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최웅동지 23주기 추모제
○ 일 시: 2016년 10월 23일(일) 12:00
○ 장 소: 마석 민족민주열사묘역
행사 정보
일요일
2016-10-23
마석 민족민주열사묘역
지도에서 보기
인물 정보
최웅(당시 29세)
1964년 5월 1일 강원도 강릉 출생
1983년 강릉고 졸업, 서강대 물리학과 입학
동아리 ‘탈’ 연구회 가입 활동
1986년 노동운동을 위해 인천으로 이전
1987년 경동산업 입사, 풍물패 활동 및 디딤돌 소모임 활동 전개
1989년 경동산업 해고, 인해협에서 간사로 활동
1990년 인천민중교육연구소 실무간사로 근무
1992년 인천민중연합 노동자위원회 활동
1993년 인천민중연합 부설 ‘우리’ 노동상담실 노사부장으로 근무
1993년 10월 26일 신혼여행 중 사고로 운명
1983년 강릉고 졸업, 서강대 물리학과 입학
동아리 ‘탈’ 연구회 가입 활동
1986년 노동운동을 위해 인천으로 이전
1987년 경동산업 입사, 풍물패 활동 및 디딤돌 소모임 활동 전개
1989년 경동산업 해고, 인해협에서 간사로 활동
1990년 인천민중교육연구소 실무간사로 근무
1992년 인천민중연합 노동자위원회 활동
1993년 인천민중연합 부설 ‘우리’ 노동상담실 노사부장으로 근무
1993년 10월 26일 신혼여행 중 사고로 운명
87년 극심한 산업재해로 1년에 잘린 손가락만 한가마씩 나온다는 경동산업에 입사, 풍물패 활동과 민주파 모임인 디딤돌의 열성적인 회원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동지의 활동을 주목하기 시작한 사측에 의해 89년 봄에 해고되었고, 이후 90년초까지 인천지역해고자협의회 실무자로 근무하며 복직투쟁을 전개하였다. 90년초 인천민중교육연구소와 92년 인천민중연합 상담실 실무자로 근무하였으며 전두환정권 때부터 계속해온 병역징집 거부투쟁을 계속 수행하였다. 이로 인해 노동조합 방문조차도 커다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어려운 지경에 놓이었다. 동지는 생활비 마련을 위해 2년여 가까이 새벽에 아파트 자동차 세차를 해오고 있었으며 일주일에 3번정도 중학생 과외지도를 하는 등 참으로 억측스러운 생활을 꾸려나갔다. 처가의 완강한 반대를 극복하고 마침내 결혼식을 올리며 노동자의 삶을 결의하던 10월 26일, 그러나 그날 이후 신혼여행에서 불의의 조난사고로 운명을 달리하게 되었다.
동지를 생각하며 - 유현상이라 불리웠던 노동자
93년 현상이는 결혼하였다. 지지리 고생만 하다가 어려움을 헤치고 결혼하는 거였기에 많은 동료들이 참석하여 결혼을 축하하였다. 그날 서강대 운동장에는 가을 하늘에 흰 구름이 한가로이 떠다니고 있었고 신랑, 신부를 비롯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잔잔한 하늘에 조약돌을 던지듯 싱그럽게 울려 퍼졌다. 모든 것이 평안했다. 그 동안의 걱정과 고통스러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현상이는 88년에 경동산업에 들어와 노동운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서강대를 다닐 때에는 탈춤반에서 활동했다 한다. 그 때 현상이는 동료들에게 ‘미키마우스’란 애칭으로 불렸다 한다. 그 애칭이 가져다주는 느낌처럼 그는 사람들에게 친근함을 가져다주었다. 현상이는 경동산업에 노조민주화 조직인 ‘디딤돌’을 조직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디딤돌이 풍물패로 자리잡는데 이전에 학교에서 배운 경험을 십분 발휘하였다. 그러나 현상이의 현장 활동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활동하였기에 해고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회사측은 디딤돌 자체를 와해시키려고 하였다. 대의원 선거를 앞두고 디딤돌 회장단에 대한 징계회부 이에 디딤돌 회원들과 조합원들의 농성, 그리고 결국에는 분신하기에 이르렀다. 두 동지가 운명하고 대부분 구속되었다. 현상이는 당시에 병역 기피 중이었기에 이 투쟁에 결합하지 못했다. 그는 이후에 많은 번민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지역의 노동운동을 더욱 열심히 하기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다하였다. 그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이 신분이 자유롭지 못하여 마음대로 회사 앞으로 나가 조합원들을 만날 수 없었던 거였다. 현상이가 힘들어 할 때 나는 조합원을 데리고 현상이를 만나곤 하였다. 조합원들을 만나면 현상이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힘차지곤 하였다.
항상 웃는 얼굴, 커피를 너무 좋아해 쇠주 마시듯 커피를 마시던 유현상.
그는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새벽 세차를 몇 년 동안 하였다. 운동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무능한데 비해 현상이는 무척 성실하게 일을 해 나갔다. 그리고 몇 년 동안 사귀어 왔던 동지와 결혼하여 방 한 칸이라도 마련하기 위하여 애썼다.
그러던 현상이가 결혼한 것이다. 그날 참석한 모두는 그날의 분위기처럼 앞으로도 모든 것이 평안하게 잘 이루어 질 것으로 낙관하였다.
현상이를 신혼여행 보내고 나서 우리는 그가 돌아올 날 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현상이가 죽었다는 전화를 받은 것이다. 우리는 강릉행 밤 기차에 몸을 실었다. 밤새 쇠주를 기울이며 새벽녘에 강릉에 도착하였다. 현상이는 바위에서 사진을 찍다가 뒤에서 덮친 파도에 현상이가 색시와 함께 바다에 빠졌다. 바닷속에서 몇 번 자맥질을 하던 현상이는 색시를 바위 위에 밀어 올려놓고 다시는 떠오르지 않았다.
현상이의 장례를 치루는날 우리는 털털거리는 운구차를 타고 미시령 고개를 넘어 마석으로 향하였다. 그날 미시령 고개에서 본 동해 바다는 쪽빛으로 선명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고, 가을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파랗게 펼쳐져 있었다. 나는 그 때 쓸프도록 파란 하늘이 있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 그리고 그때의 하늘과 바다, 설악산의 모습이 현상이의 운구 행렬과 더불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를 묻으며 몇 년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따듯한 감정을 불러 주었던 그의 이름도 함께 묻혔다. 유·현·상 이라고 씌어 있던 주민등록증이 그의 관 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부모님이 지어 준 최 웅이란 이름을 죽어서 다시 찾았다. 한 평생 노동자로 살아갔으면 찾지 못했을 이름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돌아오며 이런 말로 우리 스스로를 위안했다. “지금까지 힘들게 살아오다가 가장 행복한 때에 죽었기에 현상이는 서럽지 않을 거라고··· ” 그래서인지 항상 웃음을 머금고 살던 현상이는 죽은 후에도 우리에게 웃음을 안겨 주고 있다.
동지가 남긴 글
<편 지>
하루 온종일 돌아다니다가 네 생각이 나서 글을 쓰기로 했다.
어디에서 또 열심히 살고 있으려니 하던 기대는 또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 그 어느 누구도 아닌 너를 위해서 말이다.
삶이란 기나긴 여행을 하는 것이다. 험난한 산과 물줄기와 새와 꽃, 나무, 풀, 이런 것을 지나쳐 가는 것이리라.
험난한 산등성이를 오를때는 튼튼한 장비와 악다구니가 필요하듯이 인간에게 닥친 시련도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땀이 비오듯 흐르는 것을 식혀주는 시원한 산바람이 있듯이,
고뇌의 눈물을 이겨내는 것은 그 이후, 한 인간으로 성숙되어 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기쁨이라 여긴다.
자신 스스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하는 것, 그 넉넉함은 마음먹어야 바뀌는 것만은 아니더라!
자신과 더불어 사는 많은 사람들의 삶을 넉넉히 바라볼 수 있을 때까지 부단히 자신을 향상시키는 것. 생활을 아는 것.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소박한 생활의 기쁨을 간직하고 사는 이웃이 많다. 그네들의 삶도 어찌 시련이 없었으리!
허나 이겨가고 있으며 소박하게나마 자신의 삶의 지표를 갖고 있음이 좋아 보인다.
그 속에서 난, 너는 어떤 모습이었나!
참, 어설프고 작기만 하다.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인간으로서 갖는 고뇌의 흔적은 남아있으나 때론 체념으로, 때론 슬기롭게 자신을 지키고 있음을 본다.
날씨가 참으로 화창하다.
봄날, 훌훌 떨어버리고 떠나는 여행길. 편하고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시간이 난다면 분위기 좋은 곳에서 커피 한잔하고 싶다.
앞으로의 우리의 삶에 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쁨을 누리는 것도 행복이라 여겨진다.
건강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여유보다 좋은 치료법은 없다고 본다.
92. 5. 20.
동지를 생각하며 - 유현상이라 불리웠던 노동자
93년 현상이는 결혼하였다. 지지리 고생만 하다가 어려움을 헤치고 결혼하는 거였기에 많은 동료들이 참석하여 결혼을 축하하였다. 그날 서강대 운동장에는 가을 하늘에 흰 구름이 한가로이 떠다니고 있었고 신랑, 신부를 비롯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잔잔한 하늘에 조약돌을 던지듯 싱그럽게 울려 퍼졌다. 모든 것이 평안했다. 그 동안의 걱정과 고통스러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현상이는 88년에 경동산업에 들어와 노동운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서강대를 다닐 때에는 탈춤반에서 활동했다 한다. 그 때 현상이는 동료들에게 ‘미키마우스’란 애칭으로 불렸다 한다. 그 애칭이 가져다주는 느낌처럼 그는 사람들에게 친근함을 가져다주었다. 현상이는 경동산업에 노조민주화 조직인 ‘디딤돌’을 조직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디딤돌이 풍물패로 자리잡는데 이전에 학교에서 배운 경험을 십분 발휘하였다. 그러나 현상이의 현장 활동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활동하였기에 해고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회사측은 디딤돌 자체를 와해시키려고 하였다. 대의원 선거를 앞두고 디딤돌 회장단에 대한 징계회부 이에 디딤돌 회원들과 조합원들의 농성, 그리고 결국에는 분신하기에 이르렀다. 두 동지가 운명하고 대부분 구속되었다. 현상이는 당시에 병역 기피 중이었기에 이 투쟁에 결합하지 못했다. 그는 이후에 많은 번민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지역의 노동운동을 더욱 열심히 하기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다하였다. 그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이 신분이 자유롭지 못하여 마음대로 회사 앞으로 나가 조합원들을 만날 수 없었던 거였다. 현상이가 힘들어 할 때 나는 조합원을 데리고 현상이를 만나곤 하였다. 조합원들을 만나면 현상이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힘차지곤 하였다.
항상 웃는 얼굴, 커피를 너무 좋아해 쇠주 마시듯 커피를 마시던 유현상.
그는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새벽 세차를 몇 년 동안 하였다. 운동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무능한데 비해 현상이는 무척 성실하게 일을 해 나갔다. 그리고 몇 년 동안 사귀어 왔던 동지와 결혼하여 방 한 칸이라도 마련하기 위하여 애썼다.
그러던 현상이가 결혼한 것이다. 그날 참석한 모두는 그날의 분위기처럼 앞으로도 모든 것이 평안하게 잘 이루어 질 것으로 낙관하였다.
현상이를 신혼여행 보내고 나서 우리는 그가 돌아올 날 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현상이가 죽었다는 전화를 받은 것이다. 우리는 강릉행 밤 기차에 몸을 실었다. 밤새 쇠주를 기울이며 새벽녘에 강릉에 도착하였다. 현상이는 바위에서 사진을 찍다가 뒤에서 덮친 파도에 현상이가 색시와 함께 바다에 빠졌다. 바닷속에서 몇 번 자맥질을 하던 현상이는 색시를 바위 위에 밀어 올려놓고 다시는 떠오르지 않았다.
현상이의 장례를 치루는날 우리는 털털거리는 운구차를 타고 미시령 고개를 넘어 마석으로 향하였다. 그날 미시령 고개에서 본 동해 바다는 쪽빛으로 선명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고, 가을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파랗게 펼쳐져 있었다. 나는 그 때 쓸프도록 파란 하늘이 있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 그리고 그때의 하늘과 바다, 설악산의 모습이 현상이의 운구 행렬과 더불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를 묻으며 몇 년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따듯한 감정을 불러 주었던 그의 이름도 함께 묻혔다. 유·현·상 이라고 씌어 있던 주민등록증이 그의 관 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부모님이 지어 준 최 웅이란 이름을 죽어서 다시 찾았다. 한 평생 노동자로 살아갔으면 찾지 못했을 이름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돌아오며 이런 말로 우리 스스로를 위안했다. “지금까지 힘들게 살아오다가 가장 행복한 때에 죽었기에 현상이는 서럽지 않을 거라고··· ” 그래서인지 항상 웃음을 머금고 살던 현상이는 죽은 후에도 우리에게 웃음을 안겨 주고 있다.
동지가 남긴 글
<편 지>
하루 온종일 돌아다니다가 네 생각이 나서 글을 쓰기로 했다.
어디에서 또 열심히 살고 있으려니 하던 기대는 또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 그 어느 누구도 아닌 너를 위해서 말이다.
삶이란 기나긴 여행을 하는 것이다. 험난한 산과 물줄기와 새와 꽃, 나무, 풀, 이런 것을 지나쳐 가는 것이리라.
험난한 산등성이를 오를때는 튼튼한 장비와 악다구니가 필요하듯이 인간에게 닥친 시련도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땀이 비오듯 흐르는 것을 식혀주는 시원한 산바람이 있듯이,
고뇌의 눈물을 이겨내는 것은 그 이후, 한 인간으로 성숙되어 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기쁨이라 여긴다.
자신 스스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하는 것, 그 넉넉함은 마음먹어야 바뀌는 것만은 아니더라!
자신과 더불어 사는 많은 사람들의 삶을 넉넉히 바라볼 수 있을 때까지 부단히 자신을 향상시키는 것. 생활을 아는 것.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소박한 생활의 기쁨을 간직하고 사는 이웃이 많다. 그네들의 삶도 어찌 시련이 없었으리!
허나 이겨가고 있으며 소박하게나마 자신의 삶의 지표를 갖고 있음이 좋아 보인다.
그 속에서 난, 너는 어떤 모습이었나!
참, 어설프고 작기만 하다.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인간으로서 갖는 고뇌의 흔적은 남아있으나 때론 체념으로, 때론 슬기롭게 자신을 지키고 있음을 본다.
날씨가 참으로 화창하다.
봄날, 훌훌 떨어버리고 떠나는 여행길. 편하고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시간이 난다면 분위기 좋은 곳에서 커피 한잔하고 싶다.
앞으로의 우리의 삶에 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쁨을 누리는 것도 행복이라 여겨진다.
건강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여유보다 좋은 치료법은 없다고 본다.
92. 5.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