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 정보
인물 정보
김상옥(당시 33세)
1980년 서강대 문과대 입학
1983년 서강대 민주화 시위 주도로 구속
1985년 서울노동운동연합의 대중모임 ‘대나무’에서 활동
1986년 구로 동일기업 노조설립 투쟁으로 구속
1988년 한국민주노동자연합 편집위원
1990년 민족민주운동연구소 노동분과 국제분과 연구원
1991년 서강대 민주동문회 사무국장
1992년 - 93년 한국민주노동자연합 홍보부장
1994년 2월 19일 위암으로 운명
어렸을 적부터 조용한 성격이었던 김상옥 동지는 비록 말수는 적었지만 바른 말을 잘하고 항상 겸손했었고, 가난하고 약한 자의 편에 서기를 좋아했다. 또한 빼놓지 않고 개근상을 받는 근면한 모습을 보였고, 늘 정도(正道)를 걷고자 한 사람이었다. 그런 동지가 운동을 접하게 된 것은 80년 서강대 문과대학에 입학하고부터였다. 10.26사태와 12.12 군사쿠데타, 5.18 광주민중항쟁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소용돌이속에서 1학년을 맞이한 김상옥 동지는 점차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고 동문선배의 권유로 향린교회 대학부 모임에 참가하면서 사회모순과 지식인의 역할 등이 담겨있는 책들을 접하게 되고 2학년때 써클 “江”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인 운동권에 참여하게 된다. 학생운동은 83년부터 대 정부투쟁을 본격화하고 졸업정원제, 강제징집 등의 문제와 광주학살의 책임을 물으며 정권퇴진운동을 벌이기 시작한다.
서강대도 마찬가지였는데 당시 김상옥 동지는 이론가 또는 조직가형이라기 보다는 묵묵히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실천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학내 시위에 가담해오면서 ‘요주의 운동권’으로 찍힌 상태였다. 4학년에 들어설 무렵 군에 입대하라는 영장을 받은 동지는 그에 굴복하지 않고, 군입대를 하루 앞둔 3월24일 인문사회관 3층 난관에 올라서서 “학우여”를 연발하며 시위를 주도했다.
이것으로 김상옥 동지는 구속되었고, 서울구치소와 영등포 교도소, 충남 홍성 교도소를 옮겨다니며 책도 보고, 단식농성도 하면서 시야를 넓혀나가기 시작했다. 김상옥 동지가 출소한 83년 12월은 전두환 정권의 유화 제스쳐인 학원자율화정책으로 인해 ‘유화국면’이 조성되던 시기였다. 학생운동은 학원자울화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대중적인 운동을 시작하고, 석방된 사람들은 복학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공동대응을 모색하던 때였다.
그러나 김상옥 동지는 복학조치가 정권의 기만술책이라고 보고 복학을 거부한 채 노동운동을 모색하게 된다. 당시 분위기가 그랬듯이 동지도 우리사회의 모순에 가장 짓눌려 있고 사회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노동자계급 속에서 사회운동을 시작하고자 한 것이다. 동지는 오랜 준비 없이 곧 실천에 옮겼다. 첫 발을 들여놓은 곳은 농약을 포장하는 회사였다. 지독한 농약냄새를 마셔가며 처음으로 힘든 노동을 하게 되지만 동지는 즐겁게 생활했고, 이후 혼자 구로와 시흥의 소규모 공장을 돌면서 노동자 생활을 계속하게 된다.
84년부터 노동운동은 개별기업단위를 넘어 연대투쟁을 하기 시작했고, 초보적이기는 하나 정치투쟁으로 발전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85년 ‘서울노동운동연합’이 등장했다. 이 무렵 동지는 우연히 ‘대나무’라는 조직에 가담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혼자 묵묵히 노동현장에서 일해왔던 동지로서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대나무’는 구로공단내 선진적인 남성 노동자들을 양성하는 조직이었는데 서노련 지도하에서 구로지역의 가두시위와 현장지원 투쟁을 주도하기도 했다. 85년 말부터 한국사회의 기본모순과 운동노선에 대한 첨예한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86년 5월에는 수도권의 거의 모든 운동단체가 모여 인천에서 가두시위를 벌였다. 동지는 시위의 선봉에서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노동자의 깃발을 들고 서있었다. 하지만 동지는 운동권 내부의 과열된 논쟁에는 휩쓸리지 않았다. 지나치게 배타적이고 소모적으로 진행되는 것같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김상옥 동지는 5.3시위가 있기 전 4월에 구로에 있는 동일 기업에 입사하였다. 6월에 노조결성을 준비하게 되었지만 회사측의 방해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 현장에 있던 5명의 학생출신이 노출되어 나머지 4명은 피신하게 되었는데 동지는 구속을 각오하고,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노조설립을 위해 싸웠다. 결국 동지는 공문서 위조 혐의로 구속되었고 ‘노동운동이 객관적인 역량의 단계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목표를 정하지 않았는가? 선도적인 투쟁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대중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없다면 오래 가지는 못할 것이다’라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두번째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87년 6월항쟁이 펼쳐지고 있는 가운데 10개월의 형을 마치고 출소한 동지는 쉴틈없이 거리로 나가 시위 물결에 합류했다. 그리고 대통령선거가 끝나자 곧 양평동에 위치한 플라스틱 공단 내 종이박스를 만드는 한 회사에 입사했다. 단기간의 노동운동에서 승부를 내기 보다 멀리보자는 생각에서 다시 평범한 노동자 생활로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88년 6월경 공장이 파산직전에 이르러 공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동지는 한국민주노동자연합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동지는 기관지 [민주노동]을 발간하는 일을 도우면서 영등포·구로지역의 노동자들로 구성된 서울남부지역금속노동조합에 참가하는 한편 11월에는 문래동에 위치한 소규모 철공장에 취업했다. 90년 1월 새해 벽두, 동지에게는 뜻하지 않은 시련이 닥쳤다. 공장에서 무거운 철을 들다가 허리를 다쳐 디스크 수술을 받게 된 것이다. 동지는 당분간 공장에 다닐 수 없어 무척 아쉬워했다. 그러나 동지는 시간이 있을 때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연구소’에 나가 제3세계 노동운동을 비롯한 국제문제를 연구했다. 그곳에서 글을 쓰기도 하고 [제주4.3항쟁]과 [버마 현대사]를 펴내는 데도 도움을 주는 등 바쁜 나날을 보냈다. 두 번째 수술을 받고 통증은 없어졌지만 현장일을 하기에는 무리였다. 90년 가을에는 민족민주운동연구소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노동분과를 이끌었던 동지는 노동문제 이외에도 정치상황이나 재야운동의 대응에 관해 많은 대화를 나누고, 다양한 의견을 접할 수 있었다. 동지의 핵심을 찌르는 명쾌한 사고는 연구원들에게 큰 공감을 얻었고, 또 투박하지만 의리있는 행동을 보여 동지와 가까이 하려는 사람이 많았다. 91년부터 한노련에서 다시 일하게 된 동지는 홍보 책임을 맡아 의정부 집과 영등포 사무실을 오고가며 밤늦게까지 일했다.
동지는 소모임에서 산재보상등 노동조합 운영에 필요한 문제들을 연구했고, 노동조합의 역사강의도 맡았다. 또 91년부터 2년동안 서강대 민주동문회 사무국장의 직책도 맡았다. 몇가지 일을 동시에 하느라 생활이 바쁘기도 하고, 불안정하게도 보였지만 동지는 어느 한가지도 대충 넘어가질 못했고 가볍게 보질 않았다. 접하는 일마다 동지는 새로운 시작으로 여겼다. 92년 대통령선거 이후 허탈한 심정과 재야운동을 떠나는 사람도 하나 둘씩 늘어나는 속에서도 동지의 신념은 꺾이지 않고, 앞으로의 할 일로 머리가 가득찼다. 그때 한 여성을 만나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기로 되었다.
그러나 동지에게는 ‘위암’이라는 선고를 받고, 대수술을 받게 되는 불운이 닥쳤다. 동지는 하루라도 빨리 병석에서 일어나 머리속에 채워둔 일을 하고자 했다. 하지만 결국 동지는 봄이 피기 전에 조용히 눈을 감고 말았다. 김상옥 동지의 삶은 비록 짧았지만 독재권력에 항거한 지식인으로, 몸소 실천한 노동자로, 양심과 신념을 지켜온 사람으로, 시대와 민중과 함께 살다 간 큰 삶이었다. 동지의 삶과 운동은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아픔, 각성, 용기,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동지를 생각하며 노동자의 영원한 벗이여!
경수 김상옥 열사! 열사께서는 1980년대초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항거한 학생운동가로, 그 후 10여년 동안은 노동현장에서, 노동단체에서 노동운동가로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아온 투사였습니다. 열사는 노동조합을 결성하려다가 구속되고 해고되기도 하였고, 87년 6월 민주항쟁 현장에서, 그리고 많은 투쟁현장에서 앞장서서 노동해방과 이 나라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 곁에 있어야 할 열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다니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열사는 일상 생활에서도 항상 부지런하고 궂은 일을 마다않고 도맡아 하였습니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항상 다른 사람에게 도움만 주던 열사였습니다. 열사는 노동현장에서 힘든 일을 하다가 산업재해로 허리를 다치는 등 이나라 노동자가 겪는 고통을 직접 체험했던 실천적인 운동가였습니다. 허리를 다쳐 불가피하게 노동현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열사는 이에 굴하지 않고 한국민주노동자연합에서 노동조합 운동을 지원하는 활동을 계속해 왔습니다. 한국민주노동자연합에서 노동운동의 길잡이인 [민주노동]을 편집하고, 홍보부장으로 활동하면서도 허리만 좀 나으면 노동현장으로 다시 돌아가 노동대중과 함께 생활하면서 노동해방을 이루겠다던 김상옥 열사!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다니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열사가 못이룬 그 꿈을 남아있는 우리 노동형제들이 기필코 이룰 것입니다. 열사여!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영결해야 할 이 시간,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분투하던 당신의 주검앞에 서 있는 우리는 이제 당신을 보내야 할 시간 앞에서 몸을 가눌 수 없는 슬픔에 젖어 있습니다. 열사를 사랑하던 부모형제, 동료, 선후배와 함께 이 슬픔을 나누고 열사의 뜻을 간직할 것입니다. 당신께서 신명을 바쳐온 길을 우리가 뒤를 잇겠습니다.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이 땅의 진정한 민주주의와 조국통일을 위해 같이 일해온 남은 이들이 손에 손을 맞잡고 당신이 못이룬 꿈을 꼭! 이루겠습니다. 열사여! 부디 편안히 잠드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