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윤성동지 34주기 추모제
○ 일 시: 2017년 4월 29일(토) 10:00
○ 장 소: 성대 명륜캠퍼스 민주열사비
행사 정보
토요일
2017-04-29
성대 명륜캠퍼스 민주열사비
지도에서 보기
인물 정보
이윤성
- 1962년 6월 23일 출생
- 1981년 경기고 졸업. 성균관대 역사철학계열 입학
- 1982년 인문과학 연구회 회장으로 활동
- 1982년 11월 3일 학생의날 가두시위에서 연행
- 5일 강제징집 됨
- 1983년 5월 4일 제대를 일주일 남기고 의문의 죽음을 당함
군에서는 부대 검열도중 관물함에서 안전증(북한삐라의 일종)이 발견돼 조사를 받던 중 자살했다 발표했으나 녹화사업과정에서 죽임을 당한 것으로 의문사의 조사결과 밝혀짐(성대 중앙도서관 앞 추모비에서 추모제 진행)
- 제 125차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인정자
동지는 ’81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 역사철학계열에 입학하여 자신의 주변뿐만 아니라 사회, 역사 전반에 대한 깊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학창생활을 하였다. 동지는 ’82년 11월 3일 학생의 날 가두시위에 참가하여 다른 많은 학생들과 함께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는데, 인문과학연구회 회장이라는 것이 밝혀져 11월 7일 새벽에 신체검사도 받지 않고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제대 일자가 얼마 남지 않은 5월 말경 군당국으로부터 동지가 북한에서 날려 보낸 삐라의 일종인 안전보장증을 가지고 있었던 일로 죽음 직전까지 군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았고, 군수사기관에서 조사가 끝난 후 자대로 돌아가 목을 매 자살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보안부대는 ‘녹화사업’을 위해 의가사 제대를 앞둔 동지를 연행하여 보안부대에서 ’83년 4월 30일경부터 사망 전날인 5월 3일까지 강도 높은 조사를 하였고, 사망 시간도 3시간의 차이가 있음이 확인되었다.
- 1981년 경기고 졸업. 성균관대 역사철학계열 입학
- 1982년 인문과학 연구회 회장으로 활동
- 1982년 11월 3일 학생의날 가두시위에서 연행
- 5일 강제징집 됨
- 1983년 5월 4일 제대를 일주일 남기고 의문의 죽음을 당함
군에서는 부대 검열도중 관물함에서 안전증(북한삐라의 일종)이 발견돼 조사를 받던 중 자살했다 발표했으나 녹화사업과정에서 죽임을 당한 것으로 의문사의 조사결과 밝혀짐(성대 중앙도서관 앞 추모비에서 추모제 진행)
- 제 125차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인정자
동지는 ’81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 역사철학계열에 입학하여 자신의 주변뿐만 아니라 사회, 역사 전반에 대한 깊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학창생활을 하였다. 동지는 ’82년 11월 3일 학생의 날 가두시위에 참가하여 다른 많은 학생들과 함께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는데, 인문과학연구회 회장이라는 것이 밝혀져 11월 7일 새벽에 신체검사도 받지 않고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제대 일자가 얼마 남지 않은 5월 말경 군당국으로부터 동지가 북한에서 날려 보낸 삐라의 일종인 안전보장증을 가지고 있었던 일로 죽음 직전까지 군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았고, 군수사기관에서 조사가 끝난 후 자대로 돌아가 목을 매 자살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보안부대는 ‘녹화사업’을 위해 의가사 제대를 앞둔 동지를 연행하여 보안부대에서 ’83년 4월 30일경부터 사망 전날인 5월 3일까지 강도 높은 조사를 하였고, 사망 시간도 3시간의 차이가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윤성 동지는 예식장을 경영하시는 양친 슬하에서 5녀 1남중 3대 독자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다. 초등학교 때는 학급에서 반장을 맡는 등 우수한 학생이었으며 고등학교 시절에는 명랑한 성격을 지녔으나, 스스로 리더쉽이 부족하다고 느껴 웅변반에 들었고 서울역 광장에서 많은 일반인들이 모인 가운데 웅변연습을 할 정도로 활달하고 개방적이었으며 의지가 강하였다.
1981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 역사철학계열에 입학한 뒤에는 진리탐구에 남다른 열정을 품었고, 자신의 주변 뿐만 아니라 사회, 역사 전반에 대한 깊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학창생활에 임했다고 한다.
2학년때 인문과학연구회라는 써클의 회장직을 맡았고 평소 유복한 가정환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이동지는 82년 11월 3일 학생의 날 가두시위때 다른 많은 학생들과 함께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는데 인문과학연구회 회장이라는 것이 밝혀져 11월 7일 새벽에 신체검사도 받지 않고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아버지가 고령(60세가 넘음)이신데다가 3대독자이고 시력이 나빠 보통의 경우에는 현역입대가 불가능한 조건이었다.
83년 1월 10일경 친구들이 가족과 함께 면회갔을 때 이동지는 건강한 모습으로 “내가 여기서 짬밥을 제일 잘 먹고 있으니 걱정말라. 후배들에게 열심히 살아달라고 해라”고 하는 등 어려운 조건에서도 잘 적응해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제대 일자가 얼마남지 않았던 5월말경 이윤성 동지의 부모님은 군당국으로부터 이동지가 자살했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이동지가 북한에서 날려보낸 삐라의 일종인 안전보장증을 가지고 있었던 일로 죽음 직전까지 군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군수사기관에서는 조사가 끝난 후 자대로 돌아가 목을 매어 죽었다고 통보했다.
1981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 역사철학계열에 입학한 뒤에는 진리탐구에 남다른 열정을 품었고, 자신의 주변 뿐만 아니라 사회, 역사 전반에 대한 깊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학창생활에 임했다고 한다.
2학년때 인문과학연구회라는 써클의 회장직을 맡았고 평소 유복한 가정환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이동지는 82년 11월 3일 학생의 날 가두시위때 다른 많은 학생들과 함께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는데 인문과학연구회 회장이라는 것이 밝혀져 11월 7일 새벽에 신체검사도 받지 않고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아버지가 고령(60세가 넘음)이신데다가 3대독자이고 시력이 나빠 보통의 경우에는 현역입대가 불가능한 조건이었다.
83년 1월 10일경 친구들이 가족과 함께 면회갔을 때 이동지는 건강한 모습으로 “내가 여기서 짬밥을 제일 잘 먹고 있으니 걱정말라. 후배들에게 열심히 살아달라고 해라”고 하는 등 어려운 조건에서도 잘 적응해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제대 일자가 얼마남지 않았던 5월말경 이윤성 동지의 부모님은 군당국으로부터 이동지가 자살했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이동지가 북한에서 날려보낸 삐라의 일종인 안전보장증을 가지고 있었던 일로 죽음 직전까지 군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군수사기관에서는 조사가 끝난 후 자대로 돌아가 목을 매어 죽었다고 통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