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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 연구보고서] 1980년대 개헌운동과 6.10민주항쟁

[민주화운동 연구보고서] 1980년대 개헌운동과 6.10민주항쟁


[민주화운동 연구보고서] 1980년대 개헌운동과 6.10민주항쟁

<요약문>

6.10민주항쟁은 군부독재체제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하나의 되돌릴 수 없는 대세로 만들어낸 첫 출발점이다. 갓난아이가 자라서 30세의 성인이 될 정도의 오랜 시간이 흘렀지 만 6.10민주항쟁은 여전히 현재적이다. 여전히 현재를 규정하고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과거 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민주주의 형태는 대체로 6.10민주항쟁에서 그 형태를 빚지고 있 다. 동시에 6.10민주항쟁은 오늘날 민주주의 퇴보의 마지노선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우리 는 6.10민주항쟁을 지속적으로 불러내고 탐구하고 재해석해야 한다.

6.10민주항쟁은 한국의 현재적 민주주의의 기원이 되는 대사건인 만큼 상당한 분량의 연 구가 축적되어 있다. 그럼에도 사회운동으로서 6.10민주항쟁의 핵심 슬로건인 ‘개헌’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부재하다는 점이 바로 본 연구의 출발점이다. 본 연구는 사회운동론 특히

‘개헌’프레임에 주목하여 6.10민주항쟁을 분석한다는 점에서 기존 연구의 성과를 토대로 하 면서도 기존연구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본 연구는 사회운동론의 관점에서 6.10민주항쟁을 분석한다. 특히 본 연구는 ‘개헌’프레 임을 6.10민주항쟁의 마스터 프레임이었다고 전제하고 개헌프레임의 등장부터 6.10민주항 쟁에 이르게 되는 과정에 주목해 보았다. 1985년 2.12 총선에서 처음 등장한 ‘직선제 개헌’ 프레임은 그것을 제기했던 신생 야당 신민당을 일약 제1야당으로 급부상시킨다. 이후 시민 사회의 사회운동세력 역시 개헌프레임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면서 개헌 프레임은 단순한 선 거공약으로 남지 않고 이후 ‘개헌’운동을 생성시킴으로써 6.10민주항쟁에 이르는 저항주기 (cycle of protest)의 ‘마스터 프레임’(master frame)으로 기여한다.

사실 개헌프레임이 야당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사회운동세력들은 이 프레 임의 중요성은 인정하되 그것을 지나치게 온건한 것으로 보고 보다 급진적인 프레임으로 대체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일반대중으로부터 소외만 자초한 1986년 5월 3일 ‘인천대회’ 에서의 패배를 전환점으로 사회운동세력 내에서는 개헌 프레임을 받아들이는 온건화 움직임 이 대세로 자리잡게 된다. 그 결실이 바로 야당과 사회운동세력이 협력하여 결성한 6.10민주 항쟁의 지도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이다.

이처럼 개헌프레임에 주목함으로써 본 연구는 그동안 간과되었던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선 6월항쟁을 포함한 개헌운동의 한 주체로서 야당의 중요성과 이중적 역할이다. 사실 그동안 사회운동연구에서 야당의 역할에 대한 균형잡힌 논의는 거의 이루 어지지 않았다. 야당은 제도권 정당으로서 정치사회의 행위자로서만 다뤄지거나 사회운동 연구자들에 의해서는 6월항쟁 기간 내내 저항의 급진화를 염려하는 ‘기회주의자’ 내지는

6.29선언 이후 본격화된 개헌국면에서 개헌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활용한 협상세력으로 주로 다뤄졌다. 물론 야당에게 이러한 모습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동시에 야당은 개헌운동의 한 주체였다. 야당은 6월항쟁의 마스터 프레임인 개헌프레임을 처음으로 제기했으며 그

것을 끝까지 일관되게 주창한 세력이기도 하다. 또한 야당은 제도권내에 개헌을 의제화하 는 동시에 때때로 국회밖으로 나와 개헌운동에 가담하는 운동주체세력이라는 이중적 역할 을 담당했다.

둘째, 마스터 프레임으로서 개헌프레임은 자체적인 대규모 대중동원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개헌은 국민이 자신이 원하는 정부를 선택할 권리를 보장하는 방식으로 헌법을 개정하자는 것이었다. 이는 시민사회의 여론주도세력인 신중간계층의 온건한 개혁 주의와 잘 조응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개헌프레임이 야당에 의해 제기되기는 했으나 대 중 그 스스로에 의해 ‘선택’된 프레임이기도 했음을 의미한다. 사회운동세력의 개헌프레임 의 급진화시도가 실패한 것 역시 ‘절차적 민주주의’의 회복 정도를 염원하고 있었던 대다수 시민들의 정서와 괴리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개헌논의 역시 광범위한 대 중적 지지를 바탕으로 할 때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6월항쟁에서 사회운동세력의 조직가(organizer)로서의 역할이다. 사실 6월 항쟁의 마스터 프레임인 개헌프레임을 야당이 제기했고 개헌프레임 그 자체가 대중동원의 상당부분을 책임졌다면 6월항쟁에서 사회운동세력의 역할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운동세력은 여전히 6월항쟁 발생에 필수적인 요소였는데 이들은 분산 적으로 이루어지던 저항을 하나의 목표를 향해 수렴해내는 조직가로서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이 부재하거나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했다면 6월항쟁은 발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단적으로 1987년 4.13 호헌조치 이후 각계각층에서 시국선언이 발표되고 단식행렬이 이어 지는 수준에서 그쳤다면 국본은 결성되지 못하고 6월항쟁 역시 발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회운동세력이 6.10민주항쟁 발생을 위해 모든 것을 했다거나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는 평가대신에 제한된 역할이기는 하나 필수적인 역할을 했음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 6.10민주 항쟁에 대한 올바른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사회운동 프레임으로서 개헌프레임을 조 망할 때 6.10민주항쟁의 다양한 주체들의 역할과 그 위상에 대해 보다 더 입체적이며 상대 적인 이해가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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