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오원택동지 22주기 추모제
○ 일 시: 2017년 3월 12일(일) 13:00
○ 장 소: 대전현충원
행사 정보
일요일
2017-03-12
대전현충원
지도에서 보기
인물 정보
오원택
- 1974년 전남 장성 출생
- 1992년 경기대학교 관광경영학과 입학. 학생회 활동에 헌신. 사학비리의 주법 손종국과 재단에서 사주한 유도부에 의해 부상을 입기도 함
- 1993년 관광경영학과 연대사업부장. 관광경영학과 부학생회장(2학기)
- 1993년 9월 21일 경기대첩때 부상, 입원
- 1994년 관광경영학과 학생회장
- 1995년 1월 군입대
- 1995년 3월 17일 군복무 중 운명. 부대측의 발표는 부대내의 베란다에서 추락하여 숨졌다고 하나 의문의 여지가 있음.
동지는 ’92년 경기대학교 관광경영학과에 입학해 모범적이고 헌신적인 학교생활을 했다. 2학년 때는 혼자서 6개의 학생회 각 단위 부서 연석회의를 참가하고 매일 학생회실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미제식민지 조국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진실한 삶을 살아 나가려고 노력했고, 학우대중을 만나 이야기하며 학우와 함께 조국을 생각하는 청년이었다. 그러다 공대 이전 운운하면서 폐쇄하려던 사학비리 주범 손종국과 모리배로 대변되는 재단에서 사주한 유도부의 야구방망이에 맞아 심한 후유증을 호소하다 ’95년 초 입대한 후 운명하였는데 부대 측의 발표는 부대 내의 베란다에서 추락해 숨졌다고 하나 의문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 1992년 경기대학교 관광경영학과 입학. 학생회 활동에 헌신. 사학비리의 주법 손종국과 재단에서 사주한 유도부에 의해 부상을 입기도 함
- 1993년 관광경영학과 연대사업부장. 관광경영학과 부학생회장(2학기)
- 1993년 9월 21일 경기대첩때 부상, 입원
- 1994년 관광경영학과 학생회장
- 1995년 1월 군입대
- 1995년 3월 17일 군복무 중 운명. 부대측의 발표는 부대내의 베란다에서 추락하여 숨졌다고 하나 의문의 여지가 있음.
동지는 ’92년 경기대학교 관광경영학과에 입학해 모범적이고 헌신적인 학교생활을 했다. 2학년 때는 혼자서 6개의 학생회 각 단위 부서 연석회의를 참가하고 매일 학생회실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미제식민지 조국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진실한 삶을 살아 나가려고 노력했고, 학우대중을 만나 이야기하며 학우와 함께 조국을 생각하는 청년이었다. 그러다 공대 이전 운운하면서 폐쇄하려던 사학비리 주범 손종국과 모리배로 대변되는 재단에서 사주한 유도부의 야구방망이에 맞아 심한 후유증을 호소하다 ’95년 초 입대한 후 운명하였는데 부대 측의 발표는 부대 내의 베란다에서 추락해 숨졌다고 하나 의문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오원택 동지는 92년 경기대학교 관광경영학과에 입학하여 모범적이고 헌신적인 학교생활을 하였다. 2학년때는 혼자서 6개의 학생회 각 단위 부서 연석회의를 참가하고 매일 학생회실에서 살다시피하면서 학우와 함께 조국을 생각하는 청년이었다.
그러다 공대 이전 운운하면서 폐쇄하려던 사학비리 주범 손종국과 모리배로 대변되는 재단에서 사주한 유도부의 야구방망이에 맞아 심한 후유증을 호소하다 95년초 입대한 후 운명하였는데 부대측의 발표는 부대내의 베란다에서 추락하여 숨졌다고하나 의문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동지를 생각하며
49년 10월 20일 수요일 (1994년이지만 그는 분단 49년 해방 49년이라는 의미로 년력을 “자주민주통일 진군 49”라 사용했다.)
올해도 저물어가고 가을도 다 지쳐가고 낯짝은 인자 살아나고 내 心身들도 살아나고, 나의 쉼터도 살아나고.
외로운 病室이었다. 만 20일동안 가끔 다가와 주는 동지들이 있었기에 살아날 수 있었지만 병실을 뛰쳐나와 돌아온 校庭. 그리고 두달만에 돌아간 故鄕. 반가운 사람들. 그래도 다쳤다고 병원에 자빠져 있었다고 사람대접 해주더만.
..... 중 략 .....
오늘은 서울·수원대 연대 집회 있는 날. 곧 출발해야 헌디 사람들 꼴이 별로 안뵌다. 오늘 투쟁 일궈내서 내일은 꼭 국회접수 해얀디. 경기 학원 문제해결의 의지를 극명해얀디. 기나긴 올해 학원 자주화 투쟁의 마무리를 야물게 해얄것인디. 그리고 올해 승리를 발판으로 민족사학 건설에 박차를 가해얀디. 지금 출발헌단다.
더 써야 씨것는디. 어찌것냐. 大義를 위함인디. 우리의 京畿를, 祖國을 위해선디.
유고글
낙서장에
그래도 내가 아직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는 이땅에 미제의 그림자가 걷혀지지 않았기에 미제를 몰아내기 위한 투쟁이 내 어깨에 지워져 있기에 학우 대중들이 존재하기에 나와 함께 투쟁의 한길로 가야할 학우들이 있기에 이러한 이유들이 있기에 식민지 조국의 암울한 현실속에서도 내 삶을 구가하고 잘 살아 나가려고 몸부림치고 학우대중을 만나 이야기하며 술을 구가한다.
<추모비에 쓰인 내용 - 1994년 5월 22일 날적이 중에서>
그러다 공대 이전 운운하면서 폐쇄하려던 사학비리 주범 손종국과 모리배로 대변되는 재단에서 사주한 유도부의 야구방망이에 맞아 심한 후유증을 호소하다 95년초 입대한 후 운명하였는데 부대측의 발표는 부대내의 베란다에서 추락하여 숨졌다고하나 의문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동지를 생각하며
49년 10월 20일 수요일 (1994년이지만 그는 분단 49년 해방 49년이라는 의미로 년력을 “자주민주통일 진군 49”라 사용했다.)
올해도 저물어가고 가을도 다 지쳐가고 낯짝은 인자 살아나고 내 心身들도 살아나고, 나의 쉼터도 살아나고.
외로운 病室이었다. 만 20일동안 가끔 다가와 주는 동지들이 있었기에 살아날 수 있었지만 병실을 뛰쳐나와 돌아온 校庭. 그리고 두달만에 돌아간 故鄕. 반가운 사람들. 그래도 다쳤다고 병원에 자빠져 있었다고 사람대접 해주더만.
..... 중 략 .....
오늘은 서울·수원대 연대 집회 있는 날. 곧 출발해야 헌디 사람들 꼴이 별로 안뵌다. 오늘 투쟁 일궈내서 내일은 꼭 국회접수 해얀디. 경기 학원 문제해결의 의지를 극명해얀디. 기나긴 올해 학원 자주화 투쟁의 마무리를 야물게 해얄것인디. 그리고 올해 승리를 발판으로 민족사학 건설에 박차를 가해얀디. 지금 출발헌단다.
더 써야 씨것는디. 어찌것냐. 大義를 위함인디. 우리의 京畿를, 祖國을 위해선디.
유고글
낙서장에
그래도 내가 아직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는 이땅에 미제의 그림자가 걷혀지지 않았기에 미제를 몰아내기 위한 투쟁이 내 어깨에 지워져 있기에 학우 대중들이 존재하기에 나와 함께 투쟁의 한길로 가야할 학우들이 있기에 이러한 이유들이 있기에 식민지 조국의 암울한 현실속에서도 내 삶을 구가하고 잘 살아 나가려고 몸부림치고 학우대중을 만나 이야기하며 술을 구가한다.
<추모비에 쓰인 내용 - 1994년 5월 22일 날적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