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의기열사 37주기 추모제
○ 일 시: 2017년 5월 28일(일) 12:00
○ 장 소: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
행사 정보
일요일
2017-05-28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
지도에서 보기
인물 정보
김의기(당시 22세)
1959년 4월 20일 경북 영주군 부석면 용암리에서 김억 선생과 권채봉 여사의 4남 2녀중 막내로 출생.
1976년 2월 배명고등학교 졸업.
1976년 3월 서강대학교 경상대 무역학과 입학.
1977년 서강대학교 KUSA 하계 농촌 활동 대장.
1978년 후배들과 소그룹 학습을 시작. 농업문제 연구 모임에 참여하기 시작. 이후 농촌 활동 및 감리교 청년회 전국연합회 활동.
1980년 5월 광주 민중항쟁 목격.
1980년 5월 30일 오후 5시경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남기고 종로 5가 기독교회관 6층에서 떨어져 운명.
1976년 2월 배명고등학교 졸업.
1976년 3월 서강대학교 경상대 무역학과 입학.
1977년 서강대학교 KUSA 하계 농촌 활동 대장.
1978년 후배들과 소그룹 학습을 시작. 농업문제 연구 모임에 참여하기 시작. 이후 농촌 활동 및 감리교 청년회 전국연합회 활동.
1980년 5월 광주 민중항쟁 목격.
1980년 5월 30일 오후 5시경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남기고 종로 5가 기독교회관 6층에서 떨어져 운명.
산천의 신록이 푸르름으로 물들어가는 5월이 돌아오면 “동포여,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김의기 열사의 외침이 더욱 생생하게 우리에게 들려온다.
군사독재에 의해 18년 동안 얼어붙었던 이 땅에 민주주의를 심으려던 80년 서울의 봄은 얼굴만 바뀌어 더욱 포악해진 군사독재 집단의 군화발에 무참히 짓밟히고, 이에 항거하던 민중의 분노는 광주에서 폭발하였다. 우리나라의 군대에 의해 우리 민족이 처참하게 살육 당하는 현장을 목격한 김의기 열사는 입이 있으나 누구도 말하려 하지 않았던 광주의 참상을 직접 선봉에 서서 서울 시민에게 알리려 했다. 농민의 어려운 생활과 농업문제 해결에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져왔고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열사는 양심과 이성에 비추어보아 지신이 목격한 동족 살인의 민족적 비극을 알리지 않으면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점차 꺼져가는 서울의 민주화 열기에 다시 불을 붙이고자 결심한 것이다.
열사는 1980년 5월 30일 기독교회관에서 열리던 정기 금요기도회를 시위날로 잡았으나 그 곳은 자주 시위가 있던 곳인데다 그날은 시위를 예상하여 일방통행마저 금지시킬 만큼 경계가 삼엄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금요기도회는 취소됐지만 시위를 결행키로 한 열사는 12시경 회관에 들어가 희생을 최소로 줄이고자 모든 일을 혼자서 추진했고 6층에서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손수 타이프쳐서 인쇄했다. 여기까지는 확인된 사실이나 그 이후 김의기 열사가 투신 운명할 당시의 정황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동포에게 드리는 글’의 내용을 본다면 분명히 시위를 계획할 때 죽으려 하지는 않았으나(가족과 벗들, 애인에게 남기는 유서가 없다.) 6층의 폭 1m 베란다를 건너서 창문 밖으로 떨어져(유인물을 제작할 때 계엄군과 실랑이가 있었다 한다.) 운명하여 계엄군에 의해 시신이 서울대 병원으로 옮겨졌다. 어쨌거나 광주사태의 진상이 서울에서 퍼져나가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으려했던 계엄당국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음은 분명하다.
<열사가 남긴 글>
<동포에게 드리는 글 - 유서>
피를 부르는 미친 군화발 소리가 고요히 잠들려는 우리의 안방에까지 스며들어 우리의 가슴팍과 머리를 짓이겨 놓으려 하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보이지 않는 공포가 우리를 짓눌러 우리의 숨통을 막아버리고 우리의 눈과 귀를 막아 우리를 번득이는 총칼의 위협 아래 끌려다니는 노예로 만들고 있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동포여 우리는 지금 우엇을 하고 있는가? 무참한 살육으로 수많은 선량한 민주시민들의 뜨거우 피를 뜨거운 오월의 하늘 아래 뿌리게 한 남도의 봉기가 유신잔당들의 악랄한 언론 탄압으로 왜곡과 거짓과 악의에 찬 허위 선전으로 분칠해지고 있는 것을 보는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20여년 동안 살벌한 총검 아래 갖은 압제와 만행을 자행하던 박정희 유신정권은 그 수괴가 피를 뿌리고 쓰러졌으나, 그 잔당들에 의해 더욱 가혹한 탄압과 압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20년 동안 허위적 통계 숫자와 사이비 경제이론으로 민중의 생활을 도탄에 몰아넣은 결과를 우리는 지금 일부 돈 가진 자들 제외한 온 민중이 받는 생존권의 위협이라는 것으로 똑똑히 보고 있다.
유신 잔당들은 이제 그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공포와 불안에 떨면서 개처럼, 노예처럼 살 것인가, 아니면 높푸른 하늘을 우러르며 자유 시민으로서 맑은 공기 마음껏 마시며 환희와 승리의 노래를 부르면서 살 것인가. 또 다시 치욕의 역사를 지속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고 떳떳한 조상이 될 것인가
동포여 일어나자! 마지막 한사람까지 일어나자! 우리의 힘 모은 싸움은 역사의 정방향에 서 있다. 우리는 이긴다. 반드시 이기고야 만다. 동포여, 일어나 유신 잔당의 마지막 숨통에 결정적 철퇴를 가하자.
일어나자! 일어나자! 일어나자 동포여!
내일 정오. 서울역 광장에 모여 오늘의 성전에 몸바쳐 싸우자, 동포여!
1980년 5월 30일 김의기
<일기>
1978년 11월 29일 수요일
白汎 선생, 친일망국사대부역배 이승만. 민족, 민중, 겨레,
이 나라 좀 더 살만한 나라 만들어 보자. 알맹이는 쏙 빼서 남다 주고 껍데기만 붙잡고 늘어져 후여후여 하지 말자. 저 사악하고 불의한 무리들 제 배 채울려고 나라 팔아먹는 수작 똑똑히 보자. 손바닥만한 땅덩어리 그나마 절반으로 나위어져서 서로 앙앙대는거 집어 치우자. 그런 수작 벌이는 자들 장단에도 놀아나지 말자. 그런 자들 편안히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것들 끌어내어 민족 앞에 무릎 꿇리우고 단호히 정죄하자.
남의 입, 귀, 눈가리는 놈, 한자리 하면 마르고 닳도록 그자리 해쳐먹을려고 별별 개 같은 짓들 다 하는놈. 자기 배 부른줄만 알고 남 배고픈 줄 모르는 놈, 우리 백성 고혈 짜내서 남의 나라 시중 드는 놈, 남의 나라 돈에 환장해서 우리 처녀 팔아 처먹는 놈, 제 가진 것 아까워서 알면서도 바른소리 못지껄이는 놈, 음흉하고 흉칙한 간계 뱃속에 감추고 말만 번드레레하게 하는 놈, 닭잡아 먹고 오리발 내미는 놈, 등치고 간빼 처먹는 놈, 한자리 해쳐먹을려고 오만 방정 다 떨고 오만 아첨 다하는 놈, 이런 아류에 속하는 망족부역노들에게 민족 무서운 줄, 역사 무서운 줄 알게하여 주자.
억눌리고 빼앗기고 배고프고 협박당하고 그러면서도 할 말 한마디 못하고 죽은 듯이 지내는 민중 무섭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자.
문제의 해결책은 하나 밖에 없다. 어떠한 타협도 있을 수 없다.
단 두 개의 길에 대한 대안밖에 우리에겐 주어져 있지 아니하다. 일시 사는 듯이 보일지 모르지만 무릎을 꿇고 사는가 아니면 일시 죽는 듯이 보일지 모르지만 바로 영원히 사는 길인 끝끝내 서서 죽길 고집하는가.
<12월 16일>
촌놈-나까지 포함해서-들에게 너무 했다. 정말 너무들 했다.
참기 너무 어렵다. 쌀 한가마 팔 때마다 만 오천원씩 손해보라는 건
정말 너무하다. 정말 너무하다. 해도 너무한다.
그러면서 막대한 양의 외국산 도입까지 한다는 건
해도 너무하는 짓이다. 곡식뿐 아니고 고기와 양념마저도.
우리 농민들 어디로 가란 말이냐 어떻게 살란 말이냐.
양적 축적은 질적 변화를 일으킨다. 불문과 불안의 누적은 결국 혁명을 불러 일으킨다. 이 사람들아.
우리 농사꾼들 농민들 너무 그렇게 심하게 제멋대로 다루지 마라.
이놈들아. 이 망할놈들아.
농민들이 죽창을 다듬고 있다.
<79년 4월 5일>
일기를 참 오랫만에 써 보는듯 하다. 그동안 뭘 하며 살았길래.
열심히 살아야지, 사람보기를 하늘 보듯이.
사람 우러르길 하늘 우러르듯이
기댈 언덕을 찾기 전에 눈 둘 하늘을 찾아야하고 디딜 땅을 찾아야 한다.
내 할 일이 아직 쌓이고 쌓여있는 지금 여기서 개비는 일은 내겐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
굽히지 않고 이 세상 끝장 볼 때까지 살아봐야겠다. 아무곳에도 눈돌리지 않고 힘 흐트리지 않고 내가 산 만큼 내 일을 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세상 살이는 그렇게 한심한 것만은 결코 아니다.
내가 한심하게 살지 아니하는 한 절대로 한심할 리가 없다.
이 좋은 봄날 내가 축 쳐져 있기에는 너무 안 어울린다. 두 평도 못 되는 감옥 속에서 나는 바라고 사는 동지들과 친구들이 있는 한 난 한심해질 수도 호사스러울 수도 없다.
감옥은 부숴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무덤은 깨치고 나오지 않으면 안된다.
감옥은 감옥이기 때문에 부숴져야 하고 무덤은 무덤이기 때문에 깨쳐져야 한다.
<유가족 이야기>
김의기 열사의 매형인 `박철`님께서 전해준 이야기입니다.
1990년 2월 서강대학교 졸업식에서 김의기 명예졸업장을 장모님이 대신 받으셨다. 그때 내가 장모님을 모시고 졸업식장에 갔었는데 그 종이 쪽지 한 장이 무엇이라고 장모님이 많이 우셨다.
울 처남 김의기는 서강대학교 무역학과 76학번이다. 대학을 남들보다 2년 먼저 입학했다. 김의기가 3학년 무렵, 자신보다 어려운 후배 등록금을 대납해 주어서 자신의 졸업은 한 학기 늦어졌다. 원래는 80년 2월 졸업 예정이었다.
만일 등록금을 후배에게 주지 않고 정상적으로 80년 2월 졸업했더라면, 80년 5월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김의기 집안 형편은 매우 가난했던 시기였다. 자기도 가난한데 자기보다 더 가난한 후배에게 선행을 베풀었고, 결국은 그것이 인과가 되어 자신의 목숨을 민주제단에 바치게 되었다.
4학년 올라가서 아들 졸업이 한 학기 연기된 사유를 아들에게 듣고 나서 장모님은 일체의 꾸지람도 안 하시고 "그랬어"라고 딱 한 마디 하셨다고 한다. 장모님의 인품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참 큰 어른이셨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장모님이 명예졸업장을 가슴에 안고 왜 꺼이꺼이 우셨는지 이해가 간다.
군사독재에 의해 18년 동안 얼어붙었던 이 땅에 민주주의를 심으려던 80년 서울의 봄은 얼굴만 바뀌어 더욱 포악해진 군사독재 집단의 군화발에 무참히 짓밟히고, 이에 항거하던 민중의 분노는 광주에서 폭발하였다. 우리나라의 군대에 의해 우리 민족이 처참하게 살육 당하는 현장을 목격한 김의기 열사는 입이 있으나 누구도 말하려 하지 않았던 광주의 참상을 직접 선봉에 서서 서울 시민에게 알리려 했다. 농민의 어려운 생활과 농업문제 해결에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져왔고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열사는 양심과 이성에 비추어보아 지신이 목격한 동족 살인의 민족적 비극을 알리지 않으면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점차 꺼져가는 서울의 민주화 열기에 다시 불을 붙이고자 결심한 것이다.
열사는 1980년 5월 30일 기독교회관에서 열리던 정기 금요기도회를 시위날로 잡았으나 그 곳은 자주 시위가 있던 곳인데다 그날은 시위를 예상하여 일방통행마저 금지시킬 만큼 경계가 삼엄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금요기도회는 취소됐지만 시위를 결행키로 한 열사는 12시경 회관에 들어가 희생을 최소로 줄이고자 모든 일을 혼자서 추진했고 6층에서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손수 타이프쳐서 인쇄했다. 여기까지는 확인된 사실이나 그 이후 김의기 열사가 투신 운명할 당시의 정황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동포에게 드리는 글’의 내용을 본다면 분명히 시위를 계획할 때 죽으려 하지는 않았으나(가족과 벗들, 애인에게 남기는 유서가 없다.) 6층의 폭 1m 베란다를 건너서 창문 밖으로 떨어져(유인물을 제작할 때 계엄군과 실랑이가 있었다 한다.) 운명하여 계엄군에 의해 시신이 서울대 병원으로 옮겨졌다. 어쨌거나 광주사태의 진상이 서울에서 퍼져나가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으려했던 계엄당국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음은 분명하다.
<열사가 남긴 글>
<동포에게 드리는 글 - 유서>
피를 부르는 미친 군화발 소리가 고요히 잠들려는 우리의 안방에까지 스며들어 우리의 가슴팍과 머리를 짓이겨 놓으려 하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보이지 않는 공포가 우리를 짓눌러 우리의 숨통을 막아버리고 우리의 눈과 귀를 막아 우리를 번득이는 총칼의 위협 아래 끌려다니는 노예로 만들고 있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동포여 우리는 지금 우엇을 하고 있는가? 무참한 살육으로 수많은 선량한 민주시민들의 뜨거우 피를 뜨거운 오월의 하늘 아래 뿌리게 한 남도의 봉기가 유신잔당들의 악랄한 언론 탄압으로 왜곡과 거짓과 악의에 찬 허위 선전으로 분칠해지고 있는 것을 보는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20여년 동안 살벌한 총검 아래 갖은 압제와 만행을 자행하던 박정희 유신정권은 그 수괴가 피를 뿌리고 쓰러졌으나, 그 잔당들에 의해 더욱 가혹한 탄압과 압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20년 동안 허위적 통계 숫자와 사이비 경제이론으로 민중의 생활을 도탄에 몰아넣은 결과를 우리는 지금 일부 돈 가진 자들 제외한 온 민중이 받는 생존권의 위협이라는 것으로 똑똑히 보고 있다.
유신 잔당들은 이제 그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공포와 불안에 떨면서 개처럼, 노예처럼 살 것인가, 아니면 높푸른 하늘을 우러르며 자유 시민으로서 맑은 공기 마음껏 마시며 환희와 승리의 노래를 부르면서 살 것인가. 또 다시 치욕의 역사를 지속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고 떳떳한 조상이 될 것인가
동포여 일어나자! 마지막 한사람까지 일어나자! 우리의 힘 모은 싸움은 역사의 정방향에 서 있다. 우리는 이긴다. 반드시 이기고야 만다. 동포여, 일어나 유신 잔당의 마지막 숨통에 결정적 철퇴를 가하자.
일어나자! 일어나자! 일어나자 동포여!
내일 정오. 서울역 광장에 모여 오늘의 성전에 몸바쳐 싸우자, 동포여!
1980년 5월 30일 김의기
<일기>
1978년 11월 29일 수요일
白汎 선생, 친일망국사대부역배 이승만. 민족, 민중, 겨레,
이 나라 좀 더 살만한 나라 만들어 보자. 알맹이는 쏙 빼서 남다 주고 껍데기만 붙잡고 늘어져 후여후여 하지 말자. 저 사악하고 불의한 무리들 제 배 채울려고 나라 팔아먹는 수작 똑똑히 보자. 손바닥만한 땅덩어리 그나마 절반으로 나위어져서 서로 앙앙대는거 집어 치우자. 그런 수작 벌이는 자들 장단에도 놀아나지 말자. 그런 자들 편안히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것들 끌어내어 민족 앞에 무릎 꿇리우고 단호히 정죄하자.
남의 입, 귀, 눈가리는 놈, 한자리 하면 마르고 닳도록 그자리 해쳐먹을려고 별별 개 같은 짓들 다 하는놈. 자기 배 부른줄만 알고 남 배고픈 줄 모르는 놈, 우리 백성 고혈 짜내서 남의 나라 시중 드는 놈, 남의 나라 돈에 환장해서 우리 처녀 팔아 처먹는 놈, 제 가진 것 아까워서 알면서도 바른소리 못지껄이는 놈, 음흉하고 흉칙한 간계 뱃속에 감추고 말만 번드레레하게 하는 놈, 닭잡아 먹고 오리발 내미는 놈, 등치고 간빼 처먹는 놈, 한자리 해쳐먹을려고 오만 방정 다 떨고 오만 아첨 다하는 놈, 이런 아류에 속하는 망족부역노들에게 민족 무서운 줄, 역사 무서운 줄 알게하여 주자.
억눌리고 빼앗기고 배고프고 협박당하고 그러면서도 할 말 한마디 못하고 죽은 듯이 지내는 민중 무섭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자.
문제의 해결책은 하나 밖에 없다. 어떠한 타협도 있을 수 없다.
단 두 개의 길에 대한 대안밖에 우리에겐 주어져 있지 아니하다. 일시 사는 듯이 보일지 모르지만 무릎을 꿇고 사는가 아니면 일시 죽는 듯이 보일지 모르지만 바로 영원히 사는 길인 끝끝내 서서 죽길 고집하는가.
<12월 16일>
촌놈-나까지 포함해서-들에게 너무 했다. 정말 너무들 했다.
참기 너무 어렵다. 쌀 한가마 팔 때마다 만 오천원씩 손해보라는 건
정말 너무하다. 정말 너무하다. 해도 너무한다.
그러면서 막대한 양의 외국산 도입까지 한다는 건
해도 너무하는 짓이다. 곡식뿐 아니고 고기와 양념마저도.
우리 농민들 어디로 가란 말이냐 어떻게 살란 말이냐.
양적 축적은 질적 변화를 일으킨다. 불문과 불안의 누적은 결국 혁명을 불러 일으킨다. 이 사람들아.
우리 농사꾼들 농민들 너무 그렇게 심하게 제멋대로 다루지 마라.
이놈들아. 이 망할놈들아.
농민들이 죽창을 다듬고 있다.
<79년 4월 5일>
일기를 참 오랫만에 써 보는듯 하다. 그동안 뭘 하며 살았길래.
열심히 살아야지, 사람보기를 하늘 보듯이.
사람 우러르길 하늘 우러르듯이
기댈 언덕을 찾기 전에 눈 둘 하늘을 찾아야하고 디딜 땅을 찾아야 한다.
내 할 일이 아직 쌓이고 쌓여있는 지금 여기서 개비는 일은 내겐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
굽히지 않고 이 세상 끝장 볼 때까지 살아봐야겠다. 아무곳에도 눈돌리지 않고 힘 흐트리지 않고 내가 산 만큼 내 일을 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세상 살이는 그렇게 한심한 것만은 결코 아니다.
내가 한심하게 살지 아니하는 한 절대로 한심할 리가 없다.
이 좋은 봄날 내가 축 쳐져 있기에는 너무 안 어울린다. 두 평도 못 되는 감옥 속에서 나는 바라고 사는 동지들과 친구들이 있는 한 난 한심해질 수도 호사스러울 수도 없다.
감옥은 부숴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무덤은 깨치고 나오지 않으면 안된다.
감옥은 감옥이기 때문에 부숴져야 하고 무덤은 무덤이기 때문에 깨쳐져야 한다.
<유가족 이야기>
김의기 열사의 매형인 `박철`님께서 전해준 이야기입니다.
1990년 2월 서강대학교 졸업식에서 김의기 명예졸업장을 장모님이 대신 받으셨다. 그때 내가 장모님을 모시고 졸업식장에 갔었는데 그 종이 쪽지 한 장이 무엇이라고 장모님이 많이 우셨다.
울 처남 김의기는 서강대학교 무역학과 76학번이다. 대학을 남들보다 2년 먼저 입학했다. 김의기가 3학년 무렵, 자신보다 어려운 후배 등록금을 대납해 주어서 자신의 졸업은 한 학기 늦어졌다. 원래는 80년 2월 졸업 예정이었다.
만일 등록금을 후배에게 주지 않고 정상적으로 80년 2월 졸업했더라면, 80년 5월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김의기 집안 형편은 매우 가난했던 시기였다. 자기도 가난한데 자기보다 더 가난한 후배에게 선행을 베풀었고, 결국은 그것이 인과가 되어 자신의 목숨을 민주제단에 바치게 되었다.
4학년 올라가서 아들 졸업이 한 학기 연기된 사유를 아들에게 듣고 나서 장모님은 일체의 꾸지람도 안 하시고 "그랬어"라고 딱 한 마디 하셨다고 한다. 장모님의 인품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참 큰 어른이셨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장모님이 명예졸업장을 가슴에 안고 왜 꺼이꺼이 우셨는지 이해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