의 눈으로 성서를 새로이 해석하고, 여성신학 강의를 시작으로 여성신학 확산에 앞장섰습니다. 이러한 노력들은 한국여성신학자협의회의 결성, 여성교회설립, 아시아여성신학교육원 등 여성신학 전문기관을 탄생시키고 키우는 열매로 발전되었습니다.
나아가 1990년도에 여성으로서 최초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부회장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세계교회협의회(W.C.C) 선교위원회(C.W.M.E) 부위원장직에 활동하며 교회내에서의 여성의 평등한 참여를 위한 다양한 활동으로 한국 여성의 지도력을 세계적으로 유감없이 발휘하였습니다.
故 이우정 선생님은 또한번의 삶의 전기를 맞게 됩니다. 1988년 총선 이후 신민주연합의 위원장으로 천거되고, 조직개편과 함께 평민당의 수석최고위원으로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입니다. 1992년 총선 후, 전국구 국회의원, 새정치국민회의 상임고문, 제2건국위원회 공동위원장, 통일부 민주평통자문위원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치참여는 그동안 민주화운동과 여성운동에서 아낌없이 자신을 바쳤던 헌신과 신앙의 발로였고 故 이우정 선생님의 신념이 보다 현실 정치적으로 발현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국회여성특별위원회 초대 위원장직을 맡아 여성들의 불합리했던 동성동본 금혼금지법을 제정하여 위헌 판결을 성사시키는 기초를 이루었습니다. 민주화보상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민주화운동관려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관련된 자료를 꼼꼼히 검토하여 세심하고 개관적인 판결을 위해 아낌없이 노력하였습니다. 연로하심에도 불구하고 쓰러지시기 직전까지오 민주화 보상을 위해 세심한 신경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故 이우정 선생님은 격동의 민주화운동과정에서도 여성의 인권에 더 집중을 하면서 진보적 여성운동을 이끌어가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80년대 군부의 강압정치에 대한 저항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여대생 추행사건대책활동, 성도섬유 불매운동, 25세 여성 조기 정년 철폐운동, 부천서 성고문 대책활동, 박종철 물고문 치사사건, 3.8여성대회개최 그리고 민중생존권 대책위원장으로서 노동자, 농민, 빈민 등의 기층여성운동에 헌신하였습니다.
나아가 1984년에는 80년대 민족, 민주, 민중의 3대 슬로건을 갖고 운동을 하던 진보적인 교회여성운동단체들과 여성운동단체들을 결집시켜, 마침내 1987년 21개의 진보적인 여성단체들로 구성된 한국여성단체연합을 결성하였고, 초대회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故 이우정 선생님의 열정은 이념과 세대를 넘어 민중여성들의 인권획득에 기여하였고 오늘날의 여성운동에 대해 튼튼한 기초를 마련하였습니다. 특히 가족법 개정운동, 남녀고용평등법 개정, 영유아보육법 제정운동을 이끌고, 성폭력 특별법 제정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故 이우정 선생님은 1991년 5월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이라는 민간차원의 남북여성모임을 성사시킴에 따라 한반도 분단이후 최초로 남북한 여성교류의 물꼬를 열었습니다. 그 이후 판문점을 통해 북한을 방문함으로써 민족의 화해와 통일의 방법을 모색하는 등 민간여성평화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하여왔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1997년 전문적 여성평화운동체인 평화를만드는여성회 창립의 기반이 되어 본격적으로 결실을 맺게 됩니다. 북한여성과 어린이 돕기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여 분유 26톤을 북한여성에게 전달하였습니다. 평화교육사업, 통일사업, 평화군축사업, 탈북여성지원 등을 통하여 전쟁과 폭력이 아닌, 화해와 공존을 위한 평화의식 고양과 정책마련을 위한 다양한 활동도 전개하였습니다. 평화를만드는여성회 5주년 행사에서는 ·평화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력에 노력을 다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라고 평화운동의 사명감을 역설하셨습니다.
선생님의 통일에 대한 열정은 세계여성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2001년에는 북미교회여성들 그리고 북의 여성들과 함께 9월 22일 - 10월 1일 토론토 근교에서 한반도 평화통일과 연대하는 여성회의를 열어 한반도의 평화통일에 대한 전망을 세계교회여성들과 나누기도 하였습니다.
* 故 이우정 선생님은 여성해방과 민족통일, 신학발전을 위해 헌신하셨으며 연로하신 중에서도 몸을 아끼지 않고 여성, 평화와 통일을 위한 일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시다가 5월 30일 4시 18분 향년 79세로 별세하셨습니다.
- 1936년 3월 : 서울 덕수 초등학교 졸업
- 1940년 3월 : 서울 경기여자고등학교 졸업
- 1948년 5월 : 한신대 전문부 졸업
- 1951년 5월 : 한신대 본과 졸업
- 1951년 9월 - 1953년 5월 : 카나다 토론토 대학교 임마누엘 대학 수학
- 1993년 5월 : 카나다 토론토 대학교 빅토리아 대학 명예 문학박사
- 1953- 1970 : 한국신학대학교수
- 1971-1972 : 한국기독교교육협의회 교육부장
- 1972-1974 : 기독교장로회 여신도회 전국 연합회 베다니 평신도 교육원 원장
- 1974-1976 : 서울여자대학교 교수
- 1973-1977 : 한국교회여성연합회 회장
- 1977-1981 : 한국기독교장로회 여신도회 전국연합회 회장
- 1978-1981 : 한국기독학생회 이사장
- 1982 : 한빛교회 장로 임직
- 1985-1986 : 한국기독교사회문제 연구원장
- 1985-1992 : 세계교회협의회(W.C.C.)선교위원회(C.W.M.E) 부위원장
- 1987-1990 : 한국여성단체연합 회장
- 1990-1992 : 한국기독교회협의회(K.N.C.C.) 부회장
- 1991-1993 : 신민당 수석 최고의원
- 1992-1996 : 대한민국 국회의원
- 1994-1996 : 대한민국 국회 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
- 1997-1999 :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수석대표
- 1991- 2002 : 한국여성단체연합 고문
- 1996- 2002: 새정치국민회의 상임고문
- 2000- 2002: 평화를만드는여성회 이사장
- 1998- 2002: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
- 1998- 2002: 대통령 통일 고문
- 1998- 2002: 제 2건국위원회 공동위원장
- 1998- 2002: 통일부 민주평통자문위원
- 1998- 2002: 의회를 사랑하는 여성모임 고문
- 1999- 2002: 장묘문화개혁위원회 공동의장
- 1999- 2002: 정치개혁위원회 고문
- 2000- 2002: 민주화보상위원회 위원장
* 수상내역
1) 1976.11 미국의 Christianity and Crisis 인권상 수상
2) 1995. 4 한신대학교 한신상 수상
3) 1996. 12 일본 아시아 인권상의 여성 인권상 수상
4) 1997 아시아인권기금상 수상
5) 1999 대한민국 국민훈장 모란장 수상
한 평생, 진보적 여성운동과 민주화, 평화 통일, 신학발전을 위해 헌신한 故 이우정 선생님의 걸어온 길은 격동의 한국 역사 와 어우러져 있습니다. 교수, 장로, 여신학자, 민주투사, 여성운동가, 국회의원, 평화운동가 등 다양한 변신과 함께 이어진 왕성 한 활동은 이 땅의 역사 그 자체입니다. 여성 운동의 대모인 故 이우정 선생님의 삶 자체는 운동이고, 신앙이며, 앎과 실천의 통합 입니다.
故 이우정 선생님은 식민치하였던 1923년 신소설의 개척자 이해조의 손녀로 태어났습니다. 민족적 암흑기에 삶의 의미와 새로운 희망을 기독교에서 발견한 故 이우정 선생님은 한국신학대학의 전신인 조선신학교와 캐나다에서 신학 수업을 받고, 한국신학대학과 서울여자대학교 등에서 교수 생활에 헌신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1974년 국민의 기본권조차도 극도로 제한된 유신치하에서 교수직을 사임하고 고난의 길을 택하였습니다.
그후 故 이우정 선생님은 교수 시절부터 시작한 교회여성단체활동에 깊이 관여하였습니다. 한국기독교장로회여신도회, 한국교회여성연합회 등을 통하여 청계천, 중랑천변의 철거민들, 해고 당한 여성노동자들, 구속된 학생들의 가족 등, 인권이 유린되는 현장에서 그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며 그들의 분노와 고통을 함께 하였습니다. 한국교회여성연합회를 이끌며 기생관광저지운동에 앞장서고, 한국원폭피해자들의 문제를 정치화하였습니다, 투옥된 학생, 청년과 종교지도자들의 석방탄원운동도 꾸준히 전개하는 한편, 이를 세계교회와 여성계에 호소하며 국제여론의 형성에도 정력을 바쳤습니다.
1980년 3월에 서울여대에 복직된 故 이우정 선생님은 국제회의에 참석했다가 7월말에 다시 해직통고를 받고, 그해 9월 유니온 신학교 초청교수로 초빙받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여성신학 연구에 몰두하면서, 여성의 눈으로 성서를 새로이 해석하고, 여성신학 강의를 시작으로 여성신학 확산에 앞장섰습니다. 이러한 노력들은 한국여성신학자협의회의 결성, 여성교회설립, 아시아여성신학교육원 등 여성신학 전문기관을 탄생시키고 키우는 열매로 발전되었습니다.
나아가 1990년도에 여성으로서 최초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부회장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세계교회협의회(W.C.C) 선교위원회(C.W.M.E) 부위원장직에 활동하며 교회내에서의 여성의 평등한 참여를 위한 다양한 활동으로 한국 여성의 지도력을 세계적으로 유감없이 발휘하였습니다.
故 이우정 선생님은 또한번의 삶의 전기를 맞게 됩니다. 1988년 총선 이후 신민주연합의 위원장으로 천거되고, 조직개편과 함께 평민당의 수석최고위원으로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입니다. 1992년 총선 후, 전국구 국회의원, 새정치국민회의 상임고문, 제2건국위원회 공동위원장, 통일부 민주평통자문위원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치참여는 그동안 민주화운동과 여성운동에서 아낌없이 자신을 바쳤던 헌신과 신앙의 발로였고 故 이우정 선생님의 신념이 보다 현실 정치적으로 발현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국회여성특별위원회 초대 위원장직을 맡아 여성들의 불합리했던 동성동본 금혼금지법을 제정하여 위헌 판결을 성사시키는 기초를 이루었습니다. 민주화보상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민주화운동관려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관련된 자료를 꼼꼼히 검토하여 세심하고 개관적인 판결을 위해 아낌없이 노력하였습니다. 연로하심에도 불구하고 쓰러지시기 직전까지오 민주화 보상을 위해 세심한 신경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故 이우정 선생님은 격동의 민주화운동과정에서도 여성의 인권에 더 집중을 하면서 진보적 여성운동을 이끌어가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80년대 군부의 강압정치에 대한 저항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여대생 추행사건대책활동, 성도섬유 불매운동, 25세 여성 조기 정년 철폐운동, 부천서 성고문 대책활동, 박종철 물고문 치사사건, 3.8여성대회개최 그리고 민중생존권 대책위원장으로서 노동자, 농민, 빈민 등의 기층여성운동에 헌신하였습니다.
나아가 1984년에는 80년대 민족, 민주, 민중의 3대 슬로건을 갖고 운동을 하던 진보적인 교회여성운동단체들과 여성운동단체들을 결집시켜, 마침내 1987년 21개의 진보적인 여성단체들로 구성된 한국여성단체연합을 결성하였고, 초대회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故 이우정 선생님의 열정은 이념과 세대를 넘어 민중여성들의 인권획득에 기여하였고 오늘날의 여성운동에 대해 튼튼한 기초를 마련하였습니다. 특히 가족법 개정운동, 남녀고용평등법 개정, 영유아보육법 제정운동을 이끌고, 성폭력 특별법 제정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故 이우정 선생님은 1991년 5월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이라는 민간차원의 남북여성모임을 성사시킴에 따라 한반도 분단이후 최초로 남북한 여성교류의 물꼬를 열었습니다. 그 이후 판문점을 통해 북한을 방문함으로써 민족의 화해와 통일의 방법을 모색하는 등 민간여성평화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하여왔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1997년 전문적 여성평화운동체인 평화를만드는여성회 창립의 기반이 되어 본격적으로 결실을 맺게 됩니다. 북한여성과 어린이 돕기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여 분유 26톤을 북한여성에게 전달하였습니다. 평화교육사업, 통일사업, 평화군축사업, 탈북여성지원 등을 통하여 전쟁과 폭력이 아닌, 화해와 공존을 위한 평화의식 고양과 정책마련을 위한 다양한 활동도 전개하였습니다. 평화를만드는여성회 5주년 행사에서는 ·평화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력에 노력을 다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라고 평화운동의 사명감을 역설하셨습니다.
선생님의 통일에 대한 열정은 세계여성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2001년에는 북미교회여성들 그리고 북의 여성들과 함께 9월 22일 - 10월 1일 토론토 근교에서 한반도 평화통일과 연대하는 여성회의를 열어 한반도의 평화통일에 대한 전망을 세계교회여성들과 나누기도 하였습니다.
* 故 이우정 선생님은 여성해방과 민족통일, 신학발전을 위해 헌신하셨으며 연로하신 중에서도 몸을 아끼지 않고 여성, 평화와 통일을 위한 일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시다가 5월 30일 4시 18분 향년 79세로 별세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