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에 걸친 비극 : 인혁당 사건의 현장들
반세기에 걸친 비극 : 인혁당 사건의 현장들
글 한종수
“4월은 잔인한 달”이란 시구가 우리나라에서 유독 회자되는 이유는 ‘죽을 사’자가 연상되기도 하지만 한국 현대사에서 4월에 ‘잔인한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바로 제주도에서 4.3항쟁이 터지면서 엄청난 피를 흘렸고, 1960년에는 4.19혁명, 1980년에는 사북항쟁, 1995년에는 대구지하철 붕괴, 그리고 2년 전 대부분이 10대 학생인 304명의 희생자를 낳은 세월호 참사까지... 엄혹했던 1970년대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1970년대의 중간인 1975년 4월 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8명이 무더기로 ‘사법학살’을 당하고 말았다. 유신 정권 옹호에 앞장섰던 모 보수 신문의 논설위원은 “박정희는 천상에서 인혁당 8인에게 사죄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막걸리를 마시며 조국을 얘기하고 있을 것”이라는 황당한 내용의 글을 썼는데, 어쨌든 그조차도 인혁당 희생자들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은 인정한 셈이다. 이 비극은 일반인들에게도 꽤 알려졌지만 그에 비해 사건 자체의 내용과 희생자 8명이 누구인지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인혁당 사건 공판에서 피고자 도예종 등 13명 모습 (1964.11.24, @경향신문사)
이들 8명은 세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해방 직후 혹은 4.19때부터 민주주의와 통일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했던 혁신계 인사들이라는 사실이요, 둘째는 체포 당시 활동지역은 달랐지만 모두 대구에 연고를 둔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윤보선 전 대통령을 포함하여 무려 1024명이 연루된 '인혁당 재건위 및 민청학련' 사건을 전체적으로 보면, 희생자 8명은 무명의 인사들이었다는 점이다. 1971년 대선에서 지역감정을 일으켜 겨우 김대중에게 신승을 거둔 박정희 입장에서는 자신의 안방인 대구에서 활동하는 혁신계 인사들이 눈에 가시였고, 지명도가 낮았기에 ‘본보기’로 죽이기 좋았던 셈이다. 사실 박정희가 저지른 첫 번째 사법살인의 제물은 1961년에 희생된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이었는데, 그 역시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대구파’였다. 4월 9일이라는 날짜 역시 의미심장한데, 21일 후 사이공이 함락되었기 때문이다. 즉 극도의 공안분위기를 만들기 적합한 시점이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253명이 구속되었고,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내란선동 등의 죄명으로 ‘비상보통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결국 이철, 김지하 등 민청학련 관계자들은 대부분 감형 또는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었지만, 대법원은 1975년 4월 8일, ‘인혁당 재건위 8명’에 대한 사형을 확정했다. 그리고 18시간 만에 기습적으로 사형을 집행하고 말았다. 훗날 선고통지서가 대법원 확정 판결이 있기도 전에 군 검찰에 접수되었고, 서울구치소에서도 선고통지서가 도착하기도 전에 사형을 자행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박정희에게도 보고되었음은 물론이다. 국제엠네스티는 다음날인 4월 10일에 이들에 대한 사형 집행에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국제법학자회도 이들에 대한 사형 집행이 ‘사법 살인’이라며, 사형이 집행된 1975년 4월 9일을 ‘사법 암흑의 날’로 선포할 정도의 폭거였던 것이다.
유신정권은 8명의 목숨을 뺏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고문의 증거가 뚜렷하게 남아있는 시신들을 그대로 유족들에게 넘겨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여정남의 시신은 열손가락에 손톱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장례식은 당시 30대 초반의 청년이었던 함세웅 신부가 주임이었던 응암동 성당에서 열릴 예정이었는데, 경찰은 수백 명의 병력을 동원해서 녹번동 삼거리에서 영구차를 막고는 크레인까지 동원해 관을 끌어다가 벽제 화장장에서 태워버리고 남은 유골만 유족들에게 전달했다. 이를 보고 충격을 받은 동생 이규정은 승려가 되었다가 결국 2005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8명의 열사 중 네 분은 대구와 인접한 칠곡군의 현대묘역에 묻히고 (하재완 열사의 유골은 2014년 11월 이천 민주화 공원으로 이장되었다) 나머지 네 분은 고향의 선산에 묻히게 되었는데, 유족은 민주열사를 줄여 “민사 여기 살아있다” 라는 비문을 세웠다. 기관원들이 무슨 뜻이냐고 묻자, 유족들은 “민간인이 죽었으니 민사”라고 한 것이라고 대답했는데, 결국 원래의 뜻을 알게 되어 철거당하고 말았다. 지금 보이는 ‘통일열사’ 묘비는 95년에 새로 세운 것이다. 묘하게도 시신을 탈취당했던 장소인 녹번 삼거리의 정식명칭이 ‘통일로’이고, 녹번동에 희생자 중 한 분인 이수병 열사가 운영하던 지물포가 있었다. 문제는 희생자가 이들 8명에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일단 ‘피 맛’을 본 정보부는 이후에도 거칠 것 없이 사건들을 조작해 냈던 것이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그야말로 끈질기게 피눈물로 싸웠던 유족들은 결국 승리를 거두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