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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려 나가는 문인들의 집

민주화운동과 관련 ‘미래유산’을 찾아

헐려 나가는 문인들의 집

글. 사진 권기봉(작가, 여행가) warmwalk@gmail.com

서울 부암동을 걷다 보면 한 커다란 바위에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이 쓴 것으로 전해지는 “무계동”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그림 뿐만 아니라 가야금에도 능했다는 안평대군은 특히 글씨에 뛰어나 당대 내로라하는 명필로 꼽혔다.

그런데 이곳에 안평대군의 이야기만 깃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운수좋은 날>로 유명한 소설가 현진건의 집터가 “무계동” 옆에 위치해 있다.

현진건은 지난 1936년 ‘일장기 말소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른 적이 있는 인물로, 출소 이후에는 신라의 아름다움을 부각한 역사소설 <무영탑>을 동아일보에 연재해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 그 소설을 구상하고 집필했던 곳이 바로 이곳에 있던 부암동 고택이다.

다만 현진건 고택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지난 2003년 공용주차장을 만든다며 헐어버렸기 때문이다. 소설가가 작품활동을 했다는 역사는 심각하게 고려되지 않았다. 더욱이 집터마저도 지난해 말 법원경매 매물로 나오는 설움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런데 웃지 못할 일은 아직까지 주차장도 그 어떤 건물도 들어서지 못했다는 점이다. 주차장을 만든다며 유명 소설가가 집필 활동에 몰두하던 집을 허물어뜨렸으면서 여태 공터로 놀리고 있는 모습이 영 마뜩찮아 보인다. 앞으로 이 터가 어떻게 이용될 지도 오리무중이다.

그러고 보면 예술가의 집이 무참하게 헐려 나가거나 경매로 나온 게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육당 최남선이 말년을 보낸 서울 우이동의 고택 ‘소원(素園)’도 현진건 고택이 헐리던 해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버지의 친일 행적이 자꾸 회자되는 것이 못마땅한 후손들이 건설사에 땅을 팔아버린 결과다. 지금 그 자리에는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최남선의 향수는 전혀 느낄 수 없는 주상복합 빌라만이 덩그러니 들어서 있을 뿐이다.

현존 최고(最古) 시민아파트

문인 고택의 사정들이 그러한데 서민들의 삶의 공간이 맞딱뜨리고 있는 현실이라고 별다를 리 없다.

이 땅에 아파트가 처음 들어선 것은 일제강점기였고, 한국인의 손으로 아파트를 세운 건 지난 1958년 중앙산업과 주택영단이 건설한 4~5층짜리 ‘종암아파트’ 3개 동이 최초였다. 아파트는 한국전쟁 뒤 빠른 속도로 증가하던 서울 인구를 받아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안이었다. 1960~70년대 이후 부동산 투기나 부실공사와 같은 심각한 문제들이 대두되기는 했지만 일단은 사람들이 몸을 누일 공간이 절실하던 시대에 아파트는 한국 주거 문화에 일대 혁명적 변화를 몰고 왔다.

하지만 ‘한국인이 만든 최초의 아파트’인 종암아파트나 마포아파트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사람이 살기에 너무 낙후됐다며 모두 철거된 지 오래다. 그렇기에 1970년 완공된 ‘회현 제2시범아파트’의 의미는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다. 남산 자락에 서있는 회현 제2시범아파트는 서울을 넘어 한국에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시민아파트다.

한곳에서 보일러를 때는 중앙집중 난방과 집집마다 수세식 화장실을 설치한 회현제2시범아파트는 이전의 아파트들에 비해서도 획기적인 아파트였다. 그 전까지는 아파트에서도 연탄을 땠고 층마다 공동화장실을 뒀던 것과는 사뭇 차이가 있다. 또 10층까지 오르내리는 것을 돕기 위해 6층 정도 높이에 외부로 통하는 구름다리를 놓기도 했다. 가파른 남산 중턱에 자리했다는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킨 대목이다.

그랬기 때문일까? 이 아파트에는 비교적 경제형편이 나은 사람들이 많이 살았는데 그 중에는 은방울자매나 윤수일, 문호장 씨 등과 같은 연예인들도 있었다. 도심에서 가까운 데다 당시 남산에 있던 KBS(현 서울애니메이션센터)에 오가기 편했기 때문인데, 와우아파트 붕괴사고 직후 지어진 탓에 그 전까지의 다른 아파트들에 비해 튼튼하고 고급스럽게 지어진 것도 매력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이 아파트도 지난 2014년 안전검사에서 위험시설 D등급으로 판정돼 재건축을 앞두고 있는 게 사실이다. 아직까지 적절한 보상이나 이주대책이 세워지지 않아 일부 주민들이 떠나지 않고 거주하고는 있지만, 이제 얼마 지나지 않으면 이 아파트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 운명이다.

공간건축마저 무너지고...

여기서 더욱 놀라운 아이러니는 이처럼 옛 건물을 헐고 새 건물을 짓는 데 꼭 필요한 작업 가운데 하나인 설계, 그 설계를 담당하는 기업의 사옥 역시 앞날을 예상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개발시대 이래 다양한 건물 설계를 잇따라 따내며 승승장구해온 ‘공간건축’ 이야기다.

지난 1960년 고 김수근 씨가 설립한 공간건축은 반세기가 넘도록 서울 잠실의 88서울올림픽주경기장을 비롯해 남산의 타워호텔과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 서울 법원종합청사 등 한국 건축사에 있어 큼직한 건축물들을 여럿 설계해 왔다. 김원이나 승효상 등 현재 60대 이상 주요 건축가들의 절반 가량을 배출해내기도 했으며, 지난 2011년에는 매출액 296억 원을 기록해 업계 6위권에 오를 정도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잘 나가던 건축사사무소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니 공간건축 사옥이 일개 건축사사무소의 사옥을 넘어 한국 건축 문화에서 중요성을 띠는 이유는 한국 건축계의 풍운아였던 김수근 스스로 ‘선물’이라 표현했듯 그가 고민해온 ‘한국적 건축’의 집대성과 같기 때문이다. 일례로 모호한 경계 사이로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는 실내구조는 오르내리는 사람을 언뜻 번거롭게 하는 듯하지만 끊임없이 유동하면서, 지금은 사라져가는 전통 골목길의 포근함을 느끼게 해준다. 김덕수패의 사물놀이와 공옥진의 병신춤 등이 공간건축 사옥 지하 한쪽의 공연장에서 탄생한 데에서 보듯 공간건축은 일개 건축사 사무소를 넘어 지난 1970년대 후반 소극장 운동이 태동한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공간건축이 2013년초 최종 부도 처리되고 만 것이다. 리비아와 알제리처럼 혁명의 기운이 드높았던 북아프리카와 중동 시장에서 용역 대금을 회수하지 못한 데다 국내의 끝모를 부동산 경기침체에 따라 미수금이 누적됐고, 거기에 정관계 인허가 비리로 얼룩진 서울 양재동 파이시티 사업 설계비 1백여억 원을 떼이는 일까지 맞물린 게 결정타였다고 한다.

늦었지만 절실한 ‘미래유산’ 보존 노력

물론 그 동안 부수고 짓는 데에 익숙했던 한국 사회에서 예술가의 숨결이 남아 있는 공간이나 주거 형태가 바뀌어 가는 과도기의 특징들이 오롯이 남아 있는 아파트, 그리고 공간건축 사옥처럼 제 아무리 빼어난 것일지라도 민간 소유물을 지켜가자고 하는 건 어쩌면 메아리 없는 외침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두손 놓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 다 지나간 시대의 유산이라며 무시할 수도 있겠지만 미래의 어느 시점에는 결국 그 시대를 잉태한 오랜 유산으로서 기억될 것이기 때문이다.

범위를 조금 더 좁혀 근현대 유산 중에서도 한국사회의 ‘오늘’이 있게 해준 민주화운동 관련 현장들의 사정은 어떠할까. 사회적으로 잘 알려진 곳이라면 보존되는 현장이나 복기되는 인물들이 있지만 조금만 들여다 보면 묻혀 있는 곳들이 부지기수다. 결국 얼마 간의 시간이 더 흐르면 결국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갈 수 있는…… 더욱이 근현대 이전의 역사적 문화적 공간들의 경우엔 문화재보호법상 보호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근현대 역사문화유산, 그 중에서도 민주화운동 관련 현장은 상대적으로 제도적 장치가 미약한 실정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올해는 서울을 비롯하여 한국 곳곳에 산재한 민주화운동의 현장들, 그 중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잘 알려진 곳이라 해도 사라질 위기에 처한 곳들을 중점적으로 돌아볼 예정이다. 특히 지금 이 순간에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못하는 듯 보여도 앞으로 올 미래세대에게 지난 20세기와 21세기 초의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의 여정을 돌이켜볼 수 있는 현장들을 중심으로 말이다. 말 그대로 지금은 그것을 톺아보려는 시선이 미미해도 미래에는 유산이 될 수 있는 현장들, 즉 민주화운동 관현 미래유산을 중심으로 비단 눈에 보이는 건물 뿐만 아니라 그 장소의 시공간적 맥락에도 주목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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