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조영래변호사 26주기 추모제
○ 일 시: 2016년 12월 10일(토) 11:00
○ 장 소: 마석 민족민주열사묘역
행사 정보
토요일
2016-12-10
마석 민족민주열사묘역
지도에서 보기
인물 정보
조영래(당시 43세)
1947년 3월 26일 대구에서 출생
1965년 3월 서울대 법대 입학
1969년 3월 서울대 대학원 입학
1971년 10월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
1983년 변호사 개업, 전태일 평전 집필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 등 변론
1990년 9월 폐암 3기로 입원
1990년 12월 12일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운명
2020년 제33주년 6·10민주항쟁 기념식에서 국민훈장 모란장 수여
1965년 3월 서울대 법대 입학
1969년 3월 서울대 대학원 입학
1971년 10월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
1983년 변호사 개업, 전태일 평전 집필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 등 변론
1990년 9월 폐암 3기로 입원
1990년 12월 12일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운명
2020년 제33주년 6·10민주항쟁 기념식에서 국민훈장 모란장 수여
조영래 변호사는 서울대 재학중 한일회담 반대, 삼성재벌 밀수 규탄, 6.7부정선거 규탄, 삼선개헌 반대, 교련반대, 공명선거쟁취 등의 학생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된 후 6년 가까이 피신생활을 하던 중 민주화운동에 주력하였다.
특히 3년 여에 걸친 각고 끝에 전태일 평전(어는 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집필하는가 하면,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망원동 수재사건, 대우어패럴사건, 이경숙 사건(여성 조기정년제 철폐)등을 변론하였고, 변호사협의회 인권보고서를 집필하기도 하였다.
또한 보도지침사건, 박길재 사건(상봉동 진폐증 보상문제)을 담당하였으며, 기타 노동, 빈민, 공해, 학생운동 관련사건 등 인권변호에 전력하던 그는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을 만들고나서 지병인 폐암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을 뒤로 한 채 운명하였다.
<동지를 생각하며>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아름다운 변호사 조영래
- 민주유공 96년 10월호 中-
65년 서울대 전체수석으로 법학과에 입학하고 그 어렵다는 사법고시를 6개월만에 끝내버린 ‘시험도사’로서의 지적인 재능, 경기고 시절 박정희 정권의 굴욕적인 한일협정에 반대해 ‘공부선수’들로 이뤄진 경기고 학생들을 거리로 이끌어낸 탁월한 대중선동력, 78, 80년대 인권변호사로서 최고의 승소율을 가능케 한 논리정연한 변론, 판검사와 방청객을 침묵케한 유려한 변론문 등, 한 인간이 가진 참으로 다양한 재주에 시기심까지 잠재우는 그의 놀라운 재능은 정작 따로있다.
다양한 세속적 재주를 넘어서는 실로 위대한 그의 재능은 바로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인간을 사랑할 줄 알고 그 사랑을 관철하기 위해 결연한 투혼을 불태울 수 있는 재능, 이것이야 말로 실로 범인들을 고개 숙이게 하는 위대한 재능이다.
조영래라는 이름 석자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란 영화가 개봉되면서부터. 1970년 스물둘의 젊음을 불길 속에 내던졌던 청년노동자 전태일의 삶과 투쟁을 그린 ‘전태일 평전’, 이 책은 이후 전태일 동지의 죽음을 노동운동의 불꽃으로 타오르게 하면서 한국노동운동사의 새 지평을 열게 했지만 정작 글쓴이가 알려진 것은 90년 말의 일이다.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엮음’으로 나오던 이 책은 90년 개정판을 내면서 조씨의 지우 장기표 씨에 의해 원저자가 밝혀지게 됐다. 그러나 조씨는 자신의 생전에 이 사실이 알려지기를 끝내 거부라도 하듯 개정판 발간을 열흘 남짓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95년 전태일 평전이 영화화됐다.
조영래 변호사는 영화 속에 나레이터인 70년대 고뇌하는 지식인으로 그려지면서 평전의 저자로서 관심을 끌게 됐다. 그는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73년에 1년 6개월간의 복역을 마치고 만기출소하지만 다음 해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되면서 그 후 79년까지 6년 가까운 피신생활을 시작한다.
피신생활 중에도 조동지는 사회의 민주화를 향한 투쟁의 불꽃을 삭이지 않았고, 특히 3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으로 ‘전태일 평전’을 집필한다. 그는 암울하기만 한 수배의 시간조차도 자포와 체념이 아닌 투쟁의 기회로 활용한 것이다. 청년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을 노동운동을 부활시키는 횃불로 승화시킨 불후의 걸작 ‘전태일 평전’은 단순한 글재주의 산물이 아니다. 당시 젊은 그는 혈관을 관통한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결연한 투혼 , 그리고 어떤 순간에서도 자신은 물론 남들에게까지 희망의 빛을 던져주는 타고난 낙천성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조영래 변호사는 기본적으로 이상주의자다. 새날을 꿈꾸며 우리 사회의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대개가 그렇듯이 그 역시 이상주의자다. 훨씬 낙관적인 이상주의자였다. 어둠 속에서 절망하지 않고 도리어 남들에게 빛을 던져 주는 사람, 인간 조영래는 타고난 낙천적 기질에 바탕한 이상주의자다.
조변호사는 동시에 현실주의자다. 어떤 순간에도 현실에의 끈을 놓지 않는다. 가장 현실적으로 상황을 분석하고 가장 현실적인 대안을 찾는 인물, 그리고 그 대안을 목숨 걸고 이루려 하는 인물이 바로 조영래 변호사이다.
조영래 변호사는 이토록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다중적 성격의 소유자다. 그러나 그의 삶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는 일관된 주제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조영래 변화사의 역작 ‘전태일 평전’에 그려진 동지 전태일을 두고 혹자는 예수의 순교자적 삶을 떠올린다.
그러나 인간 조영래 자체가 그런 삶을 살지 않았나 싶다. 한 인간이 평생을 통해 이뤄낼 수 있는 모든 인간적 순수의 결정체로서 마흔넷 그의 삶을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환하게 타오르는 빛이 사랑이다.
특히 3년 여에 걸친 각고 끝에 전태일 평전(어는 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집필하는가 하면,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망원동 수재사건, 대우어패럴사건, 이경숙 사건(여성 조기정년제 철폐)등을 변론하였고, 변호사협의회 인권보고서를 집필하기도 하였다.
또한 보도지침사건, 박길재 사건(상봉동 진폐증 보상문제)을 담당하였으며, 기타 노동, 빈민, 공해, 학생운동 관련사건 등 인권변호에 전력하던 그는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을 만들고나서 지병인 폐암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을 뒤로 한 채 운명하였다.
<동지를 생각하며>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아름다운 변호사 조영래
- 민주유공 96년 10월호 中-
65년 서울대 전체수석으로 법학과에 입학하고 그 어렵다는 사법고시를 6개월만에 끝내버린 ‘시험도사’로서의 지적인 재능, 경기고 시절 박정희 정권의 굴욕적인 한일협정에 반대해 ‘공부선수’들로 이뤄진 경기고 학생들을 거리로 이끌어낸 탁월한 대중선동력, 78, 80년대 인권변호사로서 최고의 승소율을 가능케 한 논리정연한 변론, 판검사와 방청객을 침묵케한 유려한 변론문 등, 한 인간이 가진 참으로 다양한 재주에 시기심까지 잠재우는 그의 놀라운 재능은 정작 따로있다.
다양한 세속적 재주를 넘어서는 실로 위대한 그의 재능은 바로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인간을 사랑할 줄 알고 그 사랑을 관철하기 위해 결연한 투혼을 불태울 수 있는 재능, 이것이야 말로 실로 범인들을 고개 숙이게 하는 위대한 재능이다.
조영래라는 이름 석자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란 영화가 개봉되면서부터. 1970년 스물둘의 젊음을 불길 속에 내던졌던 청년노동자 전태일의 삶과 투쟁을 그린 ‘전태일 평전’, 이 책은 이후 전태일 동지의 죽음을 노동운동의 불꽃으로 타오르게 하면서 한국노동운동사의 새 지평을 열게 했지만 정작 글쓴이가 알려진 것은 90년 말의 일이다.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엮음’으로 나오던 이 책은 90년 개정판을 내면서 조씨의 지우 장기표 씨에 의해 원저자가 밝혀지게 됐다. 그러나 조씨는 자신의 생전에 이 사실이 알려지기를 끝내 거부라도 하듯 개정판 발간을 열흘 남짓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95년 전태일 평전이 영화화됐다.
조영래 변호사는 영화 속에 나레이터인 70년대 고뇌하는 지식인으로 그려지면서 평전의 저자로서 관심을 끌게 됐다. 그는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73년에 1년 6개월간의 복역을 마치고 만기출소하지만 다음 해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되면서 그 후 79년까지 6년 가까운 피신생활을 시작한다.
피신생활 중에도 조동지는 사회의 민주화를 향한 투쟁의 불꽃을 삭이지 않았고, 특히 3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으로 ‘전태일 평전’을 집필한다. 그는 암울하기만 한 수배의 시간조차도 자포와 체념이 아닌 투쟁의 기회로 활용한 것이다. 청년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을 노동운동을 부활시키는 횃불로 승화시킨 불후의 걸작 ‘전태일 평전’은 단순한 글재주의 산물이 아니다. 당시 젊은 그는 혈관을 관통한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결연한 투혼 , 그리고 어떤 순간에서도 자신은 물론 남들에게까지 희망의 빛을 던져주는 타고난 낙천성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조영래 변호사는 기본적으로 이상주의자다. 새날을 꿈꾸며 우리 사회의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대개가 그렇듯이 그 역시 이상주의자다. 훨씬 낙관적인 이상주의자였다. 어둠 속에서 절망하지 않고 도리어 남들에게 빛을 던져 주는 사람, 인간 조영래는 타고난 낙천적 기질에 바탕한 이상주의자다.
조변호사는 동시에 현실주의자다. 어떤 순간에도 현실에의 끈을 놓지 않는다. 가장 현실적으로 상황을 분석하고 가장 현실적인 대안을 찾는 인물, 그리고 그 대안을 목숨 걸고 이루려 하는 인물이 바로 조영래 변호사이다.
조영래 변호사는 이토록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다중적 성격의 소유자다. 그러나 그의 삶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는 일관된 주제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조영래 변화사의 역작 ‘전태일 평전’에 그려진 동지 전태일을 두고 혹자는 예수의 순교자적 삶을 떠올린다.
그러나 인간 조영래 자체가 그런 삶을 살지 않았나 싶다. 한 인간이 평생을 통해 이뤄낼 수 있는 모든 인간적 순수의 결정체로서 마흔넷 그의 삶을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환하게 타오르는 빛이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