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 정보
수요일
2014-02-19
안동 안기동 천주교 묘역
지도에서 보기
인물 정보
배주영(당시 28세)
1963년 경북 달성군에서 출생
1985년 경북대 국어교육과 졸업, 봉화여고 부임
1987년 11월 안동교협 창립, 부회장에 피선, 부회장으로 활동중 청송지역 산골마다 찾아다니며 조직작업
1988년 12월 청송 영양교협 창립, 총무부장 역임
1989년 8월 18일 해임 후 진보에서 자취하며 전교조 활동을 계속함
1990년 2월 19일 연탄가스 중독으로 운명
1991년 2월 23일 유고집 ‘그 숨결 남아 아직 청송길은 푸르른데’ 출간
1985년 경북대 국어교육과 졸업, 봉화여고 부임
1987년 11월 안동교협 창립, 부회장에 피선, 부회장으로 활동중 청송지역 산골마다 찾아다니며 조직작업
1988년 12월 청송 영양교협 창립, 총무부장 역임
1989년 8월 18일 해임 후 진보에서 자취하며 전교조 활동을 계속함
1990년 2월 19일 연탄가스 중독으로 운명
1991년 2월 23일 유고집 ‘그 숨결 남아 아직 청송길은 푸르른데’ 출간
85년 경북의 봉화여고에서 교직의 첫발을 내딛은 배주영 동지는 모순투성이인 우리 교육현실을 조금이라도 극복하기 위해 헌신과 희생을 통해 아이들과 교사들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비록 현실이 동지의 이러한 노력마다에 벽을 만들곤 했지만 동지는 끝없는 자기성찰과 각성을 통해 참교사로 서기 위한 노력을 거듭했다. 동지는 87년 교사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교사로서의 활동범위를 개인에서 학교전체의 문제로, 그리고 드디어는 지역사회 전체와 나아가서 그보다 더 큰 대권력과의 관계로 파악하게 되고 그것을 위해 안동까지 뛰어다니게 된다. 동지는 학교 소모임 건설과 청송교사협의회 창립을 위해 뛰어다녔고 88년 12월 청송교사협의회가 창립되자 교협의 살림을 맡아보면서 활동하다 해직되었다. 그러나 동지는 해직의 괴로움을 간직한 채 굳건하게 활동해 나갔다. 가르치던 제자들도 매일매일 찾아왔다. 하지만 동지에게도 힘든 순간이 있었다. 한번은 찾아온 제자들이 떡볶이집으로 끌고 갔을 때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다시 한번만 교단에 설 수 있다면 좋겠구나”고 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순간도 잠깐, 밤이면 동지는 참교육 물품을 배낭에 가득 담고 이 산골 저 산골을 누비면서 선생님들을 찾아다녔다. 그 가방 속에는 참교육의 복음이 가득 들어 있었다. 끊임없이 탈퇴한 동료교사를 부여안고 구석구석 전교조의 씨앗을 뿌려나갔다. 90년 2월 19일 열여섯명의 교사가 해직된 청송여중고의 졸업식에 해직된 교사들과 같이 참석하기로 한 동지는 끝내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동지는 평소 즐겨불렀던 “장막을 걷어라, 너의 좁은 눈으로”의 노래가사처럼 이 땅의 장막을 걷고 참교육의 씨앗을 뿌리다 끝내는 그 자신마저 참교육의 불씨로 내던져졌다. 동지의 죽음은 최초의 전교조장으로 치러졌다. 동지를 생각하며 사랑으로 살다가 사랑으로 마친 누이야 막내야, 이제까지 간추려온 감정을 더 이상 억제할 길이 없구나. 누이야! 사랑으로 살다가 사랑으로 마친 누이야. 언제나 환한 웃음으로 집안의 시름을 덜어주던 우리들의 누이야. 자라면서 자랑이고, 죽어서도 자랑으로 남은 사랑하는 우리들의 누이야. 여리고 여린 몸으로 철벽 같은 장벽에 온몸으로 저항하며, 분노하고, 투쟁하고, 넉넉한 사랑을 공부하던 우리들의 듬직한 동지여! 살아 있는 부끄럼을 한 겹씩 한 겹씩 벗어던지고 너를 향한 그리움 땜에 밤잠을 뒤척이게 하는 나의 누이야! 지금은 흙이 되어 묻혀 있어도 역사의 진보를 믿던 아이야! 언젠가 반드시 올 해방의 날, 가슴속에 담아 담아 참 스승의 산실이 될 전교조, 전교조 깃발 속에 하나의 올곧은 날실로 살아오는 우리들의 누이야. 먼훗날 우리의 후손들이 선남선녀 짝을 지어 동산을 찾을 때, 어여쁘고 당당한 산새 되어 참 스승이고자 했던 모든 선생님들의 피와 땀인 민주화의 선봉 전·교·조, 전교조의 전설을 이야기 해주려므나. 1990년 1월 5일 막내를 품고 살아가려는 둘째 오빠가 동지가 남긴 글 <일기> 2월 3일 감정이 예민해지고 여려지는 요즘이다. 무슨 일에든 조그마한 자극만 받아도 눈물을 흘린다. 서럽고, 애틋하고, 그립고, 막막하고……. 내가 서있는 자리는 어디이며, 하고 있는 일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나이 스물여덟, 교직 경력 겨우 4년 6개월 만에 해임이라. 도대체 나는 얼마나 ‘올바른 교육’을 해왔던가. 교육, 교직, 노동자, 학생들. 지난 시간들을 스스로 실패라고 생각하는 지금 나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가? 사람 사는 일이 칼로 무 베듯 딱딱 나누어지거나, 흐르는 물모양 굽이굽이 줄줄 이어 내려가진 않는데, 무엇을 경계하고, 어떻게 연대해 나가야 하나? 한 인간―물론 스물 몇 해를 이 땅의 사회구조 속에서 살아 이 땅의 일반적 가치를 터득한―의 자존마저도 어떻게 세워야 할지 모르는 지금. 그래, 공부하고 열심히 뛰어다니고, 그때그때 조금씩 정리해 나가는 수밖에 없겠지. 선생님, 그래 교단에 서고 싶다. 너희들도 보고 싶다. 같이 떠들고, 웃고…… 지금은 가장 올바른 인간의 모습을 다듬는 시간이다. 사랑을 배우고 깨우치는 시간이다. 선생으로서의 모든 자질을 갖추는 단련의 시간이다!!! <친구에게 보낸 글 > 경숙아. 참으로 어설프게 살아온 4년 4개월, 성실하고 인정 넘치는 선생이 못되었는데도 나는 문제교사가 되고 말았구나. 차라리 불성실이나 자질을 못 갖춘 이유로 쫓겨난다면 덜 속이 상할 것 같다. 쫓겨나야 한다는 상황을 맞이하고서야 못다 가르치고, 못다 베푼 것들에 대해 안타깝고 속상하다니 나는 늘 왜 이렇게 뒷북만 쳐대는지 모르겠다. 잘은 모르겠지만, 뉴스에 나오는 대로라면 방학 전에 일이 생길 테지. 약간의 갈등과 고민이 있긴 하지만, 먼 앞날을 생각하고 희망을 가지면서 기꺼이 징계를 받아야겠다는 생각(각오)을 한다. 그 동안 소식 못 전해 미안하다. 가정을 꾸려나가는 네 노고도 생각지 못하고 내 생각과 내 일에만 정신을 쏟고 있다. 그저 편하게 ‘잘살고 있으려니’하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말이다. 글 쓰는 게 왜 이리 힘이 드는지 벼르고 별러 겨우 한 통의 편질 쓰는 형편이다. 7월 5일 박선생과 결정적으로 말을 시작한 지, 만 일 년 되는 날이다. 주위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집안의 반대에 부닥치며 일 년이 지나는구나. 이래저래 상황은 더 험악해진다. 시국도 그렇고, 개인적인 일도 그렇고, 쫓겨나면 니네집 신세 좀 질 수 있겠니? 지금 최대 걱정이 ‘아이고, 어디서 사노?’다. 집에 들어가 아버지 역정을 들을 생각하면 앞이 캄캄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견뎌내야지 뭐. 여태 내가 살아온 시간들은 그런 대로 순탄한 편이었으니 내 의지로 살아가는 데 이깟 고생쯤이야 뭐, 그쟈! 다음주쯤 집으로 전화 한번 할게. 몸 성히 잘 지내라. 추모글 <추모시> - 눈을 뜨고 보아라 다시는 볼 수 없구나 말할 때면 말갛게 물들던 그 아름다운 얼굴을 배낭 하나 짊어지고 명동성당으로 경북대학교 교정으로 굶주림과 최루탄 눈물 속에서도, 밥줄 잡아 비트는 처참한 고통 속에서도 참교육 그날 위해 투쟁하던 그 힘찬 모습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구나 · · · · · · · · · · · 아, 그날은 꼭 오련만 ‘전교조 합법성 쟁취’라는 다하지 못한 꿈을 안고 그대는 구천 어디를 헤매이는가 발 닿지 않는 지상에 한으로 맺혀, 눈 감지 못하고 떠난 그대 차라리 눈을 감지 말아라 눈을 뜨고 보아라 시퍼렇게 살아 우리들을 보아라 이 민족 나아갈 길 한 발 두 발 어떻게 다지며 가는가를 이제 그대 가시는 곳 안락한 천주의 품이라 그대는 부디 기쁨으로 가라 서러움은 이 땅에 남은 우리들의 것 우리들의 무기이니, 그대 몫까지 불태워 남김 없이 불태워 참세상 그날을 기필코 이루리라 다시는 볼 수 없구나 그대 빛나는 웃음을 그러나 우리는 보리라 전교조 깃발 속에 영원히 웃고 있을 그대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