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내창동지 26주기 추모제
○ 일 시: 2015년 8월 15일(토) 오전 11시
○ 장 소: 이천 민주공원
행사 정보
토요일
2015-08-15
이천 민주공원
지도에서 보기
인물 정보
이내창(당시 28세)
1962년 서울 출생
청구국민학교 졸업
대경중학교 졸업
중동고등학교 졸업
1983년 군입대
1985년 군 제대
1986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조소학과 입학
1987년 만화판화패「새김」창립, 회장 역임.
1988년 조소학과 과학생회장 역임.
학과내에「민족미술연구회」창설
「서울지역 미술대학 연합 건설준비위원회」주최
“청년미술대학 한마당” 개최
1989년 중앙대학교 총학생회장
1989년 8월 15일 거문도 소재 덕촌리 유림해수욕장에서 변사체로 발견(동지와 거문도까지 동행했던 사람이 안기부 인천분실 직원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짐.)
2009년 7월 6일 제276차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민주화운동 관련성 인정 받음
청구국민학교 졸업
대경중학교 졸업
중동고등학교 졸업
1983년 군입대
1985년 군 제대
1986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조소학과 입학
1987년 만화판화패「새김」창립, 회장 역임.
1988년 조소학과 과학생회장 역임.
학과내에「민족미술연구회」창설
「서울지역 미술대학 연합 건설준비위원회」주최
“청년미술대학 한마당” 개최
1989년 중앙대학교 총학생회장
1989년 8월 15일 거문도 소재 덕촌리 유림해수욕장에서 변사체로 발견(동지와 거문도까지 동행했던 사람이 안기부 인천분실 직원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짐.)
2009년 7월 6일 제276차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민주화운동 관련성 인정 받음
< 유인타살, 사건의 고의적 은폐>
이내창 동지는 86년 중앙대 예술대학 조소학과에 입학하여 교내의 뜻있는 몇몇 학우들과 만화판화패 ‘새김’이라는 동아리를 창립했다. 또한, 87년에 ‘새김’ 동아리 회장을 수행하여 만화, 판화를 통해 많은 학우들에게 구국운동에 동참할 것을 교양하였으며 특히 판화작품은 학우들의 나태하고 향락적인 생활을 풍자적으로 지적하거나 미제와 매국노들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시키는 뛰어난 것들이었다.
88년도에는 조소학과 학생회장으로서 학과숙원사업이었던 실기동 확보투쟁을 전개해서 대동단결된 힘으로 승리, 조소과 실기동을 신축케 만들었으며 동시에 학과 내에 “민족미술연구회” 동아리를 창설, 후배들에게 애국운동의 기상을 불어넣었다. 대외적으로는 88년 서울지역미술대학연합건설준비위원회(서미연 건준위)에 본교 대표로서 지칠 줄 모르는 애국의 열정을 불태웠으며 88년 여름 방학 중에서 “청년미술대학여름한마당” 행사를 안성캠퍼스에서 개최하였다.
동지는 자신의 예술활동에 대해 얼과 혼을 새겨넣듯 치열하고 철저한 자세를 가졌으며 그러한 예술이 “민중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고 그들의 자주성을 옹호하지 않는 한 무의미한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실천해왔다.
그러나 88년 11월에 89년도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에 당선된 이후에는 애국예술운동은 잠시 미루어두고 총학생회장직에 모든 열정을 바쳐 밤낮없이 투쟁해왔다. 총학생회장에 당선된 이후 임기가 시작되기전까지 차기 운영위원회를 10여차례 소집해 다음 학기를 준비하는 열정을 보였으며, 특히 금년 5월 학원 자주화투쟁에서 단식투쟁을 전개하고 혈서로 그 결의를 다져 학원의 주인된 권리에 소극적이던 많은 학우들에게 감동과 교훈을 주었다. 이내창 동지의 애국적 삶의 모습과 자세는 오히려 이러한 투쟁경력보다는 일상에서 철저히 관철해온 애국적인 자세에서 많은 학우들에게 잊혀질 수 없는 사람이었다. 중앙대학교 학우들은 동지가 낙담하거나 짜증을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더러 피곤하고 지친 동지들에게도 항시 따뜻하고 환한 미소와 세심한 배려를 베풀어 주었으며 무슨 문제를 토론할 때 자신의 주장을 독단적으로 목소리 높여 주장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자칫 지나치기 쉬운 점에서도 동지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원칙을 관철하였는데 대화중 영어나 외래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길가에 담배꽁초나 휴지를 지나치는 법이 없었으며, 커피나 외래음료를 입에 대지 않았으며 한번도 혼자 식사한 적이 없이 주머니에 돈이 생기면 주위의 학우들을 불러모아서 함께 식사하였다. 동지의 모든 언행과 행동은 모든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으며, 때문에 학교의 학우들뿐만 아니라 수위아저씨, 청소원 아주머니까지도 친형제처럼 여겼다고 한다.
그러던 동지가 2학기 사업점검으로 한창 바쁜 때인 8월 15일 생전 가보지도 않은 낙도 거문도 앞바다에서 외상에 의한 피하출혈 흔적이 7군데나 있는 시체로 발견되었다. 동지는 15일, 전민련 주최의 ‘민족해방절 기념식’에 참석할 예정이었고 16일에는 총장과 면담약속을 잡아놓고 있었는데 학우들과의 약속도 단 5분을 넘기지않고 확실히 지키던 동지가 갑자기 중요한 약속을 지키지 않고 바로 그전날 거문도행을 한 것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나중에 안기부 인천분실(세칭 인하공사) 소속 여직원이라고 벍혀진 도연주와 그 남자친구 백승회 등 2인과 동행하여 편도로도 밤새워야 갈수 있는 거리인 거문도까지 갔다가 변을 당했다는 일은 다른 의문사의 경우도 찾아보기 힘든 경우이다.
이내창 동지는 8월 14일 오전에 학교로 찾아온 도, 백 2인과 이날 오후 4시 45분경 안성을 출발해서 다음날 18시경 여수발 거문리행 훼리호에 승선한 일이 확인되기까지의 행적이 미궁에 빠져 있다.
그리고 12시 50분경에 거문리에 도착하고 13시-13시30분경 방파제에 앉은 동지가 목격되었으며 15시경 거문리 소재 ‘삼호다방’에서 도, 백씨와 함께 음료수를 마신 일이 다방 종업원 최씨에게 목격되고 그런 후 15시 30분경 거문리와 덕촌리를 왕래하는 나룻배에도, 백씨와 함께 타고 덕촌리로 건너왔음이 사공에 의해 목격되었고 그후 동지는 약 3시간후인 1시 30분경 상의가 완전히 벗겨져 물에 엎드린 상태로 발견되기에 이른다.
이후 19일 부검이 실시되고 부검결과를 놓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익사를, 경찰과 검찰측은 단순익사로 발표하고 사건을 종결지었고, 대책위와 학생, 교수들은 자살이나 실족은 절대 아니며 타살, 익사를 당했다고 주장, 수사과정의 전면공개와 검찰측의 은폐조작기도를 중지할 것을 촉구한다.
그후 사인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일체 묵묵부답으로 대응을 하다가 전대협장으로 이내창 동지의 장례식이 있던 10월 6일 <한겨레신문>에 “이내창동지 최후동행자 안기부직원” 제하위 기사가 실리고 국회에서도 야당위원들에 의해 국정조사권 발동을 요구하기에 이르자 치안본부는 전면재수사, 공개수사를 천명하여 사건이 진척되는 듯이 보였으나 경찰은 이를 어기고 수사를 재개하는 시늉만 하다가 어느 정도 사회적 관심이 수그러들자 <한겨레신문>을 도씨 명의로 고발하기에 이르러 이 사건은 법정에 서게 되었다.
이내창동지 사건은 이철규 동지까지의 “의문사”가 개연성이 많았던 것에 비해서 목적의식적으로 죽음의 장소에까지 유인, 타살하고(정황이나 목격자의 진술, 상처 등으로 보아 자살일 수는 없다) 그 살인행위를 국가권력이 의식적으로 은폐, 조작해준 뚜렷한 사건으로 앞으로의 권력에 의한 의문사의 발생 방향을 가늠해 볼 수 있다는 의미에서 특색이 있다고 하겠다.
즉, 이제는 수사과정이나 연행과정에서 전적으로 죽일 목적이 없이 고문 등을 가하는 과정에서 죽이게 되고 그를 사후에 은폐, 축소하는 것이 아닌 처음부터 살해의 목적을 갖고 대상을 고르고 계획을 세울 수 있으며, 사후대책까지도 마련한 속에서 왜곡, 축소시키는 유형의 정치적 목적의 의도적 타살이 발생할 수도 있고, 그 첫번째 경우가 이내창 동지의 의문사가 아닌가하는 점이다.
<의문점 - <한겨레신문> 89년 10월 8일자 신문>
이내창동지 죽음 꼬리무는 의혹 동행자들 알리바이 경찰은 지난 8월 15일 이동지가 숨진 채로 발견된 뒤 지금까지 직접 면담, 목격자 탐문, 출장수사, 우편조사 등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모두 7백여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상대로 수사활동을 벌여왔다. 이와 함께 중앙대 ‘공동대책위’도 4차례에 걸쳐 연인원 2백여명의 ‘조사단’을 현지에 보내 진상규명 활동을 계속해 왔다. 이과정에서 이동지의 마지막 행적과 관련된 주요한 인물로 떠오른 사람은 안기부 직원으로 밝혀진 도아무개(23.여)씨를 비롯해 도씨의 동행자 백아무개(22), 서아무개(22), 또다른 박아무개씨와 박아무개씨의 친구인 이아무개(20.여)씨 등 6명이다.
배 탄 시간 진술과 틀려 이 중에서도 특히 도씨와 백씨는 이동지가 숨지기 2시간 전인 8월 15일 오후 3시부터 약 40분간 이동지와 ‘같이 있었다’는 증언들이 나와 눈길을 끈다. 이같은 증언들과 함께 이들의 진술도 서로 어긋나거나 사실과 다를 것으로 추정되는 부분이 많아 의문을 뒷받침하고 있다.
도씨와 백씨는 15일 낮 12시 30분께 거문리에 도착한 뒤 곧바로 동도에 있는 친구 박아무개씨 집에 전화를 걸어 “마중 나오라”고 한 뒤 20분 뒤인 12시 50분께 전화를 받고 마중나온 박아무개씨와 서아무개씨를 거문리에서 만났다고 경찰에서 진술했다. 이와 함께 4명이 거문리에서 컵라면으로 점심을 먹고 인근 영국군 묘지로 놀러갔다가 오후 5시께 동도의 친구집으로 함께 건너갔다고 사건 당시의 알리바이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은 “도씨가 오후 3시께부터 20분 가량 이내창동지와 함께 있었다”는 거문리 삼호다방 여종업원 최희(24)씨의 증언과 거문리-서도간을 운행하는 덕성호 선장 이현우(42)씨의 “이내창동지와 도.백씨가 3시 30분께 함께 배를 타고 서도로 갔다”는 증언으로 결정적으로 깨져나간다. 또한 도.백씨의 진술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당시 백씨의 친구로 마중나간 박씨와 서씨가 거문리에 도착한 시각도 도씨 등의 진술과 달리 1시간 가량 늦은 오후 1시 50분께가 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거문리 일대를 운항하는 거문호는 당시 오후 1시에 거문리를 출발해 서도의 선착장 2곳과 서도 인근의 외딴섬 2-3군데를 돌아 오후 1시 35분께 동도에 도착해 10여분 뒤인 1시 50분께 거문리로 되돌아오는 일방코스만으로 운항했고 박.서씨는 동도에서 이 배를 타고 와야 했기 때문이다.
<동지가 남긴 글 >
-동지가 총학생회장에 출마했을 당시의 유세문 중에서-
80년 5월의 하늘을 붉은 피로 물들인 학살의 원흉이자 부정과 부패의 주범 전두환 구속 처단과 그의 쌍동이 형제 노태우의 단죄를 요구하는 4천만 민중들의 열화와 같은 함성이 들불처럼 퍼져가고 있는 지금, 광주학살의 진상을 명확히 밝혀내고, 동족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살인마를 처단하는 일은 이제 더 이상 미룰수 없는 조국이 이 시대 청년학도에게 부여한 가장 절박한 사명이라 생각합니다.
뜨거운 가슴으로 이땅의 완전한 민주주의 실현과 조국통일을 열망하는 8천학우 여러분!! 저는 요즘 온 국민의 폭발적인 관심속에서 열리고 있는 국회의 청문회를 지켜보면서 끓어오르는 분노와 슬픔을 억누를수 없었습니다. 그들과 한통속인 민정당과 보수야당의 미온한 대처속에서 “모른다”, “기억에 없다”등의 거짓말만을 늘어놓고 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광주학살의 진상규명은 더 이상 학살의 주범들이나 보수야당에 맡겨둘수는 없는 일이며, 학살과 폭정의 직접적인 피해자인 이 땅의 4천만 민중들의 손으로 낱낱이 밝혀져야 합니다. 여기에 이 땅의 청년학도는 조국사랑의 피끓는 사명감으로 똘똘 뭉쳐 싸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동지를 생각하며>
-추모시-
그대 부활하는 땅 아니야 오월 나무처럼 푸르기만 하던
그대의 청춘이 비릿한 소금내로 물들어
썩은 해초처럼 실려 다닐 수 없어 붉기만 하던 몸뚱아리가
칼바람에 떠는 사시나무일 순 없어 아니야 새벽이슬 맞으며 등교하시고
달이 기울 때 내혜홀을 떠나시는 의혈동산의 천근같은 짐을
멍울처럼 가슴에 이고도
잃지 않던 웃음 이렇게 식을 순 없어
북소리로 고동치는 그대의 맥박이
돌덩이로 굳다니 아니야 그대의 이름은 교정의 풀씨 하나에까지
메아리쳐 오고 하늘 높이 치켜든 그대의 굵은 주먹은
힘찬 함성으로
구름처럼 일어섰는데 그대 눈썹에 붙은 쇠파리는 아냐
거품을 물고 있는 자주빛 입술은 아냐 우린 안다. 피지도 못한 젊음들이 어떻게 죽어갔는지를 거리에서 교정에서 감옥에서
억누르는 자들에 대한
불화산같은 분노를 안고 짐승의 얼굴로 죽어갔다는 것을 또한 우린 안다. 눈알 뽑히고
온몸이 새까맣게 타죽어도
육신이 만갈래 찢겨 죽어도 그 한몸 청청히 세워
수천의 투쟁으로 되살아 오는 것을 동지여 지칠 때 지금부터 투쟁하자시던
강철로 달구어진 그대와 함꼐 산맥을 달려
가슴 잘린 강을 건너
찢기워진 한반도의 동맥을 이어 피의 용솟음으로 하나될 것이고 조국의 해방을 위한 반역의 불 바람으로 몰아칠 것이니 그대 부활하는 반도의 곳곳마다 애국의 함성으로 함께 하리니
이내창 동지는 86년 중앙대 예술대학 조소학과에 입학하여 교내의 뜻있는 몇몇 학우들과 만화판화패 ‘새김’이라는 동아리를 창립했다. 또한, 87년에 ‘새김’ 동아리 회장을 수행하여 만화, 판화를 통해 많은 학우들에게 구국운동에 동참할 것을 교양하였으며 특히 판화작품은 학우들의 나태하고 향락적인 생활을 풍자적으로 지적하거나 미제와 매국노들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시키는 뛰어난 것들이었다.
88년도에는 조소학과 학생회장으로서 학과숙원사업이었던 실기동 확보투쟁을 전개해서 대동단결된 힘으로 승리, 조소과 실기동을 신축케 만들었으며 동시에 학과 내에 “민족미술연구회” 동아리를 창설, 후배들에게 애국운동의 기상을 불어넣었다. 대외적으로는 88년 서울지역미술대학연합건설준비위원회(서미연 건준위)에 본교 대표로서 지칠 줄 모르는 애국의 열정을 불태웠으며 88년 여름 방학 중에서 “청년미술대학여름한마당” 행사를 안성캠퍼스에서 개최하였다.
동지는 자신의 예술활동에 대해 얼과 혼을 새겨넣듯 치열하고 철저한 자세를 가졌으며 그러한 예술이 “민중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고 그들의 자주성을 옹호하지 않는 한 무의미한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실천해왔다.
그러나 88년 11월에 89년도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에 당선된 이후에는 애국예술운동은 잠시 미루어두고 총학생회장직에 모든 열정을 바쳐 밤낮없이 투쟁해왔다. 총학생회장에 당선된 이후 임기가 시작되기전까지 차기 운영위원회를 10여차례 소집해 다음 학기를 준비하는 열정을 보였으며, 특히 금년 5월 학원 자주화투쟁에서 단식투쟁을 전개하고 혈서로 그 결의를 다져 학원의 주인된 권리에 소극적이던 많은 학우들에게 감동과 교훈을 주었다. 이내창 동지의 애국적 삶의 모습과 자세는 오히려 이러한 투쟁경력보다는 일상에서 철저히 관철해온 애국적인 자세에서 많은 학우들에게 잊혀질 수 없는 사람이었다. 중앙대학교 학우들은 동지가 낙담하거나 짜증을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더러 피곤하고 지친 동지들에게도 항시 따뜻하고 환한 미소와 세심한 배려를 베풀어 주었으며 무슨 문제를 토론할 때 자신의 주장을 독단적으로 목소리 높여 주장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자칫 지나치기 쉬운 점에서도 동지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원칙을 관철하였는데 대화중 영어나 외래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길가에 담배꽁초나 휴지를 지나치는 법이 없었으며, 커피나 외래음료를 입에 대지 않았으며 한번도 혼자 식사한 적이 없이 주머니에 돈이 생기면 주위의 학우들을 불러모아서 함께 식사하였다. 동지의 모든 언행과 행동은 모든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으며, 때문에 학교의 학우들뿐만 아니라 수위아저씨, 청소원 아주머니까지도 친형제처럼 여겼다고 한다.
그러던 동지가 2학기 사업점검으로 한창 바쁜 때인 8월 15일 생전 가보지도 않은 낙도 거문도 앞바다에서 외상에 의한 피하출혈 흔적이 7군데나 있는 시체로 발견되었다. 동지는 15일, 전민련 주최의 ‘민족해방절 기념식’에 참석할 예정이었고 16일에는 총장과 면담약속을 잡아놓고 있었는데 학우들과의 약속도 단 5분을 넘기지않고 확실히 지키던 동지가 갑자기 중요한 약속을 지키지 않고 바로 그전날 거문도행을 한 것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나중에 안기부 인천분실(세칭 인하공사) 소속 여직원이라고 벍혀진 도연주와 그 남자친구 백승회 등 2인과 동행하여 편도로도 밤새워야 갈수 있는 거리인 거문도까지 갔다가 변을 당했다는 일은 다른 의문사의 경우도 찾아보기 힘든 경우이다.
이내창 동지는 8월 14일 오전에 학교로 찾아온 도, 백 2인과 이날 오후 4시 45분경 안성을 출발해서 다음날 18시경 여수발 거문리행 훼리호에 승선한 일이 확인되기까지의 행적이 미궁에 빠져 있다.
그리고 12시 50분경에 거문리에 도착하고 13시-13시30분경 방파제에 앉은 동지가 목격되었으며 15시경 거문리 소재 ‘삼호다방’에서 도, 백씨와 함께 음료수를 마신 일이 다방 종업원 최씨에게 목격되고 그런 후 15시 30분경 거문리와 덕촌리를 왕래하는 나룻배에도, 백씨와 함께 타고 덕촌리로 건너왔음이 사공에 의해 목격되었고 그후 동지는 약 3시간후인 1시 30분경 상의가 완전히 벗겨져 물에 엎드린 상태로 발견되기에 이른다.
이후 19일 부검이 실시되고 부검결과를 놓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익사를, 경찰과 검찰측은 단순익사로 발표하고 사건을 종결지었고, 대책위와 학생, 교수들은 자살이나 실족은 절대 아니며 타살, 익사를 당했다고 주장, 수사과정의 전면공개와 검찰측의 은폐조작기도를 중지할 것을 촉구한다.
그후 사인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일체 묵묵부답으로 대응을 하다가 전대협장으로 이내창 동지의 장례식이 있던 10월 6일 <한겨레신문>에 “이내창동지 최후동행자 안기부직원” 제하위 기사가 실리고 국회에서도 야당위원들에 의해 국정조사권 발동을 요구하기에 이르자 치안본부는 전면재수사, 공개수사를 천명하여 사건이 진척되는 듯이 보였으나 경찰은 이를 어기고 수사를 재개하는 시늉만 하다가 어느 정도 사회적 관심이 수그러들자 <한겨레신문>을 도씨 명의로 고발하기에 이르러 이 사건은 법정에 서게 되었다.
이내창동지 사건은 이철규 동지까지의 “의문사”가 개연성이 많았던 것에 비해서 목적의식적으로 죽음의 장소에까지 유인, 타살하고(정황이나 목격자의 진술, 상처 등으로 보아 자살일 수는 없다) 그 살인행위를 국가권력이 의식적으로 은폐, 조작해준 뚜렷한 사건으로 앞으로의 권력에 의한 의문사의 발생 방향을 가늠해 볼 수 있다는 의미에서 특색이 있다고 하겠다.
즉, 이제는 수사과정이나 연행과정에서 전적으로 죽일 목적이 없이 고문 등을 가하는 과정에서 죽이게 되고 그를 사후에 은폐, 축소하는 것이 아닌 처음부터 살해의 목적을 갖고 대상을 고르고 계획을 세울 수 있으며, 사후대책까지도 마련한 속에서 왜곡, 축소시키는 유형의 정치적 목적의 의도적 타살이 발생할 수도 있고, 그 첫번째 경우가 이내창 동지의 의문사가 아닌가하는 점이다.
<의문점 - <한겨레신문> 89년 10월 8일자 신문>
이내창동지 죽음 꼬리무는 의혹 동행자들 알리바이 경찰은 지난 8월 15일 이동지가 숨진 채로 발견된 뒤 지금까지 직접 면담, 목격자 탐문, 출장수사, 우편조사 등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모두 7백여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상대로 수사활동을 벌여왔다. 이와 함께 중앙대 ‘공동대책위’도 4차례에 걸쳐 연인원 2백여명의 ‘조사단’을 현지에 보내 진상규명 활동을 계속해 왔다. 이과정에서 이동지의 마지막 행적과 관련된 주요한 인물로 떠오른 사람은 안기부 직원으로 밝혀진 도아무개(23.여)씨를 비롯해 도씨의 동행자 백아무개(22), 서아무개(22), 또다른 박아무개씨와 박아무개씨의 친구인 이아무개(20.여)씨 등 6명이다.
배 탄 시간 진술과 틀려 이 중에서도 특히 도씨와 백씨는 이동지가 숨지기 2시간 전인 8월 15일 오후 3시부터 약 40분간 이동지와 ‘같이 있었다’는 증언들이 나와 눈길을 끈다. 이같은 증언들과 함께 이들의 진술도 서로 어긋나거나 사실과 다를 것으로 추정되는 부분이 많아 의문을 뒷받침하고 있다.
도씨와 백씨는 15일 낮 12시 30분께 거문리에 도착한 뒤 곧바로 동도에 있는 친구 박아무개씨 집에 전화를 걸어 “마중 나오라”고 한 뒤 20분 뒤인 12시 50분께 전화를 받고 마중나온 박아무개씨와 서아무개씨를 거문리에서 만났다고 경찰에서 진술했다. 이와 함께 4명이 거문리에서 컵라면으로 점심을 먹고 인근 영국군 묘지로 놀러갔다가 오후 5시께 동도의 친구집으로 함께 건너갔다고 사건 당시의 알리바이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은 “도씨가 오후 3시께부터 20분 가량 이내창동지와 함께 있었다”는 거문리 삼호다방 여종업원 최희(24)씨의 증언과 거문리-서도간을 운행하는 덕성호 선장 이현우(42)씨의 “이내창동지와 도.백씨가 3시 30분께 함께 배를 타고 서도로 갔다”는 증언으로 결정적으로 깨져나간다. 또한 도.백씨의 진술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당시 백씨의 친구로 마중나간 박씨와 서씨가 거문리에 도착한 시각도 도씨 등의 진술과 달리 1시간 가량 늦은 오후 1시 50분께가 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거문리 일대를 운항하는 거문호는 당시 오후 1시에 거문리를 출발해 서도의 선착장 2곳과 서도 인근의 외딴섬 2-3군데를 돌아 오후 1시 35분께 동도에 도착해 10여분 뒤인 1시 50분께 거문리로 되돌아오는 일방코스만으로 운항했고 박.서씨는 동도에서 이 배를 타고 와야 했기 때문이다.
<동지가 남긴 글 >
-동지가 총학생회장에 출마했을 당시의 유세문 중에서-
80년 5월의 하늘을 붉은 피로 물들인 학살의 원흉이자 부정과 부패의 주범 전두환 구속 처단과 그의 쌍동이 형제 노태우의 단죄를 요구하는 4천만 민중들의 열화와 같은 함성이 들불처럼 퍼져가고 있는 지금, 광주학살의 진상을 명확히 밝혀내고, 동족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살인마를 처단하는 일은 이제 더 이상 미룰수 없는 조국이 이 시대 청년학도에게 부여한 가장 절박한 사명이라 생각합니다.
뜨거운 가슴으로 이땅의 완전한 민주주의 실현과 조국통일을 열망하는 8천학우 여러분!! 저는 요즘 온 국민의 폭발적인 관심속에서 열리고 있는 국회의 청문회를 지켜보면서 끓어오르는 분노와 슬픔을 억누를수 없었습니다. 그들과 한통속인 민정당과 보수야당의 미온한 대처속에서 “모른다”, “기억에 없다”등의 거짓말만을 늘어놓고 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광주학살의 진상규명은 더 이상 학살의 주범들이나 보수야당에 맡겨둘수는 없는 일이며, 학살과 폭정의 직접적인 피해자인 이 땅의 4천만 민중들의 손으로 낱낱이 밝혀져야 합니다. 여기에 이 땅의 청년학도는 조국사랑의 피끓는 사명감으로 똘똘 뭉쳐 싸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동지를 생각하며>
-추모시-
그대 부활하는 땅 아니야 오월 나무처럼 푸르기만 하던
그대의 청춘이 비릿한 소금내로 물들어
썩은 해초처럼 실려 다닐 수 없어 붉기만 하던 몸뚱아리가
칼바람에 떠는 사시나무일 순 없어 아니야 새벽이슬 맞으며 등교하시고
달이 기울 때 내혜홀을 떠나시는 의혈동산의 천근같은 짐을
멍울처럼 가슴에 이고도
잃지 않던 웃음 이렇게 식을 순 없어
북소리로 고동치는 그대의 맥박이
돌덩이로 굳다니 아니야 그대의 이름은 교정의 풀씨 하나에까지
메아리쳐 오고 하늘 높이 치켜든 그대의 굵은 주먹은
힘찬 함성으로
구름처럼 일어섰는데 그대 눈썹에 붙은 쇠파리는 아냐
거품을 물고 있는 자주빛 입술은 아냐 우린 안다. 피지도 못한 젊음들이 어떻게 죽어갔는지를 거리에서 교정에서 감옥에서
억누르는 자들에 대한
불화산같은 분노를 안고 짐승의 얼굴로 죽어갔다는 것을 또한 우린 안다. 눈알 뽑히고
온몸이 새까맣게 타죽어도
육신이 만갈래 찢겨 죽어도 그 한몸 청청히 세워
수천의 투쟁으로 되살아 오는 것을 동지여 지칠 때 지금부터 투쟁하자시던
강철로 달구어진 그대와 함꼐 산맥을 달려
가슴 잘린 강을 건너
찢기워진 한반도의 동맥을 이어 피의 용솟음으로 하나될 것이고 조국의 해방을 위한 반역의 불 바람으로 몰아칠 것이니 그대 부활하는 반도의 곳곳마다 애국의 함성으로 함께 하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